얼굴에 깊게 팬 선들로 인해 사진 속 남자는 강한 인상이다. 오랫동안 같은 표정을 짓지 않는다면 생길 수 없는 주름들. 나는 생각하고 생각했다고 말하듯 완고함과 투지가 미간에 모였다가 얼굴 전체로 뻗어나가듯 주름이 번졌다. 수염에 가려진 입은 그의 얼굴에서 가장 비밀스러운 부분이다. 그러니까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흐려버리는 입이다. 깊이 들어간 두 눈은 동굴의 입구 같다. 왼쪽 눈동자는 꿈쩍하지 않는 부동이지만 오른쪽 눈동자는 금방이라도 울 것같이 흔들린다. 이것이 칼 오베 크나우스고르의 얼굴이다.
히틀러가 선점해버린 <나의 투쟁>이라는 제목을 누구도 선뜻 책 제목으로 삼기는 어려울 테다. 그런데도 노르웨이 작가 칼 오베는 <나의 투쟁>이라는 제목으로 소설을 냈다. 그의 담대함은 어디서 왔을까. 칼 오베는 이념이나 역사적 인물로서의 목소리가 아니라 일상을 살아가는 것, 아니 살아내는 것이 투쟁이라는 말로 히틀러의 거창함에 대항한다.
<나의 투쟁>은 작가의 자전적 소설이다. 이 소설의 줄거리를 요약하는 것은 힘든 일이기도 하지만 큰 의미를 지니지 않는다. 어린 시절부터 자신에게 일어났던 일을 담담하게 엮어갈 뿐이다. 지극히 사소한 일들, 눈 속을 걸어가거나, 친구를 만나거나, 기타를 치는 일 따위를 그리고 있다. 그 속에 극적 반전 같은 것은 없다. 한 가지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하루해가 지고 다음 날의 이야기가 이어진다. 우리가 사는 날들이 그런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곳곳에 작가의 예술관이나 인생관이 에세이처럼 들어가 있다. 그의 글쓰기가 새롭다고 하는 것은 바로 이런 장르 결합적 요소 때문이다. 글은 문턱 없이 이곳에서 저곳으로 자연스럽게 흘러 다닌다.
그런데도 중심적인 이야기의 맥은 아버지와의 관계다. 남성 작가들은 아버지와의 관계 때문에 소설을 쓰게 되는 걸까. 칼 오베 또한 아버지에게 인정받고 싶은 욕구와 아버지에 대한 미움 사이에서 흔들리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런 갈등은 유년 시절부터 성인 된 이후까지 그를 놓아주지 않는다. 알코올 중독인 아버지가 죽음을 맞이한 후 그는 아버지가 칩거했던 집을 찾아간다. 참혹할 정도의 집안 풍경을 작가는 세밀하게 묘사하고 있다. 집안 가득 늘어놓은 술병, 쓰레기에 불과한 옷가지들, 찌그러진 소파, 심지어는 마른 똥 덩어리까지. 그런 아버지와 함께 살았던 할머니마저 알코올 중독이 되고 만 이야기.
칼 오베의 소설을 읽다 보면 우리가 살아가는 일상이야말로 매일의 투쟁이란 생각에 공감하게 된다. 나는 일터에서 타로 카드를 뽑고 긴장된 마음으로 리딩을 기다리는 사람들을 보면서 그 투쟁의 모습이 얼마나 다양한지 알게 된다. 사랑에 대한 투쟁, 돈에 대한 투쟁, 죽음에 대한 투쟁. 자식에 대한 투쟁.
이런 투쟁의 모습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은 타로카드 중 막대 5번 카드다. 이 카드에는 다섯 명의 남자가 각자의 손에 막대를 들고 싸우고 있다. 막대를 높이 들고 소리를 치는 남자, 어깨에 둘러멘 막대를 곧 내리치려는 남자, 앞에 있는 사람을 향해 막대로 위협하는 남자, 그에 대항하듯 막대를 드는 남자, 이게 다 무슨 짓이냐며 소리치는 남자. 이 카드를 보고 있으면 투쟁을 상징하는 카드답게 혼란과 소란스러움 속에서 어찌할 바를 모르게 된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남자들은 서로를 상대로 투쟁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저 자신에 대해서 혹은 뭔지 모를 것을 상대로 싸우고 있는 표정이다. 그러니 이들이 싸우고 있는 것의 정체를 확실히 알 수는 없다.
