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인생 5

서커스가 오던 날

by 열매

마을에 서커스단이 온다는 소문이 돌자, 동네 아이들은 흥분에 휩싸였다. 작은 읍내에서 문화생활이라고 해봐야 별게 없었다. 장날에 약장수가 벌이는 원 맨 쇼나 일 년에 한 번 ‘저 하늘에도 슬픔이’ 같은 영화를 체육관에서 볼 수 있는 게 전부였다. 처음 영화를 봤을 때 아이들은 떼 지어 울었다. 그때는 영화 속 사람이 정말 죽는 줄만 알았기 때문이다.

영화에 대한 잔상이 머릿 속에 맴돌았지만, 며칠 지나지 않아 우리는 늘 하던 대로 골목에서 소꿉놀이나 고무줄놀이를 했다. 아니면 냇가에서 모래성을 쌓거나 물고기를 잡았다. 이처럼 조용한 읍내에 서커스단이 온다는 것은 외국 사람이 온다는 말만큼이나 놀라운 소식이었다.


“진짜로 코끼리나 사자도 올까?”

“당연하지. 서커스단에 거기 없으면 우야노.”

텔레비전에서 보던 사자와 코끼리, 원숭이를 볼 수 있다고 생각하니 잠이 오질 않았다. 줄 위에서 외발자전거를 타는 것은 또 얼마나 멋진가. 날렵한 몸으로 허공을 휙휙 날아다니는 모습을 진짜로 볼 수 있는 건가.

오빠들과 나는 몇 밤을 더 자면 되는지 쫙 편 손가락을 하나씩 접어가며 숫자를 셌다.

“닷새만 기다리면 된다.”

파란 천막은 개천에 있는 모래밭에 세워졌다. 서커스단이 짐을 부리고 천막을 치느라 분주한 동안 동네 아이들은 방죽에 늘어서서 천막 기둥이 세워지는 모습을 경이에 찬 눈으로 지켜봤다.

“그런데, 코끼리는 어디 있노?”

옆집 영순이가 쪼그려 앉아 있다가 물었다.

“사람들 놀래 줄라고 어디 숨겨 놨는갑다.”

“엄청 큰 코끼리를 어디다 숨긴단 말이고?”

누구도 대답하지 못했지만, 어딘가에는 있을 거라고만 생각했다.

평소라면 어둠을 담고 흘렀을 냇물 위로 작은 불빛들이 반짝거렸다. 비밀스러운 천막이 열리기를 고대하는 얼굴들. 아이들은 풍선을 손에 쥐고 꽥꽥 소리를 질렀다.

“세상에 둘도 없는 쇼가 펼쳐집니다. 어서 오십시오. 동해~~~서커스가 여러분을 모십니다.”

난쟁이가 춤을 추고, 원숭이가 재주를 부렸다. 근육이 울룩불룩 한 남자는 굵은 쇠사슬을 끊었다. 사람들은 박수를 치고 소리를 질렀다. 분홍색 치마를 입은 소녀가 긴 장대를 들고 외줄 위로 걸어갔다. 팽팽한 줄, 숨죽인 사람들, 열기와 조바심. 다행히 소녀는 한 마리 나비처럼 사뿐히 반대편에 도착했다.

다음에는 외발자전거를 탄 소년이 여러 개의 공을 번갈아 돌리며 줄 위를 건너갔다. 자전거를 타고 줄 위에서 균형을 잡는 것도 어려울 텐데 그 위에서 저글링을 하다니. 소녀가 보인 묘기가 시시해 보일 정도였는데도 소년은 무표정하게 공을 돌릴 뿐이었다.

그제야 나는 좀 궁금해졌다. 저 아이들은 학교에 가지 않아도 되는 걸까. 항상 이렇게 여행을 하며 사는 걸까. 얼마나 신나고 좋을까 하고. 시시한 고무줄 놀이로 하루를 보내는 것이 아니라 그들은 늘 흥미진진한 모험을 하며 살 것 같았다. 나는 그 모험에 마음이 들떴다. 느닷없이 불어닥칠 새로움과 놀라움. 다른 세상으로 부터 온 정령들이 허공 위를 날아다녔다. 천막 안을 가득 채운 땀과 열기로 인해 나는 점점 하늘 위로 떠오르는 것만 같았다. 비현실적이고 기이한 것에 대한 들뜬 희망처럼.

모래밭 위로 색종이가 떨어지면서 쇼는 끝이 났다. 그런데 누구도 코끼리를 보지 못했다. 사자도 마찬가지였다.

“순 거짓말쟁이다. 코끼리는 없었으면서.”

경식이가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말했다.

“그래도 원숭이는 봤다 아이가.”

“나도 공중에서 붕붕 날 수 있으면 좋겠다.”

동네 아이들에게 커다란 열망을 남겨놓은 채 서커스단은 떠나버렸다. 그런 뒤 어디에서 시작된 이야기인지 모르겠지만, 식초를 먹으면 서커스단 아이들처럼 몸이 자유자재로 접힌다는 소문이 돌았다.

우리는 부엌 찬장에서 식초병을 꺼내 코를 막아 쥐고 한 모금씩 삼켰다. 그들처럼 몸을 뒤로 젖히면 머리가 땅에 닿을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며칠이 지나도 누구 하나 공중제비를 돌지 못했다. 애써 몸을 젖혀도 땅은 멀기만 했다.

아이들은 뭉쳐두었던 고무줄을 다시 꺼냈고 모래밭에서 모래성을 쌓았다. 그러다 저녁 먹으라는 엄마의 목소리가 들리면 집으로 뛰어갔다. 간혹 모래 속에서 빨간 풍선 조각이 발에 걸렸는데 그걸 보면 희미한 꿈의 한 조각이 남겨진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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