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잃어버린 소
작은 오빠에 대한 상징적인 장면이 ‘잃어버린 연’이라면 아버지는 ‘잃어버린 소’였다.
할머니는 허름한 집과 소 한 마리를 남겨두고 아버지를 떠났다. 이로써 3대 독자였던 아버지 곁에 피붙이라고는 아무도 없게 되었다. 부잣집의 3대 독자였다면 그의 인생은 달랐을 테지만, 척박한 땅에 겨우 뿌리내린 집안의 3대 독자는 기댈 곳 없는 신세라는 말과 다름없었다. 마치 바닷가 바위틈에 박힌 나무처럼 위태로운 핏줄이었다.
혼자 남은 아버지는 먼 곳으로 가서 돈을 벌어볼 요량으로 집을 팔고 소를 팔기로 했다. 그것이 허황한 바람이라는 걸 알려줄 만한 사람도 없었던 모양이다. 단번에 인생을 변화시킬 방법을 궁리하고 궁리한 끝에 내린 결론이었고 모든 것이 가능할 것만 같았다. 아버지의 상상 속에서는 그랬다.
아버지는 전 재산인 소 한 마리를 끌고 고향을 나섰다. 동구 밖을 나갈 때만 해도 희망을 품고 있었을 테다. 복수가 될 만한 성공을 거두고 말 것이라고 다짐했을 테다. 돈을 벌고, 고운 아내를 얻고 금의환향할 거란 꿈도 꾸었을 테다. 한나절도 가지 못할 꿈이었지만 말이다.
하필이면 그 전날 비가 많이 온 탓에 불어난 계곡물이 사납게 흐르고 있었다. 바지를 걷어 올린 아버지는 물살이 세찬 것이 꺼림칙했지만 그렇다고 고향으로 되돌아갈 생각은 들지 않았다. 소를 당겨 계곡을 건너기 시작했다. 산허리에 흰 구름이 길게 걸려있었다. 이제 곧 한여름이 올 것이다. 소는 계곡에 들어서며 음매하고 길게 울었다. 소는 자꾸 울며 고개를 돌렸다.
잠깐 사이 계곡물이 허벅지까지 차올랐다. 바위 사이로 흐르는 물은 사납게 허리를 휘고 몸을 뒤틀며 요동쳤다. 계곡 가운데에 이르자 물소리가 천지를 덮었다. 소의 다리가 모두 계곡물속으로 잠겼다. 어서 건너자. 아버지는 소를 잡아당겼다. 허기진 물이었을까. 거친 물살이 소와 아버지를 세차게 끌어당겼다. 어어. 단단히 잡은 밧줄이 손바닥을 불같이 데우며 빠져나갔다. 음매. 음매.
아버지의 가슴속에는 몰락의 소리가 훑고 지나갔다. 사방으로 물보라가 튀어 오르며 눈을 가렸다. 세상이 기울어지고 소가 울었다.
공포에 질린 소의 눈망울을 몇 번 보았다. 물속을 허우적거리다 일어나 보니 소는 이미 저만큼 떠내려가고 있었다. 청명하기만 한 오후, 햇살마저 깨끗한 날. 아버지는 이 모든 것이 꿈이길 바라며 물속에 서 있었다.
어째서 이처럼 철저하게 모든 걸 빼앗아 가냐고 소리쳤지만 들리는 것이라곤 기운찬 물소리뿐이었다. 아버지는 소리 내어 울기 시작했다. 눈물을 모두 쏟고 난 다음 아버지의 가슴속에 차오르는 것은 상실과 분노의 불길이었다. 그리고 그 불길은 종종 이해할 길 없는 우리를 향해 타올랐다. 물론 아버지 자신도 타들어 가며 매캐한 연기를 남겼다.
가족으로부터 사랑을 느끼고 싶었을 아버지의 희망과는 달리 우리는 아버지를 두려워했다.
그 시절의 아버지들은 비슷비슷하게 폭력적이었고 비슷비슷하게 불행이 많았다. 아마 그들 자신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을 것이다. 술에 취해 온갖 난동을 부리다가도 다음 날이면 눈물을 흘리며 후회하는 아버지를 보며 나의 감정 또한 혼란에 빠지기 일쑤였다. 아버지 자신도 상처받았으면서 내 자식이 그럴 수 있다고는 생각지도 못했던 것 같다. 그러니 아버지와 나 사이에 다정한 시간 같은 건 기억 속에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뜻밖에도 한 장면만은 잘못 찍힌 사진처럼 남아있다.
어느 아침 나는 떼를 쓰다가 엄마에게 야단을 맞았다. 12색이 아니라 24색 크레파스를 사달라고 하며 울고불고 난리가 났었다. 살림을 아껴야 했던 엄마는 지금 있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냐고 타일렀지만 소용없었다. 그러다 야단을 맞았고 나는 집을 나와 개천으로 갔다.
흐르는 물을 쳐다보며 훌쩍훌쩍 울었다. 학교에 가기 싫었다. 물결 위로 햇살이 반짝이는 걸 하염없이 보다가 이미 수업이 시작되었을 거란 생각이 들자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그때 날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숙아, 숙아”
뒤돌아보니 아버지가 자전거를 타고 방죽 위에 서 있었다.
“얼른 와라.”
나는 방죽 위로 올라갔다. 아버지가 자전거 뒤에 타라고 했다. 나는 자전거 뒷자리에 앉아 아버지의 허리를 잡았다. 그러나 꽉 잡지는 못했다. 덥석 잡을 수 없는 게 아버지였다. 아버지와 함께 자전거를 타고 방죽을 건너고, 장터를 지나고, 버스터미널을 돌아나갔다. 아버지에게서 땀 냄새가 났다. 자전거 페달을 밟을 때마다 쉭쉭 바람 소리가 들렸다.
다정함이 있었더라면 나는 아버지의 허리를 꽉 잡고 등에 기댈 수도 있었을 텐데. 나는 그저 아버지의 허리쯤에 있는 옷자락을 겨우 잡았을 뿐이다. 그럼에도 어떤 든든함이 자전거를 타는 내내 마음을 채워주었다.
학교 운동장은 텅 비었고 아버지는 자전거를 타고 떠났다. 나는 땀이 배어 축축한 손바닥을 바지자락에 쓱 닦으며 교문을 드러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