타로손님 중에 한 할머니가 있었다. 그 할머니는 암 선고를 받았는데 다행히 수술하지 않고 약물치료만 이어가던 중이었다. 삼 개월 뒤에 있을 검사를 위해 할머니는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했다. 암에 좋다는 갖가지 건강식품을 먹고 한의원에서 침을 맞고 기 수련회에서 명상도 했다. 그런데도 할머니는 사형선고를 기다리는 사람처럼 검사 결과가 나오기까지 두려움에 떨었다.
“나 괜찮을까요? 암세포가 다시 나오진 않겠지요? 어제는 괜찮았는데 오늘은 기운이 너무 없어요.”
할머니는 타로 속에 묘수가 있기라도 한 듯 몇 번씩 전화했다. 조금의 변화만 있어도 안절부절못했다. 저런 심정이면 하루하루가 지옥이지 않을까 싶었다. 내가 아무리 안심하라고 괜찮으실 거라고 해도 “그렇죠? 선생님, 괜찮죠?”라며 반기다가도 잠시 후엔 다시 걱정에 사로잡혔다. 얼마나 불안하면 저러실까 싶지만 그런 푸념이 반복되니 그 이야길 받아주는 게 무척 힘들었다.
“기 수련회 거긴 완전 사기꾼이었어. 나더러 절만 하면 무조건 낫는다고 해서 내가 죽어라 절을 했잖아요. 정말 죽어라 하고 했다니까. 아니 그러고 났더니 몸이 더 죽겠는거야. 무릎도 아프고 힘이 하나도 없어. 아무것도 못 먹겠고. 한의원 갔더니 한의사가 이 몸으로 절을 계속하면 안 된다네. 수련회 원장한테 전화해서 몸이 더 안 좋아진다고 했더니 다 과정이라며 낫는다고, 그 말만 하더니 이젠 아예 전화를 안 받네. 다 사기꾼이야.”
할머니는 어느 때는 집요하게 날짜를 요구한다.
“선생님 그러니까 며칠까지 내가 좀 낫겠어요? 오늘이 3일이니까 일주일 뒤엔 덜 아플까요? 우리 영감이 참 다정한 사람인데 이제는 지쳤는지 내 말도 잘 안 들어주네. 나는 이렇게 아파죽겠는데.”
타로가 뛰어난 예언적 능력으로 며칠까지 낫는다는 게 나올 리 만무하다. 그러니 나는 최대한 할머니의 마음을 안심시키려는 말만 되풀이할 수밖에 없다. 일주일 뒤엔 많이 좋아지실 테니 걱정하지 마시고 약도 잘 드시고 의사 선생님 시키는 대로 잘하시라고 하면, 알겠다고 하신다. 그런데 일주일 뒤에 아무런 차도가 없으면 이런 짜증이 돌아온다.
“아니 선생님, 선생님이 일주일 뒤에 좋아진다고 했잖아요. 그런데 난 아직도 아파요. 정말 언제 좋아지는 거예요? 타로에 안 나와요?”
그러고는 한동안 연락이 없다. 아마 여기저기 용하다는 점쟁이나 또 다른 타로 마스터를 찾아다니실 거다. 할머니를 생각해보면 암보다 그로 인한 불안증이 더 큰 병이라 생각될 정도다.
