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자인 목욕탕에서 씻고 나오니 벌써 9시다. 비행기가 연착되는 바람에 섬에 너무 늦게 도착했다. 숙소 주인장에게 미리 말해둬서 망정이지. 아까 도착해서 짐을 풀자마자, 그가 운영한다는 1층 레스토랑으로 내려갔다. 일본 특유의 목조 주택들이 모여있는 좁은 골목길. 식당 문에 악어가 스튜를 끓이고 있는 포스터가 눈길을 끄는데, 흥겨운 음악이 안에서 새어나온다. 숙소와 식당을 같이 운영하는 주인은 작은 키에, 멋드러진 모자가 인상적인 중년이었다. 영어가 유창한 그는 오래전에 도쿄에서 앤티크 가구 수입하는 일을 했고, 뉴올리언즈를 좋아해 지금까지도 매년 찾아간다고. 올드 재즈가수들의 흑백 사진 액자와 공연 포스터들이 식당 벽면을 가득 메우고 있었고, 루이지애나 재즈와 락앤롤의 흥겨운 리듬 속에서 주인장의 검보 스튜와 케이준 콘으로 허기를 달랬다. 바로 옆 건물 목욕탕을 추천한것도 그였다. 오래된 공중목욕탕을 현대미술가가 예술 공간으로 변신시킨 곳인데, 그의 말처럼 입욕을 한채로 모자이크 타일과 벽면 그림, 코끼리 상을 구경하는 느낌은 묘했다. 그렇게 이 오래된 소도시의 첫인상은 이질적인 것들의 연결이었다.
여독을 풀었다는게 이런 느낌일까. 몸은 나른한데 마음은 가볍다. 숙소로 들어가지 않고 기와장이 덮혀있는 가구들 사이로 어둑어둑한 길을 걸어 나오니 바로 밤바다가 보인다. 마을 어귀에 있는 작은 신사엔 작은 가족들 단위로 모여 북을 치고 있는데, 낮고 둔탁한 소리가 섬마을을 울릴 정도다. 부둣가엔 사람이 거의 없고 깜깜했다. 벌레도 없고 춥지도 덥지도 않은 바람의 체온. 파도도 없이 잔잔한 바다. 아무생각없이 저기 앞에 유독 환한 빛을 내고 있는 조형물로 향했다. 가까이 다가가자 커다란 조명 뒤 숨어있던 작은 방파제 길이 보였다. 어둠에 발을 내딛고 들어서자 거기선 파도가 제법 철썩거린다. 간간히 지나가는 차의 헤드라잇 불빛 외엔 전혀 빛이 없는데다 둑의 폭이 좁아, 자칫 발을 헛딛어 바다로 빠질까봐 겁이 난다. 물결의 흔들림과 방파제에 와서 부딪히는 소리로 경계를 구분하며, 조금씩 걸어가 방파제 끝 불빛 기둥 앞에 가방을 내리고 주저앉았다.
무릎을 구부리고 앉아 고개를 드니 어둑한 구름 사이로 별들이 하나씩 보이기 시작한다. 여름이 꺽여서일까. 작년 한여름때 제주도에서 올려다본 밤하늘에 비해, 이곳 풍경은 좀더 다정하단 생각을 왠지모르게 했다. 구름이 걷히자, 여름 대삼각형 별자리가 나타났다. 직녀와 견우, 데네브. 하나둘씩 모습을 드러내는 별들이 따스하면서 고요하다. 가방 안에 목욕타월이 생각나 주섬주섬 꺼낸 다음 바닥에 깔고 등을 대고 대자로 누웠다. 왼편엔 파도 소리, 오른편엔 오리인지 물고기가 이따금씩 첨벙거리는 소리가 이따금씩 들리고, 건너편 쿠사마 야요이 빨간 호박 전시물에 사람들이 오가는 모습이 비친다. 그 옆엔, 오늘 타고 왔던 페리가 정박해있다. 낮에 사람들을 분주하게 옮겼을 선박은 밤이 되어 말이 없고, 저 멀리 풀벌레들의 찌르르르 힘찬 소리가 계절이 바뀌는걸 말해주는것 같애.
