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이라는 책

by 열매

영국의 어느 도서관에는 ‘인간책’이라는 코너가 있다고 한다. 그야말로 한 사람 한 사람이 한권의 책이라서 그 사람이 살아온 이야기를 듣고 싶을 때 인간책을 신청할 수 있다. 은퇴한 선생님, 전과자, 은행장, 작가, 퇴역한 군인, 다섯명의 아이를 홀로 키운 엄마, 입양아를 둔 부부 등 인간책은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저 사람의 인생은 어떠했을까. 어떻게 그런 어려움을 이겨냈을까. 인간책을 불러낸다. 그러면 살아있는 책이 내 앞에 앉아 자신의 인생을 들려주기 시작한다. 주름진 얼굴, 부드럽고 온화한 눈빛은 문장의 깊이만큼이나 깊고 길다. 그리고 한 페이지 한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기쁨과 눈물, 망설임과 기다림, 작은 한숨소리가 들린다.

살아가는 일이 비슷비슷한 것 같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어떤 직업을 가지고 어떤 곳에 사느냐에 따라 개개인의 인생은 사뭇 다르다. 그들의 고통과 기쁨은 각기 다른 빛깔을 내고 각기 다른 근원을 갖기 마련이다. 나는 타로상담을 하면서 매일 인간책을 한 페이지씩 펼쳐보는 기분이 들었다. 그들 중에는 책의 마지막 페이지를 앞둔 사람도 있고, 중반을 넘어선 사람도 있다. 비극도, 희극도, 시적인 이야기도 있다. 이제 막 인생의 클라이맥스를 향해 가는 젊은이는 자신의 책이 끝날 날 같은 것은 생각지도 않는다. 그들은 자기 앞에 놓인 빈 페이지를 보며 갖가지 멋진 장면을 떠올릴 뿐이다. 한없이 가볍고 허황되고 아름다울 수 있는 건 그 젊음 때문이란 걸 그들은 미처 알지 못한다.

두 명의 젊은이는 내 앞에 앉을 때부터 소란스러웠다. 야, 이 새끼야, 내가 먼저 할 거라니까. 하면서 서로 팔을 잡아당기며 장난을 쳤다. 이십대 초반으로 보이는 두 사람은 유난히 얼굴이 하얗고 조그마했다. 이미 그 나이는 아니지만, 둘 다 아이돌 연습생이나 길거리에서 캐스팅제의를 받을만한 외모였다. 한 명은 청자켓을 입었고, 또 한명은 가디건은 걸치고 있었다. 한창 흥행중인 영화를 보려는지 영화 팸플릿을 둘 둘 말아서 손에 들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두 사람 다 얼굴에 가벼운 화장을 했다.

“뭐 물어봐야 해요? 돈 잘 버나 이런 거 보면 되나요?”

청자켓을 입은 쪽이 먼저 앞쪽으로 몸을 숙이며 물었다.

“아 씨바 떨린다. 잘 뽑아야 해. 으라차차.”

하얀 치아를 드러내며 웃는다. 젊은이는 판돈이라도 건 사람처럼 양손을 비비더니 카드 한 장을 뽑았다. 세 개의 컵 카드가 나왔다.

“보기엔 좋은걸. 저번에 타로 봤을 때는 무시무시한 카드가 나왔거든.”

축하할 일이라도 있는 걸까. 세 명의 여신은 컵을 쥔 손을 높이 들고 있다. 뒷모습을 보이고 있는 여신은 기쁨에 겨워 발뒤꿈치마저 들어 올리고 있다. 파티가 시작된 모양이다. 포도주와 과일과 맛있는 음식으로 가득한 테이블이 바로 옆에 있을 것 같다. 이미 오른쪽 여신의 손에는 풍요를 상징하는 포도송이가 들려있다. 그뿐만 아니라 그녀들의 발치에는 호박 넝쿨과 과일들이 가득 쌓여있다. 따사로운 햇살, 향기로운 꽃향기, 부드러운 봄바람. 그녀들에겐 고된 노동도, 육아의 괴로움도 없을 것이다. 포도주를 한 모금 마시자 금세 기분이 좋아진다. 이제 막 시작된 파티가 언제 끝날지 모르겠다. 건배를 한 여신들은 몸을 빙그르 돌려 춤을 추기 시작한다. 그녀들의 풍성한 옷자락이 이리저리 물결친다. 새들의 지저귐처럼 가벼운 웃음소리가 점점 날아오른다.

“카드에서 하는 말이 맞기도 하죠. 놀고 돈 버는 거니까요. 선생님, 우리가 하는 일이 뭔지 아세요? 우리 호빠에서 일해요.”

