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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mare Apr 12. 2022

12. 치유의 시간

 나름대로 상처를 치료해 보겠다는 생각으로  상처에 직접 대면하는 방법을 택했었지만, 결과는 또 다른 실망과 좌절을 경험하게 했다.

 과정들은 상담을 진행하는 동안 상담사에게 전해졌고, 실망과 불안함을 느끼던 내게 상담사는 내 모습과 상반되는 경험을 하는 여성들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었다.

성폭력과 관련한 피해를 입고 트라우마가 있는 여성들이 경험하는 후유증으로 성적인 부분에 있어서 나처럼 폐쇄적이 되거나 정반대로 개방적이 되는 두 가지 경우가 많다는 것이었다.

나는 내 눈으로 보고 내 몸에서 느껴졌던 그 느낌이 소름 끼치도록 싫었다. 그래서 그 느낌이 남아있던 내 몸이 벌겋게 되도록 닦아 냈었고 그 뒤로도 누군가 내 몸에 손을 대지 못하게, 내 몸에 시선이 닿지 못하게 꽁꽁 감추며 움츠러들었다.

마치 내 몸에 더러운 벌레가 계속 기어 다니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면서 때로는 그런 나 자신이 더럽게 느껴지기도 했다. 그러다 보니 점점 더 움츠려 들고 감추고 싶은 마음이 강해졌었다.

이렇게 나처럼 자신이 더러운 존재라고 느껴져 폐쇄적인 성향의 띄는 경우가 있는 반면, ‘어차피 더러워진 사람’이라는 생각으로 혹은 ‘벌레 같은 남자에게 당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성적인 부분에 있어서 주도권을 잡겠다.’는 마음으로 여러 사람과 성관계를 하려는 사람도 있다고 했다. 그런 경우 마치 섹스에 중독된 사람처럼 끊임없이 남자를 만나고 성관계를 갖는다고 한다.

나도 가끔은 그런 생각을 하기도 했었다.

 

‘섹스가 뭐라고, 남자 따위가 뭐라고..’

‘이 남자, 저 남자 만나면서 즐겨볼까?’


하지만 어디까지나 머릿속 생각일 뿐이었다. 아무리 머릿속으로 되뇐다 해도 하루아침에 다른 사람이 되는 건 불가능했다. 성(性)이라는 건 내겐 늘 불편하고 껄끄러운 주제였고, 남자에 대한 경계심과 스킨십에 대한 불편함은 쉽사리 사라지지 않았다.

나 자신이 몸소 느끼거나 경험하는 것은 물론이고, 그저 눈으로 보는 것조차 힘겨운데 쾌락을 쫓아 몸이 가는 대로 움직인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내가 처음 경험한 '성(性)'은 '더럽다, 무섭다' 이외의 다른 감정이나 생각은 없었다. 그 경험이 그대로 굳어져 청소년기를 지나 성인이 되었던 나였는데, 그런 내가 '성(性)'적인 문제에 있어서 문란하다고 표현할 만큼 개방적이 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런 나 자신을 스스로 잘 알면서도 그 모습에서, 그 틀에서 벗어나 보고 싶다는 생각에 한 번씩 말도 안 되는 생각에 사로 잡히고는 했다.

이렇게 스스로 혼란스러워하는 모습을 볼 때면 상담사는 스스로의 신체적, 심리적 변화와 반응에 대해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라고 했다.

내가 경험한 일을 통해 내가 느끼는 감정과 생각은 모두 그래도 되는 일이고 그럴 수 있는 일이라는 것을 스스로 인지하고 잘못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랬다. 나는 처음 상담을 시작할 때부터 나 스스로에게 엄격한 기준의 잣대를 들이밀고 스스로 '무언가 잘못된 사람'이라는 틀에 가두었던 것 같다.

어느 날 갑자기 사고처럼 찾아온 내 기억과 그날의 사건이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지 않기를 바랐고, 누구보다 아무 일 없는 듯이 누구보다 평범한 듯이 지내는 사람인 척하고 싶어 했었다. 그러다 보니 시간이 지나면서 선명해지는 기억과 조금씩 밖으로 드러나는 상처를 어떻게든 감추려 했고, 가끔씩 그 상처가 나 자신도 알 수 없는 모양으로 드러날 때는 당황하며 숨기고 싶어 했다.