뭘 해야된다, 플랜도 의도도 없이 그저 오랜만에 많은 별들을 마주하며 아무 생각없이 누워있으니, 센과 치히로 처럼 이 공간이 현실세계 시간의 흐름으로부터 빗겨간 것 같다. 그 순간 거짓말처럼 별똥별이 백조자리 근처를 스쳐 지나갔다. 작년에 페르세우스 유성우 보려고 목이 빠져라 기다리다가 실패했는데, 여기서 만날줄이야. 그것도 저렇게 환한 불꽃을 내면서 말이지. 마지막으로 별똥별 보고 소원을 빈게 언제였는지 기억도 안난다. 한국에 있는 아이들과 가족 생각에 눈을 감았다. 뜻밖의 행운에 속으로 감탄하며 나도 모르게 미소가 일었던것 같다. 눈을 뜨니 어둠에 눈이 익어 하늘에 수십개의 눈들을 마주쳤다. 밤새 이렇게 누워있어라 해도 할 수 있을것 같은 편안이 몰려왔다. 가끔 스쳐지나가는 헤드라잇 불빛과 정적인 공기. 저기 아래 구름이 걷히고 숨어있는 반달이 서서히 드러나고 있다. 그 순간 또다른 별똥별이 긴 꼬리를 달고 반대방향으로 잽싸게 스쳐 지나갔다. '경계를 넘어 설 수 있게 해주세요..' 요며칠 내 가슴에 차있던 속내가 올라왔던것 같다. 세번째 별똥별을 만나고, 달빛이 하늘 중앙으로 가까워지면서 별빛이 흐려진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누워있던 자리를 고쳐 앉았다. 어둑했던 주변 사물이 분간이 될정도로 밝아졌고, 잔잔한 바다 물결 위에 달빛이 비치며 흔들리고 있다. 춤추듯이 생겨졌다 부서짐을 반복하는 노란 빛들. 고개를 다시 드니 달이 어느새 하늘 가운데로 와있고 나오시마 밤하늘을 환하게 채운다. 구름과 별, 다정한 바람과 바다에 비친 달빛.
아까 페리를 타고 오면서 갑판에서 바라본 저녁 노을이 떠올랐다. 저기 멀리 한곳에 강한 빗줄기를 뿌리고 있는 짙은 구름과, 핑크 구름 뒤로 일몰의 풍광을 보며 왠지모르게 자연의 순환이 느껴졌다. 태양의 에너지를 바다가 흡수하고 물이 증발해 구름을 만들고 이동해서 다른 지역에 비를 뿌리고, 그곳에 생명이 자라나고 죽음의 흔적이 육지와 바다에 내려와 쌓이고, 달과 해의 중력때문에 바닷물이 움직이고 바람이 일렁이고.. 자연을 이루는 요소들 간에 보이지 않는 순환의 흐름이 반복되면서 커다란 통합시스템을 이루고 있는 상태. 우리도 그 순환의 일부인 셈이다. 떨어져 있는 존재가 아니라. 안도 타다오의 밸리 갤러리는 산등성이 서로 만나는 골짜기에 노출 콘크리트 건축물이 자리잡고 있는데, 자연광이 실내에 스며들어 날씨와 시간의 흐름에 따라 다른 공간의 느낌을 자아낸다. 인공재료에 자연이 개입하고 자연이 곧 건축을 구성하는 요소로 작용하면서 이질적인 것들이 분리되지 않고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조화를 이루는 것. 경계를 넘어 새로운걸 만들고 싶단 바램이 지나친 욕심일 수 있겠단 생각이 든다. 서로 이질적인 것들의 연결 지점 그 자체로서 이미 새로운 창의의 잠재성을 가지고 있겠구나. 류이치사카모토는 미리 그려놓은 청사진을 실현시키는 접근 방식에 생리적인 거부반응을 보였다고 하던데, 난 새로운 경계에 발을 내딛으면서 결과에 빨리 닿기 위한 방법에 침착하고 있었구나. 그러면서 조급하고 경직되는 느낌이 올라오고 있었구나. 오히려 잠념을 걷어내고, 연결과 충돌 지점에서 일어나는 새로운 역동을 감지해야 하는 건데. 그걸 낡아채서 구현할때, 격렬한 기상 현상처럼 과정은 치열하되 결과는 지속가능하며, 보다 높은 수준의 몰입 속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경지에 다다를 수 있다. 타다오의 건축물에서 우리에게 보여주듯이.
방파제에서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생각에 빠져있다 정신이 드니 풀벌레 소리가 다시 귀를 울린다. 밤이 깊어질 수록 점점 우렁차지는것 같다. 심심해졌다. 가방을 부여잡고 일어나는데, 다리는 휘청거리지만 더이상 겁나지 않는다. 내일부터 이 작은 섬을 거닐고 다닐 힘이 내 속에 차올랐다. 뒤돌아 어둠을 헤치고 걸어나오니, 조형물의 조명이 그새 꺼져있고 신사도 사람들이 다 돌아가고 텅비어있다. 인기척이 없는 섬마을 골목길에 풀벌레 소리만 가득한체, 너무 적극적이지도 않는, 너무 떨어져있지도 않는, 다정한 거리에 서서 나오시마는 그렇게 잠시 머물다갈 이 나그네를 품어줬다. 그렇게 9월 둘째날 밤이 깊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