청자켓을 입은 청년은 잠시 뜸을 들이다가 낮은 목소리로 말하더니 피식 웃었다. 이 일은 잠시 할뿐 정식 직업은 아니에요, 하고 덧붙였다. 이제 그들은 좀 더 편하게 질문하기 시작했다.

“사실 몇 달만 하고 말려고 해요. 돈을 좀 모으면 그만 둘 거니까요. 근데 누나들요. 우리 고객 중 한 누나가 있는데 스폰을 좀 받을 수 있을까요?”

젊은이는 이건 정말 궁금한 듯 조금 전과는 달리 진지하게 물었다.

“이 누나가 뭔가 해줄 듯 해줄 듯 하면서도 확실하게 말을 안 하네요.”

옆에서 듣고 있는 가디건을 입은 청년이 말했다.

“야 임마, 그 누나는 거의 다 넘어왔어. 해 줄 거야. 걱정마, 걱정마.”


영화가 끝났는지 사람들이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줄줄이 내려왔다. 흥분된 목소리로 영화 결말에 대해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파도가 쓸려가듯 그렇게 한 무리의 사람들이 쓸려 내려갔다. 두 젊은이는 고개를 돌려 사람들을 흘낏 쳐다봤다. 날렵한 턱선이 아름다웠다. 사람들을 등지고 앉은 이들은 청춘영화에 등장했더라도 어울릴 것 같았다. 장국영처럼, 팬티와 러닝셔츠만 입고 맘보춤을 추던 앳된 장국영처럼, 그들은 타락한 걸까. 여전히 순수한 걸까. 그것도 아니면 방황하는 걸까. 그들은 어떤 곳에 서 있는지, 무엇을 하는지도 모른 채 어딘가를 부유하고 있는 것 같았다. 몽롱한 음악에 몸을 싣고, 더위로 인해 나른한 상태로, 무엇도 심각할 것 없는 얼굴로 그들은 젊음 그 자체에 취해 있었다. 문득 그 가벼움이 부러웠다. 장국영의 ‘아비정전’처럼 이 두 젊은이의 ‘정전’의 한 페이지가 그렇게 쓰여 지고 있었다.

“우리가 하는 일이 그냥 놀고 돈 버는 것 같죠? 천만의 말씀입니다. 나름 어려움도 많고 직업정신이 있어야 한다니까요. 이 세계도 그렇다니까요. 직업정신이 뭐냐고요? 내가 누나를 정말 사랑하고 있다고 믿게 만들어야 해요. 그러려면 나 스스로가 그 누나를 정말 사랑하고 있다고 믿어야 한다니까요. 그런 척해서는 안 된단 말씀이죠.”

두 사람은 그들만이 공유할 수 있는 그 세계의 룰에 깊이 공감한다는 듯 서로를 보며 웃었다. 지금까지 맞장구만 치던 가디건을 입은 청년이 손에 쥔 영화 팸플릿을 둘둘 말며 말했다.

“정신노동에 육체노동을 더한 거라니까요. 누나들의 문자에 일일이 답해줘야죠. 술 마시고 놀아야죠. 달달하고 유치한 장난도 쳐야죠. 막말로 우리 나이 또래 여자애들과는 노력을 안 해도 그게 자연스럽게 되는데요. 이 아줌마들, 아니 누나들은 상상력을 필요로 한단 말입니다.

그리고 적당한 때를 봐서 필요한 걸 해달라고 해야 되요. 누나들은 눈치가 빨라서 어지간해서는 돈을 안 써요. 가게 매상은 올려주지만, 그게 우리한테 다 오는 것도 아니고. 어떻게 상상력을 발휘 하냐고요? 글쎄요. 야, 넌 어떻게 하냐?”

가디건을 입은 청년이 팔꿈치로 옆에 있는 친구를 툭 치며 물었다.

그들이 말하는 여자들은 무엇에 취해 있을까. 세 개의 컵을 들고 있는 여자들 중 두 명만이 얼굴을 보인다. 그녀들의 얼굴은 매우 단순하게 처리되어 있어서 표정이 풍부하진 않다. 한 명은 다소 표독스러워 보이고, 다른 한 명은 멍청하다. 뒷모습을 보인 여자는 어떤 얼굴일까. 그녀들은 가정에 있을 때와는 다른 얼굴일지 모른다. 아이를 다독여 학교에 보내고, 남편의 어깨에 묻은 먼지를 털어내며 오늘도 수고하라고 말하는 그 다정함과 정숙함을 말끔히 벗어내 버렸는지 모른다. 그녀들은 지겨운 가면을 벗어던진 듯 홀가분하고 자유롭다. 자신들을 누르는 공허함과 그 공허함의 이유가 무엇일까 하는 것은 모두 잊어버려도 된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녀들은 무엇에든 취하고 싶다. 포도주를 마시고 그 씁쓰름한 맛에 취한다. 그러고 나면 사랑에 취는 것은 너무 쉬운 일이 된다.