그리고 그런 상처를 가진 나 자신을 '이상한 사람', '잘못된 사람'으로 생각하고 끝없이 질책하고 끌어내리며 가끔은 스스로도 알 수 없고 주체할 수 없는 감정에 휩싸이기도 했다.  

그러다 보니, 타인에게 받은 한마디 위로에 무너져 내릴 만큼 공감과 위로가 필요한 사람 이면서 정작 스스로는 위로를 하거나 보듬어 주지는 못했다. 자존감과 자신감 모두 바닥까지 떨어져 있으면서도 쓸데없이 자존심은 높아져, 그저 누구에게도 내가 가진 치부를 들키고 싶지 않다는 생각에 전전긍긍하기만 했다. 

그런 내 모습을 스스로 인지하기 시작하면서부터는 조금씩 변화하려 노력했지만 쉽지는 않았다. 내가 만든 틀에서 벗어나고 부정보다는 긍정을 생각하고 싶었지만, 오랜 시간 굳어져 버린 생각과 마음은 쉽게 달라지기 어려웠다. 

상담사는 스스로 자신에 대한 생각과 판단을 하기 시작한 것만으로도 발전의 가능성이 있는 것이라고 했다. 그러니 조급해하지 말고 하나씩 천천히 나아가는 것이 좋을 것 같다고 했지만, 앞으로도 얼마만큼의 시간과 노력이 필요 한지 알 수 없기에 불안하고 초조한 마음은 계속 이어졌다. 

이렇듯, 상담을 시작한  나도 모르고 있던  모습을 발견하기도 하고 때로는 알 수 없는 감정이 요동치는 일도 있었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그것마저 조금씩 적응을 하고 있었다시간이 지나면서는 다행히도 상담을 시작하고 초반에 느꼈던 것만큼의  감정 변화는 자주 일어나지 않았다.

그렇게 상담과 약물 복용을 병행한 지 6개월 정도가 지났을 무렵, 문득 '언제까지 이렇게 약물에 의존할 수는 없다.' 생각이 들었다.

약물을 복용하고 한눈에 보일만큼 눈에 띄는 변화는 없었지만, 3개월이 지났을 무렵에는 신경 정신과 약물이 어느 정도  감정과 컨디션을 조절하는 역할을 하는  같다는 생각이 들기는 했다.

감정 기복의 폭이 전보다는 줄어든  같다는 느낌이 있었고, 가끔은 나른해지는  같은 기분이  만큼 감정적으로 신체적으로 긴장된 부분을 이완시켜 주는  같기도 했다그렇게 긍정적인 부분도 분명 있었지만, 그게 무조건 좋기만 한건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아마도 이미 질병 때문에 오랜 시간 약을 복용했던 경험이 있던 나였기에 '약물 복용' 자체에 대한 거부감이 여전히 남아 있었고, 신체의 통증에 대한 약물과는 다르게 신경 정신과 약물은 눈으로 한 번에  효과를 확인하기 어렵다 보니 언제까지 복용을 해야 하는지 알 수 없어 막연한 두려움이 있었다.  

그래서 약물 복용을 한 지 6개월 정도 지났을 무렵 신경 정신과 선생님과 상담사 선생님에게 약물 복용에 대한  생각을 말씀드렸다.

그러자 상담을 처음 시작할 때처럼 다시 한번 간단한 검사가 진행되었고, 두 분 모두 내가 원한다면 약물 복용은 중단해 봐도 될 것 같다고 했다.  다만, 상담은 지속되는 것이 좋을 것 같고 약물 복용은 필요하다고 느껴진다면 언제든 다시 진행하자고 했다. 

모든 치료가 끝난 건 아니었지만 스스로 약물 복용을 중단하겠다는 것이 잘한 선택일까 불안해하던 내게, 생각보다 긍정적인 선생님들의 반응은 한걸음 정도는 스스로 나아갈 수 있는 힘이 생긴듯한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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