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첫사랑 2
‘이것이 네게 쓰는 마지막 편지가 될지 모르겠어.’
첫 문장을 읽자마자 심장이 미친 듯 뛰기 시작하고 눈앞이 어질해서 다음 구절을 읽을 수가 없었다. 나는 옥상으로 올라갔다. 빨랫대 옆에 놓인 낡은 의자에 앉아 숨을 크게 한 번 쉬고 나서야 다시 편지를 펼칠 수 있었다.
‘부모님은 연세가 많으셔. 큰누나와 내가 아홉살 차이가 날 정도니까. 부모님은 너와 편지 주고받는 걸 못마땅하게 여기시며 말씀하셨어. 어린 것들이 연애질이냐고.’
모든 러브스토리에는 빠지지 않는 과정이 있다. 사랑하는 두 사람 사이에 큰 시련이 등장하는 것이다. 로미오와 줄리엣처럼 집안이 서로 원수라는 설정만큼 큰 시련은 아니지만, 또한 우리가 목숨을 걸 만큼 열렬한 사랑에 빠진 것도 아니지만, 명백한 부모님의 반대에 부딪힌 것이다. 나는 처음으로 사랑을 잃어버린다는 사실 앞에 가슴이 아파지기 시작했다.
‘어제는 종일 기타를 쳤어. 로망스, 알람브라 궁전의 추억, 밤과 꿈. 네게 이 음악이 가닿기를 바라면서.’
주체할 수없이 눈물이 흘렀다.
‘기타 소리는 자주 흔들렸고 정확하게 집히지 않는 코드처럼 내 마음도 어지럽기만 했어.’
처음으로 이빨을 뽑을 때처럼, 처음으로 고열에 시달릴 때처럼, 정택과 나는 깨어져야 할 연약한 마음 앞에 놓인 것이다.
나는 정택이 부모님에게 반항할 만한 성격이 아니란 걸 잘 알고 있었다. 총명하고 착한 아들에 대한 부모님의 기대 또한 크실 것이다. 우리는 곧 고등학생이 될 테니까. 우리 집과 마찬가지로 정택의 집도 풍족하지 못했으니 그가 선택할 수 있는 미래는 오직 공부를 잘하는 것밖에 없었다.
하늘이 점점 붉어지기 시작했다. 노을은 길게 걸쳐 있는 구름을 따라 짙게 스며들었는데 금방이라도 가슴이 데일 것 같은 검붉은 빛이었다. 옆집 옥상에 걸려있는 빨래가 그 빛에 물들고, 이제 막 피기 시작한 라일락 향기가 밀려오고, 봄날의 저녁은 더없이 안온했지만 나는 그 모든 것으로부터 벗어나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어렴풋이 알게 되었다. 한 사람을 향한 사랑은 사라지지 않고 다른 형태로 되돌아온다는 것을. 어떤 행복은 그만큼의 슬픔을 숨기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
정택은 몇 장에 걸쳐 우리의 추억에 대해, 슬픈 마음에 대해서 말했고 나는 그걸로 끝일 줄 알았다. 그런데 새로 쓴 듯한 마지막 편지지에는 주저하는 그의 말이 덧붙어 있었다.
‘만약, 네가 괜찮다면 우리는 계속 편지를 주고받을 수 있어. 가장 친한 친구에게 네 이야길 했고 그 친구 집으로 편지를 보낸다면 내게 전해주기로 말이야.’
하지만 나는 그런 식으로 편지를 이어가는 건 원치 않았다. 어쩌면 이별이 주는 쓰라림을 더 깊이 느끼고 싶은 이상한 충동도 일었다. 아픔이 클수록 그 아이와 나의 이야기는 더 특별해지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모든 것이 더 섬세해지고 더 깊은 의미를 품고, 한 번의 만남은 결정적인 순간이 되어 빛을 발했다. 붉은 노을로 인해 더 할 수 없이 아련해지는 풍경처럼, 현실의 적나라함을 가려주는 그 빛깔 속에서 나의 첫사랑은 끝이 났다. 밤과 꿈. 그랬다. 첫사랑은 처음 깨어져 부서지는 그 마음에 있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나는 정택을 잊어갔고 가끔 큰 오빠를 통해 소식을 들을 때만 지난 일이 드문드문 떠올랐다. 정택이 고등학교에 입학한 후 얼마 되지 않아 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가정 형편이 매우 안 좋아졌단다. 총명하고 성실했으니 일 년이라도 빨리 대학을 가는 게 낫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정택은 검정고시를 거쳐 대학 시험을 쳤다고 했다. 그마저도 교회 독지가의 도움이 없었다면 어려웠을 일이었다고 하니 정택이 걸어온 길이 얼마나 가파른 오르막길이었을지 모르겠다. 다행히 장학생으로 대학에 입학했고 잘 다니고 있다고 했다. 나는 그 아이가 보였던 차분한 모습을 떠올렸고 한 음 한 음 기타 줄을 정확하게 집으려고 애쓰던 것처럼 자기 앞의 어려움을 그렇게 감내했을 것을 생각하니 마음이 아팠다. 그리고 그 아이가 클래식 기타를 연주하는 모습을 한 번도 보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쉬웠다. 그 시절 우리에게 가능했던 밤과 꿈. 하지만 다시 오지 않을 밤과 꿈.
그대로 영영 만나지 못했다면 나의 첫사랑은 그 이름처럼 아련하게 남았을 테다. 하지만 우리는 스물세 살에 다시 만났고 그 만남은 교과서에 실린 피천득의 ‘인연’을 떠올리기에 충분했다. 세 번째는 만나지 말았어야 했다는 글 말이다. 그날에 이르기까지 나의 인생은 다시 흐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