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 아이의 인터뷰글
벌써 몇년전 일이다.
첫째 딸은 초등학교에 들어갈때부터 태권도, 피아노, 영어, 미술학원을 다니기 시작했다. 그것도 또래에 비해 늦은거라고 와이프는 강조했다. 작년엔 학교 수업에 뒤쳐지는것 같단 담임 전화에 기어코 수학까지 추가했다. 종일 학원을 뺑뺑이 돌고 저녁에 집에 와서 밥먹고 숙제하는 아이의 일상이 반복됐다. 방에서 뒹굴거리는 시간이 줄어들수록 아이의 표정은 어두워졌고 글씨는 삐뚤삐뚤해졌다. 아이의 긴 하소연 끝에 얼마전 피아노와 태권도를 중단하고 수학수업 진도를 늦췄다. 영어학원의 단어시험도 빼달라고 했다. 아이 엄마는 끈기가 부족하다고 딸을 타박했지만, 아빠한테 들고오는 숙제의 양이 줄어들수록 딸의 얼굴은 밝아졌다.
밤늦게 컨퍼런스 콜을 끝내고 방에서 나오니 둘째는 엄마랑 자러 들어갔고 큰아이 방은 아직 환하다. 방문 유리창 너머로 아이가 스케치북을 오려 베란다창에다 붙이고 있었다. 똑똑. 창에 나란히 붙어있는 하얀색 백지에 고양이 캐릭터들이 그려져 있었다. 각각의 이모티콘 마다 복장과 표정, 포즈가 달랐고, 그 아래엔 내가 더 사랑해, 넌 언제나 최고, 귀요미!, 나어때! 등 짧은 구호들이 적혀있다. 제목은 '언니양 이모티콘'.
“내가 만든 내 캐릭터야. 이름은 언니냥인데 실수로 언니양이라고 썼어. 동생 고양이를 늘 곁에 달고 다녀. 얘는 피겨스케이팅 타는 거고, 얘는 태권도를 하고 있고, 여긴 양손에 부채를 들고 춤추고 있는거야."
아이는 고양이를 좋아했다. '미야옹'이라고 부르면 아이는 배시시 웃으며 몸을 베베 꼬았다. 왜 그렇게 좋을까.
“난 귀여운게 좋아. 귀엽지만 화려하지 않은 거말야. 산리오캐릭터 중에도 마이멜로디보단 시나모롤이 더 좋은게 그래서야. 흰색이 깔끔하고 튀지 않잖아. 꼭 고양이만 좋아하는건 아닌거지. 카카오프렌즈에서도 고양이인 네오보단 강아지 프로도가 더 좋아. 네오는 성격도 괴팍하고 프로도를 구박하잖아. 근데 아빠. 시나모롤 캐릭터 옷이 있는거 알아?”
아이는 스케치북을 가져와 직접 그려서 보여줬다. 흰색 티셔츠 한가운데 시나모롤이 그려져있고, 검정색 스커트 아래에 캐릭터들이 쭉 붙어있다. 실제로 본적 있는지 물어보니, 시나모롤이 붙어있는 노란색 티셔츠를 입고 온 같은 반 친구 얘길 꺼냈다. 그걸 보면서 아이는 부러운 마음이 들었을까. 요즘 학원을 줄이고나서 기분은 어떤지, 일상이 궁금해졌다. 인터뷰 글에 모델이 되어줄 수 있냐고 딸에게 물었다.
“아빠, 그럼 우리가 글을 써서 출판할 수 있는거야? 안그래도 낮에 방에서 놀다가 가족책 만드는걸 상상했거든. 신기해. 내가 모델이라니 재밌겠다. 아빠가 글을 쓰고, 그림은 라희언니한테 부탁하자. 저난번 크리스마스 캠핑갔을때 아빠, 엄마 얼굴 그림을 잘 그렸었잖아. 난 배경 색칠을 할께. 엄마랑 서진이도 나오고 말야. 인터뷰는 무슨 주제로 할꺼야?"
평소에도 둘이 대화를 자주 하는 편이지만, 이렇게 각잡고 인터뷰하잔 얘기에 선뜻 응할줄은 몰랐다. 아니, 아이는 이미 머릿속에 출판에 대한 상상을 펼치며 인터뷰 방향을 되묻고 있었다.
“아빤 글쓰는걸 좋아하니까. 난 일기쓸때 글이 툭툭 끊겨서 맘에 안들어. 그게 잘 안되는것 같애. 아빤 글을 다른 사람한테 평가 받아본적 있어? 사람들이 뭐래? 우리 가족책을 출판할 수 있으면 좋겠다. 진짜 할 수 있는거야?”
