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불꽃, 고은진에게

사랑하는 후배이자 동지였던 후배 은진아

by 창창한 날들


은진에게


1. 새내기인 너는 눈부셨다.


카랑카랑한 목소리, 선배들에게 애교 많으면서도 때론 언니처럼 마음을 보듬어 주는 너의 큰 품.

나랑 키가 비슷했던가 조금 작았던가, 난 작았다고 기억한다. 그 작은 체구로 "*** 씨~~"하고 눈웃음을 지으며 달려와 나를 와락 껴안던 너.

너에게 부끄럽지 않은 선배가 되고 싶어서 무던히 애썼어. 특히 노동해방, 인간해방을 향한 우리의 꿈을 선배들이 먼저 버리지 않기 바라는 너의 희망에 실망을 안겨주지 말자, 물밑에서 나 부단히 발질했던 거, 넌 알았지? 다른 사람의 속마음을 헤아릴 줄 아는 사람이니까 너는.



2. 너는 어쩌면 내게 실망하지 않았을지도 몰라.

사회 운동을 하겠다는 핑계를 대며 학교를 중퇴한 나를 원망하기보다 나와 **형(나의 X)이 사는 방에 달려와 운동 방향과 후배들 관리와 활동가로서의 너의 진로에 대한 고민을 털어놓으며 술 마시고 울다 웃다 돌아가곤 하던 너. 골목을 빠져나가던 너의 뒷모습이 아직도 남아 있어. 너를 학교에 외롭게 두고 온 것 같아서 미안했어.

어느 날부터 너와 연락이 끊어졌는데 나는 일부러 너를 찾지 않았어. 다시 운동할 엄두도 내지 못하던 내 처지, 부끄러운 나를 들키고 싶지 않았고, 쭉쭉 나아갈 너의 발목을 잡고 싶지 않았거든.

몇 년 뒤 너의 결혼식 소식을 듣고 축하하러 갔고, 다시 일 년 뒤 네가 첫딸을 안고 나온 동문 모임에서 너를 본 게 마지막.

어디선가 잘 살고 있겠지. 서로 마음이 닿는다면 만나겠지 그러면서 해가 갔네.



3. 너와 그렇게 재회하게 될 줄 상상이나 했겠니...

내가 이혼한 그 해에 내 곁을 떠난 친구 **가 그저께 갑자기 카톡을 보내왔어. 부고장이었어. '고은진'. 누구더라. 난 친구의 이름까지 잊어버린 사람처럼 머리가 멍했어. 너와 나, 친구. 우리는 왜 이렇게 되었을까.

다음 날 아침 장례식장을 찾아가는 길. 부고장에 쓰인 두 남매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걱정이 컸어.

조문을 하고 어정쩡하게 있는 내게 너희 언니가 다가오더라. 언니에게 나를 소개하고 너와의 추억을 몇 마디 얘기하니 언니가 너의 아이들 지아와 도현이를 불렀어.

"엄마랑 대학 때 단짝이었다는 선배시래. 엄마 얘기 들어보자."

아기 때 보았던 너의 딸 지아는 어쩜 그렇게 눈부시게 예쁘게 성장했는지... 생전 처음 본 엄마의 선배라는 내게 미소를 띠고 다가와 손을 잡아주더라. 갑작스럽게 쓰러져 영영 깨어나지 못한 엄마를 잃은 스물여섯의 여자애가 그런 낯빛을 할 수 있다는 게 놀라우면서 마음껏 슬퍼하지도 못하고 상주 역할을 하느라 지은 표정일 거라 생각하니 마음이 아팠어.

경계가 없는 표정으로 내 이야기를 들을 준비를 하며 몸을 돌려 나를 정면으로 보는 지아와 나는 손을 잡았어. 도현이 역시 초등학생보다 더 무구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며 너에 대한 이야기를 기다리더라.

"모든 타이밍을 놓치고 이제야 와서 너무 죄송해요. 제게도 힘들었던 시절이라 그런지 대부분의 기억이 지워졌어요. 희미하지만 얘기해 볼게요..."