병이나 죽음 앞에 초연한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나는 할머니를 보면서 유난스러움의 정도는 달라도 암 선고를 받은 환자라면 누구나 할머니와 같은 마음이 아닐까 싶었다. 우리는 수행을 통해 자아를 떨쳐버리고 생사에 연연하지 않는 경지에 이른 사람이 아니라 보통의 사람들이다. 그리고 그 보통의 마음은 이처럼 미친 듯 날뛰며 안타까울 정도로 생에 집착한다. 노골적이고 상투적인 모습으로 생을 잡고 늘어지게 마련이다. 그러나 한편으론 생을 미리 놓아버리기도 할 것이다. 바로 칼 오베의 할머니처럼. 칼 오베는 아버지가 죽고 난 뒤 만난 할머니에 대해 이렇게 쓰고 있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할머니는 생기 넘치고, 호의 넘치는 건강한 노부인의 이미지를 유지했다. 그런 할머니에게도 어느덧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다. 그건 나이 때문도 아니었고, 병 때문도 아니었다. 할머니의 거리감은 초연함과 무덤덤함 같은 세상에 대한 무관심 때문도 아니었고, 삶에 대한 피곤함 때문도 아니었다. 할머니의 몸속에 자리 잡은 그것들은 할머니의 빼빼 마른 몸만큼이나 딱딱하고 뾰족했다.”
한때의 아름다움은 다 어디로 사라진 걸까. 생기발랄함과 호기로움은 왜 고약한 모습을 띠게 되었을까. 노인들은 모두 비슷비슷한 얼굴이 되어가고 저마다의 병을 하나둘씩 안게 된다. 그러다 그들은 투쟁할 힘조차 점점 잃어갈 것이다.
“내가 쓴 ‘나의 투쟁’은 이념이 아니라 매일 매일 벌어지는 일상의 작은 이야기들을 다뤘다. 내 인생이 하찮고 내 소설은 사소한 것들로 이뤄졌기 때문이다. 그런 자기 인식을 바탕으로 이 세상에 현존하는 것들에 대해 썼다. 어떤 소설가는 철학의 관점에서 창작을 시작하지만, 나는 인생에서 출발한다.”
인생에서 출발한다는 것, 이런 작가의 생각은 소설을 읽는 내내 그가 무엇을 붙잡고 있는지 느끼게 한다. 그는 소설을 통해 작가로서의 자의식을 던져버리고 한 인간으로서의 자신을 관찰하고 해부해 나가고 있다. 이런 것까지 쓸 수 있나 싶은 부분까지 밀고 나가며 직접적이고 솔직하게 쓰고 있다. 그리고 독자가 공감을 일으키는 부분도 그 하찮음과 비루함이다. 그 속에서 추락과 비상을 반복하는 인간을 본다. 거기엔 한마디로 정리될 수 없는 여러 가지 모습이 있다. 인생에 대한 기대와 자신에 대한 실망, 아버지에 대한 사랑과 미움, 말할 수 없이 구차한 늙은 삶, 최초의 죽음. 그런데 소설을 읽다 보면 그 애잔한 투쟁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이라는 생각이 든다. 인간의 위대함 때문이 아니라 하찮음과 비루함 때문에 사랑이 일어난다. 그런 면에서 타로 상담은 내가 사람들의 투쟁을 볼 수 있는 일이고, 삶의 진실이 무엇일까 고심하게 만드는 일이다. 또한 그 일로 밥벌이를 하는 것 자체가 나의 투쟁이기도 하다.
“나는 항상 삶에서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어둡고 매혹적인 것이 바로 죽음이라 믿어왔다. 이젠 그 죽음이 물이 새는 수도관, 바람에 부러져버린 나뭇가지, 옷걸이에서 미끄러져 바닥으로 떨어져 버린 옷 한 벌과 다름없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가족 중 죽은 이가 있다면, 그의 유품을 정리하고 그의 옷가지와 노트를 쓸어 담아 불태운 적이 있다면 이 말이 무슨 뜻인지 금세 알 것이다. 관념이나 철학이 아니라 사실을 만지고 본다면 죽음은 도처에서 목격되는 부러져버린 나뭇가지일 뿐이다.
나는 손님을 기다리며 소설을 읽었다. 늘 책을 놓지 못하면서도 소설이 무얼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했었다. 그런데 칼 오베의 소설을 읽으면서 문학과 예술은 분명 삶의 구제한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의 글은 보잘것없는 우리의 일상을 구제하고 일상의 투쟁을 이어가고 있는 모든 이들에게 동지애를 느끼게 한다. 우리가 삶의 진실에 다다르고자 할 때 무엇보다 사실을 붙잡아야 한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