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마음의 기록

책 I 앤라모트 '쓰기의 감각'

by 청귤

유치원에 다녀온 둘째가 열이 났다. 손발은 찬데, 몸이 불덩이다. 미지근한 물에 적신 수건으로 아이 몸을 닦아줬다. 열기에 손수건이 금세 따뜻해졌다. 가져온 물은 금방 식어버리고, 차가워진 수건이 몸에 닿는걸 아이는 싫어했다. 불덩이같은 몸을 하고 다시 옷을 입겠다는 아이와 잠시 실랑이가 이어졌다. 체온이 뭔지도 모르는 아이는 체온계를 응시하는 아빠를 애처롭게 바라본다. 숫자가 떨어졌단 말 한마디에 얼굴에 안도감이 번졌고 반대로 숫자가 올라가면 긴장감이 표정에 따라 올라왔다. 39.7도.. 아이 시선을 애써 피하고는 괜찮아지고 있다 둘러대며 침대에 눕혔다. 걱정스런 표정의 엄마, 아빠를 올려다보며, 아이는 "엄마랑 아빠는 착한 친구잖아. 의사선생님돠 날 낫게 하려고 하는 착한 사람이잖아."라는 묘한 말을 건넨다. 식어버린 물을 새로 갈려고 그릇을 들고 방을 나서는데, 불현듯 4-5년전 기억이 떠올랐다.




"아빠는 내가 유치원에 갔을때 뭐가 제일 궁금해?"


한밤중에 열이 오른 첫째(당시 일곱살 정도 되었을거다)의 몸을 닦아주고 있는데, 캄캄한 거실의 침묵을 깨는 뜻밖의 한마디였다. 열이 내리고 생기가 돌면서 기분이 좋아진걸까. 평소엔 유치원에 있었던 일을 물어봐도 딴짓하기 바쁘더니.. 아이가 갑자기 터놓은 속내는, 졸음과 씨름하고 있던 내 상상력을 자극하기 시작했다. 친구 한명 한명씩 돌아가며 있었던 일을 풀어놓는데, 순간 아이가 살고 있는 우정의 섬이 눈앞에 펼쳐졌다. 또래 친구들이 그 안에서 생생하게 뛰어다닌다. 미세하게 떨리는 아이 목소리에, 잘 하고 있다는 말을 해줄까? 잠시 내적갈등을 하다가 대신 "모두 좋은 친구들이구나" 하고 짧은 한마디를 건넸다. 순간 아이 얼굴에 살짝 안도감이 스쳐지나가는 듯했다.


나를 닮은 아이가 살면서 나처럼 불안해하고 흔들릴걸 생각하면 벌써부터 애닯다. 대신 아파해줄 수 없는 것처럼, 그 외로움과 반복되는 자기 의심 또한 오롯히 홀로 겪어내야 할 몫이다. 그 곁에서 어떻게 힘이 되어줄 수 있을까 무력감이 올라오기도 하는데, 그날 밤 딸아이가 터놓은 말은 순간적으로 나를 자유롭게 만들었다. 우리 둘의 대화에 담겨진 연결과 연대감은 무엇이 정말 중요한 건지를 알려주며 그 외의 것은 잊어버리라 말하고 있었다. 서로 이해받고 있다는 믿음 그것만으로도 위로가 되고 우리 마음에 물결을 일게 한다는 것. 훗날 딸아이의 고민의 터널 반대편에 서서, 어둠속에서 걸어나오는 아이의 손을 잡아줄 수 있다면, 내가 바로 곁에 없더라도 우리 충만의 기억을 간직하고 있던 글귀가 그 손을 대신해서 잡아줄 수 있다면, 비로서 행간에 서려있던 부녀의 애뜻함과 동질감이 되살아나 그 부서진 마음에 닿으며, 더이상 아이가 혼자가 아님에 위로받고 자기를 포용하고 방향에 대한 믿음을 더할 수 있기를.


그날 밤, 첫째는 아이는 아빠의 회사 점심시간이 가장 궁금하다고 했다. 아빠의 직장의 섬을 궁금해하는 아이의 눈빛에 위로받고, 떨어져있어도 서로 연결되어 있음에 든든해진다.




둘째는 다행히 다음날 열이 내렸고 언제 아팠냐는 듯이 본연의 명랑한 꿀순이로 돌아와 연신 방긋거렸다. 나에게 영향을 받고 나를 기억하는 아이들이 훗날 커서 내 삶에 대해 말해주겠지.. 그게 따뜻한 색깔의 이야기면 좋겠다. 각자의 생의 궤도가 겹치는 이 시간동안 우린 이 함께하는 기억을 쌓아올림과 동시에 무서운 속도로 잊어버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기억의 왜곡과 망각의 그물을 피해, 바다에 이 순간을 새기는 것. 그게 나를 계속 쓰게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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