그녀는 한동안 호빠에 가는 게 낙이었다고 했다. 젊고 몸도 좋은 남자애들과 노는 게 그렇게 재미있다며. 그러다가 돈이 너무 들어서 남자애들이 노래방 도우미로 나오는 노래방엘 간다고 했다. 일주일에 한 번은 간다며 그것도 만만치 않게 돈이 드는데 중독이 됐는지 안가면 사는 맛이 없다고 했다.

“걔네들 중에는 대학생도 있고 아이돌 연습생하다 그만 둔 애도 있고 그래요. 다들 얼마나 예쁘게 생겼다고요. 웃기는 얘기도 잘하고 노래도 잘하고 춤도 잘 춰요. 시간 가는 줄 모르죠. 어떻게 노냐고요? 젊은 애들 열 명이 들어와요. 그러면 마음에 드는 애를 고르죠. 술을 시키는데요, 일단 온 몸에 다 부어요. 아 선생님은 아예 모르시는구나.”

여자는 몇 번 전화로 이런 얘길 했었다. 그러나 정작 그녀가 궁금한 것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녀는 아무 이야기나 주절주절 할 뿐이었다. 딸깍 딸깍 라이터 만지는 소리가 전화기 너머로 들렸다. 어떤 애는 이렇게 생겼고, 어떤 애는 노래를 진짜 잘하고, 노래방에는 혼자 가는 게 아니라 아는 동생과 같이 가는 거고, 그 동생은 돈을 내지 않고, 자기를 호구로 생각하고.

“그런데 선생님, 준이라는 애가 있어요. 그 애가 자꾸 연락이 와서 내가 좋다고 하네요. 귀엽지 않아요? 정말 웃긴다니까요. 그래서 나는 스폰 같은 건 못해준다고 했더니, 자긴 그런 거 아니라고, 정말 누나가 좋아서 그런다고. 정말 그렇다고.”

여자는 몇 번이나 그 말을 하면서 혼자서 깔깔대고 웃었다.

“걔네들 하는 수작이 뻔 하다 싶으면서도 이따금 진짜일까, 그런 생각이 들기도 해요. 그런 말을 듣고 있으면 다 잊게 되요. 술 마시고 웃고 노래를 부르다 보면 내가 없어요. 뭐가 어떻게 되든 상관없다 싶어지는 거죠. 나도 잘 모르겠어요. 왜 자꾸 거길 가는지. 다음날이면 그 모든 게 후회가 되거든요.”

한동안 딸깍 딸깍 라이터 만지는 소리만 들렸다. 그녀가 쓰는 자신의 ‘정전’에는 무슨 말들이 있을까. 지금 이 순간에 대해 나이가 든 후에는 어떻게 기억할까. 그리고 언젠가는 지난 일들에 대해 이해할 수 있는 때가 올 것인지. 그녀는 두어 번 그렇게 전화를 하더니 더 이상 연락이 없었다. 마치 새 한 마리가 어딘가로 날아가 버린 것 같았다.

이제 청년들은 떠났다. 영화가 곧 시작될 것 같다며, 저녁에는 일하러 가야한다고 했다. ‘아비정전’에서 장국영을 좋아했던 여자들은 장국영을 잡아두지 못했다. 그는 한 마리 새처럼 저 홀로 떠다니다가 날아가 버렸다. 그러나 그가 여자에게 한 대사는 아직도 기억된다. ‘너와 나는 1분을 같이했어. 난 이 소중한 1분을 잊지 않을 거야. 지울 수도 없어. 이미 과거가 되어버렸으니까.’ 영화를 보러 떠난 청년들은 여자들에게 이런 진부한 말을 하지 않을 것이다. 더 이상 연락하지 않는 여자도 이런 진부한 말을 귀담아 듣지 않을 것이다. 대신 그들의 ‘정전’에는 다른 진부한 말들이 가득할 것이다. 언젠가 인생을 마칠 때쯤에는 그런 진부한 말들 앞에서 머뭇거리게 될 지도 모른다. 한참을 그렇게 머뭇거리다 보면 젊은 날, 생을 마친 장국영처럼 자신들의 한 때가 이미 오래 전에 죽었음을 깨달으며 책장을 덮을 것이다. 모두 아름다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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