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인생 9

by 열매

# 중동에서 온 편지 1



아버지가 떠난 자리에 엄마의 배틀이 놓였다. 단조롭고 건실한 소리가 집안을 채웠고 나는 변함없는 그 규칙성이 좋았다. 천둥처럼 몰아치지 않고, 폭우처럼 쏟아지지 않는 그 소리로 인해 전에 없이 평화로운 저녁을 보낼 수 있었다. 착착 책책 착착 책책. 때때로 높아지는 건 우리들의 웃음소리뿐이었다.

선풍기를 털어놓아도 땀이 줄줄 흐르는 여름 동안 엄마는 ‘신성건설’이라고 찍힌 수건으로 목덜미를 닦았다. 커다란 목욕 타월부터 세수할 때 쓰는 타월까지. ‘신성건설’ 수건은 여러 해 동안 집안 곳곳에서 발견되었다. 그때 나는 열 살이었고 아버지는 사우디아라비아로 떠난 뒤였다.

1960년대에는 광부와 간호사가 서독으로 떠나던 시기였고, 1970년대에는 건설노동자가 중동으로 떠나던 시기였다. 1974년에 처음 건설노동자가 중동 진출을 시작했는데 해마다 그 규모가 늘어났다. 1978년부터 국내 건설사들은 전국 일간지에 매일 같이 중동 요원 모집에 전력을 기울였다고 한다. 그 소문은 우리 동네까지 들려와 미장공이던 아버지는 일 년 만 다녀오면 빚도 갚고 한밑천 잡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하며 그 대열에 합류했다.


어느 날, 부모님은 커다란 여행 가방을 꾸리기 시작했다. 여행 가방을 든 아버지는 정원을 한 바퀴 돌아본 뒤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아버지 없는 동안 엄마 말 잘 듣고 공부도 잘하고. 알았제?”

우리는 작은 울먹임도 없이 여느 날과 다름없이 “아버지 안녕히 다녀오십시오.” 하고 인사한 게 다였다. 아버지는 더 큰 감사의 말을 기다리는 듯 잠깐 우리를 쳐다보다가 가방을 들고 골목길로 걸어갔다. 부족한 이별과 함께 아버지의 뒷모습이 사라지자 포근한 기쁨이 차오르는 걸 막을 수 없었다. 아버지가 떠난 뒤 집은 더 넓어지고 더 안전한 곳이 되었다. 나는 중동이 얼마나 더운지 알지 못한 채 늦게까지 텔레비전을 볼 수 있을 거란 생각으로 들떠 있었다.

처음 서울에 간 엄마는 아버지를 배웅하기 위해 동행한 이모 내외와 함께 남산에서 사진을 찍었다. 하얀 블라우스에 꽃무늬 치마를 입은 엄마, 파란 원피스를 입은 이모. 그녀들은 통통하고 젊은 엄마였다. 아버지와 이모부는 흰 셔츠에 검은 바지를 입었다. 더위로 인해 발갛게 달아오른 얼굴 뒤로 남산 팔각정이 보이고, 엄마와 이모가 신은 하얀 양말이 종아리 아래 얌전히 빛났다. 그들은 관광이라도 온 것처럼 들뜬 얼굴이었다.

엄마는 다른 생각은 없었다고 했다. 아버지가 돈을 벌어온다면 살기가 더 수월할 거라고, 아이들을 위해 도시로 나갈 거라고. 엄마는 오직 그 생각뿐이었다고 했다. 그러니 엄마 또한 중동이 얼마나 더운 곳인지는 알지 못했다.


보름쯤 지났을 때, 빨간색과 파란색 줄이 비스듬히 그어진 국제 우편봉투가 도착했다.

“엄마, 아버지 편지 왔어.”

우리는 편지를 가운데 두고 둘러앉았다. 이국적인 우표가 붙은 봉투는 그 자체로 어떤 흥분을 자아냈다. 아버지가 아주 멀리 가셨다는 게 실감 나는 순간이었다. 봉투 안에는 편지 한 장과 즉석 사진이 두 장 들어있었는데 우리는 돌려가며 사진을 봤다.

