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많이 오던 날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고 있다. 도로 아스팔트를 빗줄기가 투닥투닥 소리를 내며 때린다. 어딘가 해가 숨어있는지 하늘은 여전히 밝고, 건너편 산에 우거진 나무들이 오랜만에 생기가 돌며 움직이고 있다. 찜통 같던 더위가 가시고 쾌적한 온도의 바람이 이곳 정류장에 비를 피해 서있는 사람들 사이를 지나간다. 비를 너무 만만히 보고 집을 나선게 잘못이었다. 양산크기의 우산으론 가로 세로로 휘날리는 빗줄기를 막기엔 턱없이 부족했다. 등줄기 왼편은 비에 젖은 남방이 몸에 착 달라붙었고, 오른쪽 신발은 안쪽 양말까지 푹 젖었다. 내가 너무 싫어하는 느낌인데, 정류소 지붕 아래 비를 피하며 바라본 도로는 평소와 달리 뭔가 살아있는 느낌이 들었다. 어린 시절, 여름 시골집에 소나기가 내리면 마루에 걸터앉아 구경했던 마당 정원도 그러했다.
어렸을 때 일이다. 여름 방학 때마다 시골집에 놀러 가 한참 있다 오곤 했다. 대구로 한 시간 거리 경북 의성, 읍내에서 북쪽 KT건물이 보이는 후죽동 언덕길로 올라가다 보면, 중간 문턱 오른편에 초록색 대문 기와집이 잇다. 마루를 사이로 방이 두 칸, 부엌과 작은 다락방이 딸려있고, 삼각형 형태의 마당 정원 건너편에 나지막한 옥상에 올라가서 빨랫줄에 널려있는 솜이불을 손으로 만져보면 햇살에 후끈 달아있었고, 모퉁이 항아리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 서면 읍내 풍광이 한눈에 들어왔다. 부엌 옆에 연결되어 있는 별채는 세를 놓거나 친척들이 놀러 오면 사용했지만 대부분 비워져 있었다. 비 오는 날, 아이였던 난 그곳에 혼자 두꺼운 이불에 파묻힌 채로 창문만 열어놓고 살랑살랑 부는 바람과 흙냄새를 맡는 걸 좋아했다.
동네친구 하나 없었지만 어르신들 일 보러 가시고 나면 남겨진 어린 남매는 시골집 구석구석을 뒤져 나오는 처음 보는 기구들을 가지고 노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시골집엔 신기한 것들이 많았다. 마루엔 FM 라디오 탐구생활을 늘 틀어놨고, 마당 텃밭으로 내려와 사마귀, 공벌레, 개미를 구경하고 담벼락에 야구공을 던지며 놀았다. 대문 옆 공터엔 리어카와 갖가지 농기구들이 걸려있었다. 그곳에서 할아버지는 우리가 가지고 놀만한 나무 팽이나 의자 같은 걸 만드셨다. 옥상 아래 고추를 말리던 창고 온실은 늘 잠겨져 있었는데, 간혹 열려있을 때 몰래 들어가 보면 매콤한 열기에 눈이 따가웠다. 안방과 연결되는 2층 다락방은 우리가 제일 좋아하던 공간이었다. 어른들은 허리를 펼 수도 없는 낮은 층의 공간엔 각양각색의 보가지로 쌓인 것들 사이 남매는 자리를 잡고 할머니한테 배운 미나투를 치거나 둘이서 만든 게임을 했고, 가끔 다락방 물건들을 허락 없이 열어보기도 했던 기억이 있다.
가끔 할머니 따라 점방에 가기도 하고, 할아버지께서 끄시는 리어카에 올라타 자두밭에서 얼굴이 빨갛게 익을 때까지 놀다 오기도 했지만, 대부분의 낮은 우리 남매들만의 시간이었다. 집에 있는 게 심심하면 시골자전거를 끌고 나가 언덕길 따라 낑낑대며 꼭대기에 있는 전신전화국까지 올랐다. 오르내리는 언덕이 이어지는 포장도로에 당시엔 차가 별로 없었다. 한산한 길을 전속력으로 내려갈 때 마치 숨을 쉴 수 없을 정도로 바람이 얼굴에 쏠릴 때의 스릴을 느끼며 시간을 보내다 보면 금세 저녁 6시가 되고 동네 교회 종소리가 울려 퍼졌다. 안방 창가에 노을빛이 번지면 마을은 아궁이 때우고 밥 짓는 냄새로 가득 차고, 집에 돌아오신 할아버지 할머니 두 분과 넷이 식사를 했다. 할머니가 전기불판에 해주시는 돼지불고기는 매콤한 고추장 맛이 강했고, 된장국 안에 멸치는 내가 아는 멸치보다 두세 배는 컸으며, 스뎅 그릇에 담긴 퍽퍽한 계란찜의 짭짤한 맛을 난 꽤나 좋아했었던 것 같다. 그렇게 남매는 방학만 되면 포동포동 살이 쪄서 집에 돌아갔다.
