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와 함께 이룬 작가의 꿈
'안녕하세요, 작가님!'
브런치에서 작가 승인 안내 메일을 받았을 때, 난생처음 '작가'라는 호칭을 들어 봤다.
작가.
그 말이 상당히 어색하면서도 나의 보잘것없는 어느 재주 하나를 인정받는 것 같고, 뭔가 나를 따뜻하게 대우해 주는 느낌이 들어 기분이 참 좋았던 기억이 있다.
그 이전에도, 브런치를 알게 되어 글을 쓰기 시작했을 때에도 글을 쓰는 것에 딱히 대단한 소질이 있다고 느껴본 적은 없었다.
그저, 내 마음 한편에 자리한 상흔인지 아직도 피를 흘리고 있는 상처인지 모를 그 어느 것 하나를 떼어내고자 시작했던 글쓰기였다.
어떤 종류든 ‘트라우마’라 지칭할 상처를 가진 사람들은 다 그러하겠지만, 굉장히 오랜 시간 실체를 알 수 없는 그 무언가와 싸우다 보면 매일같이 베이고 쓰러지는 느낌을 받는다.
특히 나처럼 정신적 트라우마(Psychological Trauma)를 겪는 사람들은 이게 나 자신과의 싸움인지, 어떤 대상과 맞붙는 싸움인지 알 수 없는 채로 영원히 끝이 나지 않을 것 같은 전쟁을 이어 나가는 기분이 든다.
약물치료와 상담 같은 외부의 물리적 도움을 받으며 그나마 많은 호전이 있었다.
하지만 결국엔 그 싸움을 멈추는 것도, 끝이 보이지 않을 것만 같은 길의 끝을 찾아 벗어나는 것도 결국엔 나 자신이라는 것을 알게 되는 순간이 온다.
처음 상처를 인지했을 때는 누가 볼까 가리기 급급 하기도 했었다. 그러나 피 흘리는 상처는 억지로 덮고 덮어 어떻게든 멀쩡한 척해봐야 결국엔 아무 소용이 없다. 흘리는 피는 닦아야 하고, 벌어진 상처는 소독하고 연고를 발라야 그나마 새살이 차오르며 갈라졌던 자리를 채워준다. 누군가의 도움을 받을 수도 있겠지만 결국엔 나 자신의 의지와 노력이 필요한 과정이다.
그렇게 상처를 치유하려 노력해도 갈라졌던 상처의 흔적은 희미하게 남는다. 그렇다고 무작정 상처를 덮어 흐르는 피를 막아내고 가리기만 하면 결국엔 곪아버리고 터져서 더 깊고 치유하기 힘든 상처를 만들어 낼 뿐이다.
치료를 시작한다 해도 마음의 상처는 눈으로 확인하기 어려운 것이다 보니 어느 정도 새살이 차올랐는지 확인하기가 어렵다. 아직도 가끔은 상처를 치유했던 곳에 저릿한 통증이 느껴진다.
얼마나 더 새살이 차올라야 그 상처가 아물지 알 수 없었기에, 다시 한번 상처를 천천히 보듬으며 약을 발라주고 치료해 주는 과정이 필요하다 생각했었다.
그러한 이유에서 시작했던 글쓰기였다.
사실 나의 이야기를 글로 써내는 것과 누군가 볼 수도 있는 공간에 공개한다는 게 과연 나에게 도움이 되는 일이 맞는 건지 고민을 하기도 했었다. 그럼에도 글을 써내려 가기 시작한 건 어느 기억 하나 때문이었다.
심리 상담을 시작하며 난생처음 타인에게 나의 치부이자 상처였던 이야기를 꺼내 놓았고, 부끄러움과 모멸감을 견디지 못해 더 깊은 곳으로 꽁꽁 숨어버리게 되는 건 아닐까 하는 걱정이 있었다. 그래서 굉장히 오랜 시간 망설이며 머뭇 거렸던 과정이지만, 막상 시작하고 나니 오히려 그 반대의 기분을 경험했던 기억이 있다.
자칫 남들 앞에 내보인 상처에 오히려 더 깊은 상처가 생기진 않을까 우려했던 것과는 다르게 오히려 내가 스스로 볼 수 없는 깊은 곳의 상처까지 어루만지고 달래주는 느낌에 위로와 위안을 받았었다.
그때의 그 경험을 기억하기에 다시 한번 나의 상처를 들여다보고 보듬어 주자는 마음으로 글을 써 내려가기 시작했었다.
그렇게 시작한 글쓰기에서 ‘작가’라는 호칭을 받게 되니, 기분이 좋으면서도 조금은 두렵고 무거운 마음이 들기도 했다. 다소 무거운 주제의 이야기라 반감을 사면 어쩌나 하는 걱정도 스치며 잠시 멈칫했지만, 그럼에도 나를 정리하고 보듬기 위한 시간이 필요하다는 생각에 계속해서 글을 써내려 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만의 착각일지는 모르겠으나, 무거운 주제임에도 많은 사람들에게 보여줄 수 있는 ‘작가’의 위치를 허락한 것은 아마도 ‘나로 인해 조금이나마 위로와 공감을 전달해 주길 바라는 마음이 있어서는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그렇게 나는 이곳 브런치에서 허락된 '작가'를 가장한 '상처 치유하기' 과정을 이어 나가고 있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