흰색 팬티만 입고 있는 아버지는 이층 침대가 여러 개 놓인 방에서 웃고 있었다. 침대 위에는 체크무늬 담요가 깔려있고 벽에는 수영복을 입은 여자 사진이 붙어 있는 단출하고 삭막한 방이다. 아버지의 얼굴은 불을 끈 것처럼 까맣게 변했고 그 때문에 치아는 더 하얗게 보였다. 웃통을 벗은 아버지는 자랑스러운 듯 허리에 양손을 대고 가슴을 쫙 폈다. 그의 영광은 그처럼 헐벗은 것이었다. 작은 선풍기가 고개를 푹 숙인 채 아버지 머리 위쪽에 달린 방에서.

또 다른 사진은 끝없이 펼쳐진 사막 가운데 서 있는 아버지와 다른 아저씨들이었다. 그들은 모두 머리 위에 수건을 덮어쓴 채였다. 우리는 사진을 돌려보고 나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엄마, 사우디아라비아는 엄청 덥나?”

“가만히 있어도 땀이 줄줄 난다고 하더라.”


사진 속의 아버지를 보고 있으니 알 수 없는 죄책감이 들었다. 왜냐하면 나는 여러 번 일 년이 아니라 몇 년 동안 아버지가 돌아오지 않으면 좋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정리되지 않는 감정은 편지가 올때마다 일어나곤 했다. 우리는 위문편지를 쓰듯 아버지에게 답장을 썼다.

“머나먼 곳에서 힘들게 일하시는 아버지께.

아버지, 사우디아라비아는 무척 더울 테지요? 저희는 아버지 덕분에 공부 잘하고 있습니다. 큰 오빠는 이번에도 1등을 했어요......”

몇 줄 쓰고 나니 할 말이 없었지만 텅 빈 편지지를 보낼 수 없어 머리를 짜내고 짜내서 편지지를 채웠다. 나는 아버지에게 진심으로 사랑한다고, 감사하다고 쓸 수 있길 바랐지만 그럴 수 없는 것이 슬펐다. 두려운 아버지. 아버지가 안 계시니 솔직히 편안하고 행복해요. 아버지의 술 취한 소리가 들리지 않으니 겁먹을 일이 없어서 좋아요. 두려운 아버지. 아버지를 두려워하는 것이 제 마음을 아프게 합니다. 두려운 아버지. 꾸역꾸역 무언가가 삼켜지더니 이제는 단단하게 굳은 돌덩이 하나가 마음 깊이 가라앉아 있는 것 같아요. 아버지를 미워하면 벌을 받을까요?

“그럼 다음에 또 편지할게요. 아버지 건강하게 잘 지내세요. 감사합니다.”


어린 시절은 충만과 결핍이 동시에 일어나고 사라지며 나를 채웠다. 내 몸을 관통하는 세상을 향한 새로운 경험에 넋을 잃다가도 포근히 감싸주는 사랑을 느낄 수 없어 외로웠다. 엄마의 사랑은 희생을 바탕으로 했고 말없이 이어지는 노동과 따뜻한 음식으로 표현되었지만 나는 좀 더 다른 것을 원했던 것 같다. 그러니까 말로 표현되는 사랑. 사랑하는 딸아. 너의 마음속에는 무엇이 들어있니? 내게 말해주렴. 그렇게 물어주길 바랐다.

나는 때때로 노을지는 개천으로 가 한참 동안 앉아있었다. 어른들은 생각지도 못할 서글픔이 내 마음속에 넘칠 만큼 흐르고 있었고 나는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그냥 좀 이상했다. 내가 있다는 그 감각이 이상했다. 검은 물이 흐르고, 그 속으로 들어가 다시 나오지 않으면 어떻게 되나 궁금한 적도 있었다. 아버지는 나를 때린 적은 없었지만, 엄마와 오빠들을 때렸다. 나는 그 장면이 떠올랐고 인간의 품위가 깡그리 부숴져버리는 그 장면을 재빨리 지워버리려 애썼다. 엄마, 내 마음이 왜 어두워지는지 모르겠어요. 그러나 나보다 먼저 입을 다물어버린 엄마는 배틀에 앉아 직물을 짜는 일에만 열중할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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