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I 은유 『출판하는 마음』
어제는 감기인지 머리가 띵해 하루종일 이부자리 근처를 못벗어났다. 다행히 오늘 일요일 낮 약속시간이 다가올 때쯤 정신이 든다. 독일에 사는 동생이 네 살 조카와 한국에 왔다. 와이프랑 애들은 먼저 약속장소에 갔고, 뒤따라 숙대입구 가는 버스 안에서 휴대폰을 보는데 일기가 지난주 화요일을 끝으로 밀려있다. 그 이후로 무슨 일이 있었더라.. 지난 하루반은 그냥 사라진 것처럼 감각이 없고, 그전 수/목 이틀은 어떻게 보냈는지 생각해내려니 다시 머리가 지끈거린다.
사진 일기를 쓴 지는 4년이 좀 넘었다. 처음에 어떻게 시작한건지 찾아보니, 2020년 11월 마지막날, 트레바리 독서모임을 등록하면서 앞으로 100일 동안 매일 사진 한 장 올리며 일기를 쓰는 챌린지를 시작했었더랬다. 그래! 그 무렵 겨울이 기억난다. 코로나시절 서점에서 맘 편히 앉아 책도 못읽었었지. 의자가 테이블 위에 거꾸로 올려져있는 삭막한 서점 공간 사이로 방황하던 시절이었다. 당시 일기들 중에, 100일 챌린지를 한지 23일째 되는 날 글이 눈에 띈다. 그날 사진은, 은유 작가님의 '출판하는 마음'에 실린, 이환희 편집장의 인터뷰글 한 페이지가 삐뚤하게 찍혀 올려져 있었다.
"이건 제가 너무 읽고 싶어서 만든 책이에요. 자기 합리화일 수도 있는데, 제가 마음이 약한 편이라 스스로 어느 시점부터 저를 해치는 고통스러운 것들, 힘든 것들을 멀리하고 살았거든요. 그러다 보니까 무엇에도 반응을 잘 안 하게 되고 무감각해지는 경향이 생기더라고요. 그런 내 자신이 늘 별로였고, 심지어 이런 얘기는 웃길 수도 있는데, 이렇게 무감각한 삶은 의미가 없다, 사람으로 사는 게 아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근데 SNS나 매체에 실린 글을 일가 보면 이렇게 무감각해진 상태에서도 마음을 건드리는 글이 있거든요. 이런 차가운 나를 깨고 들어오면 이건 꼭 만들어야 하는 책이다, 싶더라고요. 그런 글을 쓰는 분이 몇 명 있었고 홍승은 작가는 그중에 한 명이었어요."
글을 읽다보니 그날의 공기가 되살아났다. 해가 일찍 저문 날, 한강진역에서 한남대교쪽으로 내려가는 어둑어둑한 길은 자동차 헤드라이트 불빛으로 가득했다. 감정을 억누르며 살아 차가워진 마음이 다시 꿈틀거리던 시절, 그의 인터뷰 글이 그날 내마음에 와닿았고, 그가 윤종신의 히든싱어 모창 능력자로 참가할 정도로 오랜 팬이었단 것도 알게 되었으며, 바로 한달 전 그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접하게 됐다. 하루사이에 알게 된 그에 대한 여러가지 사실들로 인해 먹먹해진 마음은, 온라인에 추모글을 남긴 그를 아는 많은 분들께 죄송한 마음으로 가라앉았다. 뭔가 나만의 것을 만난 것 같은데 채 알아가기도 전에 아까운 사람이었구나 그 한마디로 금방 잊을것을 예감이라도 한듯이, 그날 일기엔 그 혼란스러운 마음이 산만하게 묻어나 있었다.
100일 챌린지가 끝나고 1500여일이 더지난 지금까지도 일기는 계속 이어져, 구속되는걸 정말 싫어하는 나의 몇안되는 루틴으로 남아있다. ‘출판하는 마음'은 그 뒤로 몇차례 결정적인 순간에 내 삶에서 회자되었고, 같은 책에서 함께 소개된 정지혜서점인의 서점도 들렸다. 트레바리는 지금까지 독후감 70여편을 남기며 이어졌고, 은유 작가님도 찾아가 글도 몇 편 쓸 기회를 가졌다. 책이 책을 부른다고, 돌이켜보니 오랜기간 무감각한 상태였던 나를 깨고 수 많은 글이 들어왔던것 같다. 그 겨울 이듬해 봄, 홍대에 갔을때 이환희 편집장을 추모하는 전시를 한다 들었던 정치발전소 서점을 잠시 들렸다. 추모전시가 이미 끝난건지 아니면 한쪽 켠에 마련된 그의 코너 앞에서 감히 아는 체를 하는게 미안했던건지, 책 몇권을 사서 나온 기억이 전부다.
유독 여름 같았던 오늘 낮, 키순으로 도-레-미인 조카와 우리 딸들을 데리고 전쟁기념관 어린이박물관으로 걸어가는 길에 아이스크림을 손에 하나씩 쥐어줬다. 오늘 햇살의 열기, 연못을 노니는 물고기, 해맑게 웃는 아이들과 땀에찬 머릿 켤의 기억은 이렇게 생생한데 반해, 2020년 겨울의 기온, 그 날의 어두움과 삭막한 도시 풍경은 내 뇌의 아주 작은 부분에 겨우 걸려있다. 가끔 왜 읽지도 않는 일기를 쓰는 걸까 자문하면서도, 오늘처럼 일기가 불러내는 날에는 그날의 공기를 들여마시며 숨쉬어본다. 100일 챌린지가 한창인 72일째 되는 날에 일기엔, 오늘 애들과 낮에 들린 전쟁기념관을 혼자 다녀온 기록이 남아 있었다. 한국전쟁 당시 한국군은 십만명인데 반해 미군이 무려 백칠십만 명 참전하고 3만 명 이상 전사했단걸 실감했던 날. 살면서 점점 무감각해지는, 죽은 자들에 대한 기억을 불러일으키기 위해서라도, 우리에겐 기록을 남길 공간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