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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창수 Mar 23. 2024

교감으로 산다는 것, 좋은지 나쁜지 누가 아는가

성급함은 갈등을 불러일으킨다. 조급함은 후회의 지름길이다. 편견은 관계를 단절시키고 비판은 대화를 중단시킨다. 교감으로 산다는 것은 욕 얻어먹는다고 생각해야 편하다. 완벽한 사람이 없듯이 일개의 교감 한 사람이 학교의 수많은 일들을 판단하고 결정하는 일에는 실수가 있고 과오로 남는 일이 부지기수다. 수학 공식처럼 딱 떨어지는 문제라 할지라도 공식에 문제 삼는 경우가 사람 사는 세상에 비일비재하다. 


잘 마무리된 것 같은 학부모 민원도 다음날이 되면 억울하다고 경직된 얼굴로 찾아오는 다른 편의 학부모가 있다. 이야기를 들어보면 대부분 자신의 입장에서 생각한다. 학교가 잘 대책을 세우라고 한다. 정답이 없는 문제를 던진다. 그렇다고 해서 논리적으로 이야기를 하면 이번에는 학교를 상대로 문제를 제기할 판이다. 원론적인 답변을 하는 선에서 마무리를 하지만 대화의 대부분은 속상한 점을 다독거리며 '좋은지 나쁜지 누가 아는가'라는 말처럼 우리 어른들이 한 발자국씩 멀찍이서 기다려는 주는 마음을 갖자는 식으로 위로의 말을 건넨다. 


학기가 시작되고 네 번째 민원 접수다. 해답이 없는 민원이다. 화가 난 감정을 받아주는 것이 전부이고 학교로써는 좀 더 관심을 가지겠다는 말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답이다. 사실 이런 말을 해 주고 싶다. '좋은지 나쁜지 누가 아는가' 


류시화 시인의 말처럼 삶은 설명을 듣는 것이 아니라 경험하는 것이고 외부 상황에 대한 지나친 해석으로 내면의 전투에 시간과 에너지를 쏟는 일은 인간 심리의 흔한 측면이다. 축복 blessing이라는 말은 프랑스어 '상처 입다 blesser '와 어원이 같다고 한다. 축복을 셀 때 상처를 빼고 세지 말아야 할 이유다. 파도가 후려친다는 것은 새로운 삶을 살 때라는 뜻이며 시도와 모험을 가로막는 것을 제거해야만 낡은 삶을 뒤엎을 수 있다. 교감으로 산다는 것도 편안한 삶을 살겠다는 생각은 애당초 갖지 말아야 한다. 교감의 삶이 상투화된다는 것은 자신을 절벽으로 밀어내는 것과 동일하다. 


무엇을 보는가가 아니라 어떻게 보는가, 무엇을 듣는가가 아니라 어떻게 듣는가, 무엇을 느끼는가 아니라 어떻게 느끼는가가 교감의 삶을 만들어 나갈 것이다. 단단하게, 노련하게. 

나는 교감의 일상을 매일 글로 남기고 있다. 마라톤 선수가 달리기가 쉬워서 달리는 것이 아니듯 글쓰기가 쉬워서 글을 쓰는 것이 아니다. 계속 글을 쓰겠다고 결심했기 때문이다. 글을 잘 써서 글을 쓰는 것이 아니라 계속 글을 쓰기 때문에 쓰게 된다. 


교감으로 사는 삶이 좋은지 나쁜지 누가 알겠는가. 나 자신도 모를 때가 많다. 힘든 순간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날도 있다. 좋은지 나쁜지 판단하기보다 그저 하루하루 살아내려고 노력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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