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들 사이에서 전해지는 학교 관리자에 대한 이야기 중에 이런 얘기가 있다. 내 기억 속에도 지금껏 남아 있는 이야기다. 오해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가장 만나고 싶지 않은 학교 관리자의 유형으로 전문직(장학사) 출신의 여자 관리자, 여자 관리자 중에서도 결혼을 하지 않은 관리자.
아마도 이 얘기는 깐깐한 관리자보다는 선생님들을 이해해 주는 관리자를 선호한다는 뜻일 게다. 어깨에 힘이 들어간 관리자보다는 빈틈이 있어 보이는 허술한 관리자가 대하기가 편하다는 얘기일 게다. 학교에 무진장 시간과 열정을 쏟아붓는 관리자보다는 두루두루 학교 안과 밖에 시선이 균형 잡게 쏠리는 관리자가 마음 편하다는 얘기일 게다.
그렇다면 나는 어떤 관리자의 유형일까?
위에서 말한 문맥 상으로 보면 나에게 해당되는 것은 하나도 없다. 그러니 나는 선생님들이 대하기가 편한 관리자다라고 스스로 자화자찬하면 큰 오산이다.
초임 교감 시절 무척이나 어깨에 힘이 많이 들어간 적이 있다. 3년 차가 되니 긴장감이 떨어져서 그런지 어깨에 힘이 조금 빠진 것은 사실이다. 쪼잔하게 이것저것 잡아내는 교감보다는 빈틈이 보여도 이해해 주는 관리자가 되어야겠다고 생각하면서도 그게 잘 안된다.
그러다가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리는 기회가 생기면 나 자신을 한 번 돌아보게 된다. 특히 죽음에 대해 생각하면 별일도 아닌 것에 괜히 상처되는 말을 하고 어깨에 잔뜩 힘을 준 일들이 후회가 된다.
10년 전 임종을 앞둔 어떤 분을 만난 적이 있다.
그때 느낌을 이렇게 기록해 두었다.
"약 10년 전 일이었던 것 같다. 강릉 갈바리 병원에 환자가 계신데 교회에 가고 싶다고. 그래서 일요일 아침에 환자를 데리러 교회 차로 올 수 있냐고 물어오셨다. 나에게 부탁을 하신 분은 환자와 가까운 친척분이셨다. 환자는 50대 남자분이셨다. 당연히 교회 차 운행 가능하다고 말씀드렸다. 그리고 일요일 아침 갈바리 병원 앞으로 일치감치 환자분을 모시러 갔다. 참고로 갈바리 병원은 호스피스 병원이었다. 가까이 가 본 적은 처음이었다. 지나가다 병원 입간판은 본 적은 있었지만. 임종을 앞둔 환자분들이 계신 병원임을 익히 알고 있었다. 병원 앞에 차를 세우고 대기하고 있었다. 마침 환자를 부축하며 걸어오시는 분에게 손짓을 했다. 힘겹게 걸오시는 환자를 보면서 많이 편찮으시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차를 조심스럽게 태우고 교회로 향했다. 예배를 마치고 식사를 하지 않은 채 다시 병원으로 모셔 드렸다. 운전하면서 환자분의 모습을 백미러로 흘끔흘끔 쳐다보았다. 차장 밖을 바라보시는 눈빛이 신중하고 생각에 깊이 잠겨 있는 듯했다. 작은 목소리로 가을 하늘이 참 아름답다고 이야기하는 것을 들었다. 그 후 환자분을 3~4번 태워드렸다. 그리고 더 이상 오지 않아도 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더 이상 오지 않아도 된다'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 알 수 있었다. 괜히 나 또한 숙여해 졌던 기억이 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