대화는 얼마전 우리집 논쟁거리였던 앞머리로 넘어갔다. 언제부턴가 아이는 앞머리를 짜르지 않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트레이드 마크였던 동그란 앞머리를 이 나이때 아니면 못한다는 엄마랑 팽팽히 맞섰다. 결국 아이 말대로 앞머리를 기르고 뒤로 넘겨 알록달록한 머리핀 다섯개를 꽂아 등교하는걸로 합의가 됐다. 아무것도 모르는 둘째만 엄마 손에 끌려가 앞머리가 일자 바가지 모양이 됐다.
“서진이는 동그란 앞머리가 귀엽지만, 난 애기가 아닌데 친구들이 놀린단 말야. 머리핀도 분홍, 파랑, 노랑, 초록 등 색깔별로 너무 화려하고 커서 튀어. 난 그냥 까만색 얇은 머리삔 하나만 꽂고 싶은데. 어린이날때 나이키 운동화도 색깔이 튀어서 맘에 안들어. 친구들이 많이 신는 흰색 운동화가 더 좋아. 엄마는 한번도 날 데리고 가서 같이 고른적이 없거든."
친구들 속에서 아이는 어떤 역할일까.
“역할 같은건 딱히 없어. 경민이랑 나윤이 서하랑 우리 여자애들 넷이서 같이 노는데 걔네들은 주로 아이돌 얘기를 해. 서하가 젤 웃겨. 걘 부끄럼이 없나봐. 아무 곳에서나 춤을 추거든"
언젠가 아이가 제로투 댄스 흉내내는걸 본적이 있다. 학교에서 친구들 따라 같이 춤추는지 묻자 아이는 화제를 돌렸다.
“요즘엔 걔네들이랑 안놀아. 다른 애들이랑 놀더라구. 근데 아빠. 인터뷰 주제가 미래의 내 모습에 관한 거면 좋겠어. 난 피겨스케이팅 선수 아니면 아이돌. 노래랑 춤을 같이 추는 여자 그룹 아이돌. 오디션 같은데 가보고 싶어. ”
혹시 원하는 캐릭터가 있을까?
“음.. 우아한 캐릭터? 차갑고 까칠하면서 도도한거 말야. 평소엔 멤버들을 강하게 밀어붙이다가 일등이 되고 나면 따뜻해지는거? 영어 이름을 '실크'라고 지으며 어떨까? '무엇이든 마녀상회' 책에 나오는 바느질 마녀 이름인데, 고상하고 우아하게 차 마시는 캐릭터거든."
화려하지 않은 귀여움과 우아함의 조합이라. 순간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잠시 생각에 잠겨 있는데 잘 채비를 하며 침대에 누운 아이는 꼭 글에서 자기가 주연일 필요는 없다고 했다. 다음번 인터뷰 주제는 '나의 여름'으로 하자고 덧붙인다. 곧 있으면 수영장도 갈수 있고 복숭아를 먹을 수 있어 기대가 된다고. 아빠는 딱복이 좋아 말복이 좋아?
어린 아이들은 그림을 그리며 자기 표현을 한다. 손에 들려진 아이 스케치북엔 다양한 낙서들이 끄젹여 있었다. 백지 위에다 그렸다가 지우기를 반복하는 아이의 속은 늘 씨끄럽다. 겉으로 드러나지 않을뿐. 친구들간의 미묘한 감정, 책에서 만난 캐릭터, 머리핀 하나에도 정감을 느끼는 아이의 자아와 욕구를 알아보기에 우리의 상상력은 늘 빈곤하다. 어른들이 만들어낸 틀을 비웃기라도 하듯이, 아이는 자기만의 리듬을 가지고 직접 보고 듣고 느끼며 스스로 배워가고 있었다.
자는 줄 알았던 아이가 책상에 도로 앉아 뭔가에 열중하더니, 잠시 후 방에서 나와 A4 용지를 건넨다. 가족책을 출판하게 되면 이 그림을 표지로 했으면 좋겠다고. 제목은 '우리는 4명'. 가르마해서 넘긴 아이 앞머리엔 작은 삔이 꽂혀 있고, 입고 있는 셔츠 위엔 시나모롤 얼굴이 보인다. 등뒤로 다시 자러 들어가는 아이의 수다가 계속 이어진다. 침대가 두배로 넓었으면 좋겠고, 벽지는 파란색 푹신한걸로 바꾸면 좋겠고, 지금 회색은 맘에 안든다고.. 음. 인터뷰를 자주 해야할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