하루는 늦잠 투정을 부렸다가 할아버지한테 크게 혼났다. 울고 있던 손주들이 측은하셨을까. 그날 점심을 먹고 좀 있다가 할아버지께선 작은 가방을 둘러메시고 남매 보고 나갈 채비를 하라고 했다. 그렇게 따라나섰다가 올랐던 곳이 구봉산이다. 봉우리가 아홉 개라고 해서 붙여진 산. 나무 막대기 하나씩 들고 남매는 흥이 나 할아버지 보다 앞서 낮은 산자락을 뛰어다녔다. 마지막 봉우리엔 풀밭 메뚜기떼를 만나 소리를 질렀다. 그날 이후로, 매해 시골집에 놀러 가면, 동으로 서로 의성 마을을 둘러싼 산을 셋이서 오르내리는 일이 계속되었다. 당시 여름방학 일기에서 할아버지와 등산은 단골 메뉴였다. 개학을 앞두고 몰아서 쓰는 일기의 글자는 삐뚤 삐둘이고 한 페이지를 다 채우지 못한 날이 다반사였지만, 셋이서 산에 다녀온 날엔 유독 쓸 말이 많았다.
할아버지를 생전 마지막으로 본건 돌아가시기 일주일 전 병원에서였다. 당시 추석을 앞두고 있었다. 좀 회복되면 집으로 갈 거라고 버럭버럭 우기셨다고 들었다. 손주 앞에선 몸을 웅크리고 계시면서도 고통을 내색하지 않으셨다. 손자에게 엄격하셨고 따뜻한 말씀을 건네기보단 뒤에서 한없는 믿음과 잘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감히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크셨을 거다. 60년의 세월 차이에 무뚝뚝함이 자리 잡고 있어, 우린 가깝고도 먼 사이였기에 할아버지와 붙어 있으면서도 속내를 직접 여쭤본 적이 없다. 손주들이 중학생이 되고 더 이상 찾지 않는 여름에 홀로 구봉산을 오르셨을까. 가끔, 대문 밖 텃밭에 뭔가를 태우면서, 그 옆에 손수 만드신 나무 의자에 앉아 노을이 지는 하늘을 한없이 바라보고 계신 장면이 떠오른다. 그 뒤에 지나다, 뭐 하고 계시는지 물음을 속으로 삼키고 대문으로 들어서곤 했다.
할아버지께서 돌아가신 날, 장례식장에서 노쇠하신 할머니 모시고 집으로 들어와 슬픔이 짙게 깔려있는 안방에서 둘이 잠들었다. 가을이 채 가기도 전에 할머니는 안동병원에 입원하셨고, 이듬해 신정을 쇠자마자 돌아가셨다. 장례를 치르고 삼오재를 지내러 시골집에 자식들이 모였다. 옆방에선 유산 얘기가 오가고 있고, 홀로 안방에 들어섰다. 불과 3개월 만에 주인 내외를 상실한 공간의 어수선함. 곧 있으면 들려나갈 먼지 쌓인 물건들이 눈에 익다. 어린 시절 나의 손길도 닿아있는 도구들이다. 뚱뚱한 장롱 위에 호박들, 고동색 책장을 채운 한자로 된 서적들과 손때 묻은 주판, 약봉지가 보이고, 낮은 서랍장엔 텔레비전과 재떨이가 올려져 있다. 여기서 할아버지께서 늘 담배를 태우시며 옛날 전쟁 이야기를 해주셨다. 내 어린 시절 첫 기억이 시작되었을 때부터 천장에 자리하고 있던 고모, 아버지, 색이 바랜 액자들은 어느새 누가 떼어내 텅 빈 공간에 거미줄이 보인다. 흐트러진 액자 사진들 사이로, 두 분이 나란히 서있는 사진이 눈에 띈다. 중절모에 백구두, 회색코트 차림의 할아버지와 꽃무늬 상의에 검은색 줄무늬 치마를 입으신 할머니. 두 분 마지막 모습을 눈으로 새기며 사진을 주머니에 넣었다.
이후 시간이 많이 흘러, 혼자서 시골집을 들렸었다. 이미 다른 이의 거처가 되버린 그곳엔, 오르막길이 확장되면서 4차선 도로가 대문 앞까지 다다라 대문밖 텃밭의 흔적과 동네 아이들 소리를 아스팔트로 말끔하게 지운 것 같았다. 오는 길에 들린 구봉산 입구는 등산 금지시간 표지판이 아스팔트 포장도로 위에 덩그러니 서있었다. 대문밖에서 뭔가 갈 곳을 잃은 사람처럼 서성이다 허무한 마음에 발걸음을 돌려 터벅터벅 내려오는데 큰 나무의 그림자 아래 길목이 눈에 들어왔다. 어린 시절 슈퍼가 있었던 곳이다. 문득 내리막길을 뛰어내려 가던 남매가 그려졌다. 천 원짜리 지폐를 꼬깃꼬깃 손에 쥐고 아이스크림 사 먹을 마음에 쓰레빠가 벗겨질만치 달려가는 두 아이의 웃음소리가 들린다. 주변을 돌아보니 다시 껌껌하다. 아이들 소리는 온데간데없이 사방은 고요하고, 코에 스며드는 흙냄새를 맡을 마당 정원도 없다. 그날이 의성에 간 마지막 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