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의 장소
연날리기를 하고 수영을 하고 서커스단이 다녀가기도 했던 개천은 어린 시절에 비해 물의 양이 많이 줄었다. 이제 물고기를 잡는 아이는 더 이상 없다. 몇 년 전, 작은 오빠는 개천이 보이는 아파트에서 뛰어내렸다. 읍내에서 가장 높기 때문인지 아니면 개천을 볼 수 있어서인지 모르겠지만 오빠는 그곳에서 무용하고 외로운 삶을 마감했다.
어느 겨울 그는 세차게 뛰었었다. 연을 쫓아서. 나는 그때의 그를 알고 있다. 연을 잃어버리고 남은 실만 손에 쥐고 돌아왔던 어린 그. 어떤 미래도 그려지지 않았던 그의 얼굴. 자신의 운명이 개천에서 끝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을 어리석은 그 얼굴.
나는 가끔 죽은 오빠 꿈을 꾼다. 그러면 꿈속에서마저 무겁고 두렵고 불행하다. 더는 다가가고 싶지 않은 고독의 검은 강 같다. 오빠가 어떤 걸 느끼고 어떤 생각을 했는지 알지 못한다. 내가 알 수 있는 건 단지 애처로운 인간의 어그러진 모습뿐이다. 아름답고, 희망차고, 선명하고, 건강한 모든 것들과 그는 정확하게 대조를 이룬다.
꿈속에서 그는 나를 질책하는 얼굴이다. 나를 자꾸만 불편하게 한다. 왜 자신을 숨기려 하느냐고. 자신의 인생을 말해줄 사람은 너밖에 없지 않냐고. 잘 모르겠다. 어떻게 해야 오빠의 인생에 대해 의미 있는 이야기를 할 수 있을지.
그럼에도 말해지고자 하는 '어떤 이야기'가 그곳에서 오랫동안 날 기다리는 것만 같다.
오빠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라도 다시 돌아가야 할 것 같다. 할머니가 우리 집에 처음 오셨던 그 날로. 보잘것없는 한 집안의 역사가 슬그머니 다시 이어졌던 그 날로 가서 천천히 시작해 보자.
나는 열 살이 될 때까지 할머니를 본 적이 없었다. 할아버지는 일제 강점기 때 징용 갔다 온 뒤 병 때문에 돌아가셨다는 말은 들었었다. 그러나 할머니에 대해서는 모른다.
어느 날 할머니가 선물을 가득 안고 우리 집으로 들어섰다. 장미가 한창 피었을 때라 할머니는 무엇보다 그 향기에 놀란 듯했다. 한동안 정원 앞에 가만히 서 계시더니 엄마가 이끄는 대로 마루로 올라오셨다. 할머니는 집안을 찬찬히 둘러보며 고개를 조금 끄덕였다.
“할머니 시다.큰절 올려라.”
부모님은 할머니에게 절을 올렸고 이어 우리도 따라 했다. 나는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눈물을 흘리는 할머니보다 방금 내려놓은 선물가방이 더 궁금했다. 그러나 부모님과 할머니는 모두 심각한 얼굴이었다.
“그래도 이리 잘 살아왔네.”
22년 만의 재회였다. 서로가 바라던 재회는 아니었지만 도시에 살고 있던 할머니를 우연히 만난 고향 사람이 아버지에게 알려주면서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과부가 된 할머니는 애가 다섯이나 딸린 홀아비에게 재혼을 했단다. 아버지에게는 아무런 말도 없이 어느 날 집을 떠났단다. 그때 아버지는 17살이었으니 다 컸다고 할 수 있지만, 엄마가 자신을 버리고 갔다는 원망을 가슴에 품을 수밖에 없는 나이이기도 했다.
그 모두가 가난 때문이라고 할머니는 말했다. 그리고 팔자가 사나워서 그렇다는 말도 덧붙였다. 그래도 좋은 모습으로 만나지 않았냐는 안도감 같은 게 점차 흐르기 시작했다. 아버지는 할머니 앞에 정원 딸린 집과 딱 맞게 낳은 삼 남매를 상장처럼 내밀며 지난 원망을 지우려 했다.
그러나 내게는 그저 낯선 할머니일 뿐이라 별다른 감정이 없었다. 더군다나 할머니는 곁을 주지 않을 것처럼 차가운 인상이라 나는 쉽사리 ‘할머니’라는 말이 나오질 않았다. 그래도 선물을 받는 건 좋았다. 어깨 부분에 레이스가 달린 체크무늬 원피스였는데 읍내 장터에서 파는 옷과는 달라서 나는 여름 내내 그 원피스만 입었었다.
그 뒤로 가끔 할머니를 만났지만 내 감정은 더 나아질 게 없었다. 그렇게 오고 가는 동안 아버지의 마음속에 눌러있던 원망이 녹아 없어졌을까. 불행히도 그렇지 않았다. 아버지 속에는 술과 함께 풀려나오는 짐승이 있어서 쉽사리 울부짖었고 내내 우리를 두려움에 떨게 했다. 그래서 우리는 집보다는 개천에 나가 있는 시간이 더 많았다. 아버지는 영영 몰랐을 것이다. 자신이 딸의 마음속에 또 다른 어둠을 만들고 있었다는 것을.
우리는 놀고 놀고 놀았다. 아이가 갖는 탄성은 육체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즐거움에 빠질 수 있는 마음에도 있다. 개천은 우리에겐 자유의 땅이었고 개방의 땅이었다. 그래서 놀고 놀고 놀았다. 아버지의 술 냄새가 풍겨오는 저녁이 오기 전까지.
나는 ‘어떤 인생’에 대해 쓰고 있다. 자기의식을 갖고 살아간다는 것은 여전히 내게는 기이한 일이다. 누구도 나와 같이 보지 않고, 나와 같이 느끼지 않고, 나와 같이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는 모두 비밀에 휩싸인 각자의 내면세계를 갖고 있으니 그건 선물일까, 감옥일까. 또한 기억은 사실을 배신하기 마련이고 외부는 내부와 뒤섞여 있기 마련이다. 그곳에 어떤 진실이라는 게 있을지 모르겠다.
결국 ‘어떤 인생’은 나의 의식이 연주하는 내면과 세계의 2중주일 테지만, 양탄자의 앞뒷면과 같을 테지만, 무엇보다 ‘나를 기억해 줄 누구도 없는, 나를 위한’ 글이다. 아이가 있는 사람은 자신의 인생이 아이에게로 흘러들어 기억될 것이라 기대한다. 너 낫게 변형되고 더 발전되길 바라면서. 그러나 나는 아이가 없다. 프루스트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라는 길고 긴 소설을 쓴 것은 아이가 없었기 때문이라고 마음대로 생각한다.
어떤 서사는 영웅의 서사가 되기도 하지만 (사람들은 그런 서사를 바라지만) 내 인생의 서사는 변경의 장소만을 따라가는 서사가 될 것 같다. 그런데 어쩌겠나. 내가 쓸 수 있는 유일한 서사가 그뿐이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