"네, 해 주세요. 엄마가 운동했다는 말만 했지, 자세하게 들은 건 없었어요. 듣고 싶어요."

그렇게 해서 우리가 함께한 이십 대, 삼 년 동안의 이야기를 들려주었어.

시민들 앞에서 우리가 교실이 아닌 거리로 뛰쳐나와 구호를 외치는 이유를 선전하고 선동하던 용감한 너, 때론 선배들을 꾸짖고 후배들을 끔찍하게 아끼던 너, 맡겨진 일을 잠을 줄여서라도 해내던 너, 힘들어서 운동에서 멀어지는 사람들을 원망하기보다 술 한 잔 마시자고 하던 너, 불꽃처럼 하루하루를 살던 너에 대해서.

세 사람 다 꿈에 젖은 듯, 너를 자랑스러워하며 듣는 모습을 보니 그 자리에 네가 없다는 게 너무 황망했어. 네가 살아있었다면 만나지 않았을 그들을 만나고 연락처를 주고받은 상황이 믿기지 않았어.

돌아가려는 내게 지아와 도현이가 번갈아 안아주었어. 어쩜 너는 아이들도 너처럼 따뜻하게 안아줄 줄 아는 아이들로 키웠을까. 도현이가 마지막으로 한 부탁.

"엄마 사진 찾으시면 갖다 주세요."

눈망울이 사슴 같은 스물한 살 도현이의 말이 가슴에 콕 박혀서... 나는 얼마 지나지 않아 너희 아이들을 만나러 가게 될 것 같아.

"가끔 만나주세요. 저희 결혼할 때도 와 주시고요."

지아가 그 말을 하는데 왜 그렇게 미안한지.



4. 고은진~~ 너 왜 이렇게 빨리 갔어.

나보다 한 살 위 언니인 너희 언니가 그러더라.

"선배 덕분에 막냇동생이 그렇게 눈부신 이십 대를 보냈다는 걸 알게 됐어요. 집안에서 가장 걱정을 끼치던 막내였거든요. 결혼 전이나 결혼한 뒤에나요. 그런데 이야기 듣고 나니 너무 자랑스럽네요, 제 동생. 선배와 제 동생 같은 사람들이 애써준 덕에 민주화된 세상에서 우리가 이렇게 살 수 있는 거잖아요. 감사해요. 은진이는 세상에 도움 되지 못하고 살았으니 언제 죽더라도 장기만큼은 나눠주고 가고 싶다고 했대요. 조카들은 제 엄마가 생전에 장기기증을 서약했다는 걸 알고 엄마를 놔주기 힘들었을 텐데도 빨리 결정을 했어요. 그렇게 해서 살린 사람이 108명이래요. 눈 감을 때까지 누구한테도 짐 주기 싫어하던 성격대로, 딱 그대로 살다 간 거예요."

108명이라고. 다시 눈물을 쏟지 않을 수 없었어. 그랬구나. 끝까지 넌 그랬구나.

언제 밥 한 번 먹자고, 너의 아이들은 어떻게 컸는지, 지난한 세월 너는 어떻게 살아냈는지, 너 나름의 운동을 어떻게 해 내며 살았는지 이야기 나누려던 나의 바람은 내 처지만 생각하다 자꾸 미뤄지고, 이름도 잊을 만큼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부고장으로 네 얼굴을 보게 되었네. 미안해. 은진아.

삼 년 전 세상을 떠난 아빠를 잃은 슬픔도 아직 남아 있을 아이들이 오늘 이후 어떤 마음으로 살아갈지... 두 아이가 단단해 보여서 더 안쓰러웠지만, 은진아, 아이들은 잘 살아낼 거야. 너도 믿지?

어떤 상황에서든 웃음을 잃지 않고 온 힘을 다해 살아낸 은진아, 그곳에서는 부디 편안히 쉬기 바라.


- 너를 자랑스럽게 생각하던 창창한 날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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