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을 쓰고 싶다고, 아파트 단지 내에 글쓰기 지도하는 선생이 있는지 자신이 직접 초록창을 검색해 찾아온 친구다. 어머니가 전화를 먼저 걸어 학생과 직접 수업 여부를 결정해 달라고 했다.
첫날 이곳을 찾아온 은지(가명)의 모습이 아직도 강렬하다.
마스크를 쓴 얼굴로 반짝이는 눈빛이 말했다.
"저는 배우고 싶어요. 알고 싶어요. 성장하고 싶어요."
은지는 가정교사를 고용하기 위해 인터뷰하는 어른처럼 당당하게 질문했다. 나는 성실히 답했다. 인터뷰는 1시간 정도 흘러갔다. 은지는 대화가 재미있었는지 추가 질문을 해도 되는지 물었다. 그러라고 했다.
"선생님이 읽었던 소설 중에서 좋았던 게 뭐였어요?"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과 '대성당', '제 5도살장' 들을 말하니 모른다고 했다. '데미안'은 들어만 봤고 못 읽었다고 했다. 한국 작가의 작품은 더 모른다고 했다.
"어떤 작가를 좋아하세요?"
하성란, 김연수 작가가 작품도 좋고 인품도 좋더라고 말해주니 이름을 못 들어봤다고 했다. 그다음은 레이먼드 카버를 말하려 했는데 이름이 떠오르지 않았다.
한 해 동안 소설 읽기를 멈춘 결과가 뜻밖의 상황에서 탄로 나 버린 셈이다. 당황하면 귓불이 빨개지는 나는 가슴이 두근거리자 체념했다. 그래, 내가 이 정도다. 그러면서도 '이게 뭐라고, 이 수업 안 해도 되는데, 아이 앞에서 왜 이러니' 하며 무수한 혼잣말이 왔다 갔다.
환기 차원에서 내 뒤편의 책장으로 가 섰다. 1위부터 100위까지 좋아하는 책을 순서대로 꽂아 놓은 걸 보니 카버의 '대성당'이 보였다. 한때 그의 단편들에 푹 빠져 지냈지.
"아 맞다, 레이먼드 카버 좋아해요. 혹시 들어봤어요?"
변명 같은 답을 하고 자리에 앉자, 은지는 "제가 국어 성적은 좋은데 책은 교과서 외에 읽은 게 없어요. 이제부터 많이 읽어야겠어요." 하며 웃었다.
"샘과 수업하고 싶어요. 유명한 작가가 아니라서 더 좋아요. 꾸준히 소설을 써 오신 점이 더 좋아요. 믿고 따라갈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렇게 해서 나는 그 학생에게 발탁됐다.
공부방을 연 지 얼마 안 돼 학생 수는 적고 시간은 많을 때였다.
프랜차이즈 독서 수업을 하고 있어서 개인 수업은 하지 않을 계획이었는데, 당차고 글쓰기를 좋아하는 은지와 수업하면 어떤 세계가 펼쳐질까 궁금하고 기대됐다. 나를 인터뷰한 은지에게 낙점된 것이 기뻤다. 나중에 어머니께서 말하길, 그런 면접을 세 군데 본 중 내가 뽑힌 거라고 했다. 녀석도 참...
은지는 기대 이상의 학생이었다.
본인의 말대로 읽은 책은 많지 않았지만 이해력이 좋고, 능동적으로 수업에 참여했다.
대학생과 이야기를 나누는 기분이 들 때도 있었다.
은지는 매주 2000자 분량으로 손바닥 소설을 한 편씩 써서 냈다. 비문이 없고 문장이 깔끔한 게 장점이지만, 윤리적인 가치관과 주제로 소설의 임팩트가 약했다.
소설 속 등장인물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주변 사람들을 바라보는 은지의 시각을 알 수 있었다. 때로 편협하게 사람을 보는 내 시각이 드러날 때도 있어 부끄러웠다.
수업 올 때의 은지 모습과 닮아 따라 그림.
은지와 봄부터 가을까지 수업하는 동안, 나는 100일 글쓰기 도전과 그림책 만들기를 하느라 날마다 글을 쓰고 그림을 그렸는데, 은지는 그런 나를 보니 더 성실히 쓰고 싶어졌다고 했다.
은지에게 읽기, 쓰기, 소설 창작에 관한 이론을 프린트해 주고 함께 읽었다.
은지가 써 온 소설을 함께 이야기하는 과정에서 나도 더 잘 쓰고 싶어 글쓰기를 대하는 자세가 더 성실해졌고, 은지에게 좋은 소설을 소개하고 싶어 예전에 읽은 책들을 꺼내보았다.
은지와 수업하기 위해 준비하는 시간이 아깝지 않았다.
다섯 달째 되었을 때 '호시 신이치'의 <봇코짱>(2008, 지식여행)을 읽어오게 했다.
손바닥 소설로 읽기에 부담이 없으면서 다채로운 소재가 은지의 상상력을 자극할 것 같았다.
봇코짱 외 몇 편을 읽어온 은지가 '유레카' 하는 눈빛으로 탄성을 지르며 처음으로 책을 구입하고 싶다고 했다.
소재와 반전이 기발한 소설을 읽으니 자기도 누군가의 마음을 움직이게 하는 소설을 쓰고 싶어졌다고 했다.
구월에 은지는 예고 백일장에서 입상하면서 내 수업을 마무리했다.
집과 예고가 멀어서 합격이 돼도 다닐지 여부를 내내 고민했는데, 수상을 하고 나니 자신감이 생겼는지 일반고에 들어가 문예동아리 활동을 하겠다며 예고 입시의 뜻을 접었다.
은지에게서 기말고사 끝나고 만나고 싶다는 톡이 왔다.
어느 날 밤 열 시에 만나 열두 시까지 아파트 단지를 걸었다. 내가 좋아하는 길로 안내하니 가 본 적이 없었다며 새로운 공간을 만나게 해 줘 고맙다고 했다.
겨울방학에는 오전 열한 시쯤 만나 습지공원을 걸었다. 이만 보를 걸으며 이야깃거리는 끊어질 줄 몰랐다. 몇 달 사이 은지는 서울예대 문예 동아리에서 운영한 프로그램에 참여해 부쩍 성장해 있었다. 글에 대한 고민도 한층 깊어졌다.
아줌마인 나와 걷는 게 좋다고 하는 은지의 말이 긴가 민가 하면서도 대화가 물결을 만들고 파도를 만들며 이어지니 헤어지기 아쉬웠다.
수업과는 다른 사적인 만남이라 긴장했는데, 은지는 어떤 어른보다 내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고, 자신과 가족과 친구들과 존경하는 선생님들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러면서도 그들의 사생활을 함부로 말하지 않았다. (이 아이는 어떻게 이렇게 아름답게 자랐지?)
은지는 웅숭깊어서 섣불리 넘겨짚거나 자신이 옳음을 관철하려고 하지도 않았다. 어떤 말을 해야 하고 하지 않아야 하는지 잘 아는 것 같았다.
은지가 헤어지기 전 내 눈을 보며 말했다.
"샘처럼 저도 열정적으로 도전하며 살고 싶어요."
가끔 나한테 적극적인 피드백을 해 주는 학생들이 있지만, 은지의 말은 과찬이다.
고마우면서도 부끄러웠다. 내가 얼마나 팔랑팔랑 뒤집어지며 무수히 회피하며 살아왔는지 안다면...
여름방학이 기다려진다. 은지가 또 얼마나 성장했을까. 깊어지는 학생을 보는 기쁨은 말로 표현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