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그린북> 리뷰
나는 다분히 수다스럽고 호들갑을 잘 떠는 편이다. 좋으면 한껏 소리를 지르며 그 감정을 표현하고 팔다리 동작도 커진다. 싫거나 부당하다고 생각하면 낯빛이 돌변하고 상대에게 따지고 든다. 한 마디로 점잖지 않다. 그래선지 살면서 '품위 있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다.
어느 날 내가 존경하는 선배가 내 친구를 언급하며 "그 친구 분 참 품위 있어요."라고 말했다. 그 순간 '품위'라는 말이 낯설게 들렸다. 그 정도로 내 삶과 가까이에 있는 말이 아니라는 뜻도 되었겠다. 그러면서도 그 친구라면 어울릴 만하다고 생각되었다.
품위를 사전에서 찾아보면 고상, 품격, 위엄, 기품, 교양 그런 낱말들로 설명된다.
그렇다면 나는 품위 있는 사람인가, 없는 사람인가.
아무래도 없는 쪽에 가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쁜' 사람에게는 기가 죽지 않았는데 '품위 있는' 사람에게는 주눅이 들곤 했던 내 모습이 떠올랐다. 이후 '품위'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그 친구는 있는데 나에게는 없는 그 품위는 도대체 무언가.
<그린북>은 품위를 생각게 하는 영화다.
흑인 피아니스트인 '돈 셜리(마허샬라 알리)' 박사는 엘리트 예술가이다. 돈 셜리는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비굴하지 않으면서 자신의 신념대로 행동하며, 타인을 함부로 판단하거나 하대하지 않는다. 폭력이 아닌 대화로 평화롭게 해결하려 하고, 모든 이를 존중하는 자세가 몸에 배어 있다.
돈 셜리는 미국 남부의 연주 여행을 위해 '토니 발레롱가(비고 모텐슨)'를 보디 가드 겸 운전기사로 임시 채용한다. 토니는 이탈리아에서 온 이주민으로 입담과 주먹을 믿고 거칠게 살아온 남자다.
욱하는 성미를 지닌 토니는 돈 셜리 박사를 함부로 대하는 백인과 다투다 결국 돈 셜리마저 유치장에 갇히게 만든다. 평소 어떤 일에도 화를 내는 법이 없이 나긋나긋하게 말하던 돈 셜리는 이 영화에서 가장 높은 톤으로 화를 낸다.
폭력으로는 못 이겨요. 품위를 유지할 때만 이기지. 품위가 늘 승리하는 거요.
토니는 백인들의 부당한 대우에도 품위를 지켜내는 돈 셜리와 동행하며 그에게 감화받고 변해 간다.
그 중 토니가 아내에게 편지를 쓰는 장면이 눈에 띈다. 토니는 돈 셜리 박사를 글쓰기 선생 삼아 거친 문장들을 수정하여 편지를 띄운다. 아내를 진정 사랑하고 신뢰하는 토니의 진심은 품위 있는 문장들 덕에 빛을 발한다. (토니의 아내 '돌로레스' 역의 린다 카델리니의 연기가 매우 따뜻하여 그녀의 눈빛에서 위로 받았다.)
돈 셜리는 토니에게 차별의 벽을 깨고 싶은 마음으로 굳이 남부 투어를 선택한 것이라고 설명해 준다. 그러니까 돈 셜리의 품위는 그의 용기와 닿아 있다. 비굴한 행동으로는 도저히 품위를 지킬 수 없다는 것을 돈 셜리는 몸으로 보여준 것이다.
사람들의 생각을 바꾸려면 용기가 필요하죠.
교양있는 말투, 우아한 자태 등이 품위 유지의 단순한 겉모습이라면, 진정한 품위는 목숨을 거는 용기일 수 있겠다. 품위를 지키는 것은 녹록지 않은 문제다.
두 달 간의 연주 여행을 하는 동안 돈 셜리와 토니 발레롱가는 인종을 넘어선, 계급을 넘어선 우정을 나누게 된다.
크리스마스 이브날 밤에 두 사람은 연주여행을 마치고 뉴욕의 집으로 돌아온다. 눈이 수북이 쌓인 길가에서 헤어지는 순간 두 남자의 눈빛, 각자의 공간에 돌아가서도 서로를 그리워하는 모습에서 감동과 여운이 커지는데, 글을 쓰는 지금도 다시 보고 싶은 명장면이다.
두 인물과 동행한 끝에 얻어지는 크리스마스 선물인 이 영화의 마지막을 직접 받아보시라.
제목인 '그린북'은 흑인들을 위한 여행 안내서를 뜻하는 말이다. 영화의 배경인 1960년대 미국의 남부는 그때까지도 흑인 차별이 심했다고 한다. 남부의 몇 도시를 돌며 순회 연주하는 동안 셜리가 겪는 일들은 말할 수 없이 치욕스럽다. 자신을 연주자로 초청한 고급 식당에서 흑인이라는 이유로 식사를 하지 못하게 해 근처 흑인 식당에 가서 식사를 하게 되는 장면도 나온다. 오죽하면 토니가 돈 셜리를 향한 남부 사람들의 무례함을 보지 못하고 폭력을 날렸을까.
<그린북>은 크리스마스에 보면 무척 좋을 영화지만 다른 언제 보아도 좋을 영화였다. 품위 있게 나이 들어가기를 소망하게 되는 영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