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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창창한 날들 Sep 29.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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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룩한 글쓰기 시즌 8 - 2023년 9월 29일(29일 차)




책 리뷰《광막한 사르가소 바다》(진 리스, 1966년)


진 리스 작가는 《제인에어》(1847년 출간)를 읽고 분노하는 마음으로 《광막한 사르가소 바다》(1966년 출간)를 썼다고 한다. 제인에어가 아닌 광녀 '버사'의 처지에서 버사의 눈으로 로체스터를 바라보고 쓴 작품이다.


이 작품의 배경은 1800년대, 영국의 식민지 자메이카와 영국이다. ‘사르가소’는 서인도 제도와 유럽 사이에 있는 바다로 ‘죽음의  바다’라고 불렸다는데, 영국과 자메이카가 떨어진 거리만큼이나 '광막한' 두 문화의 충돌이자  죽음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주인공 ‘앙투와네트’는 자메이카에서 나고 자란 '크리올’이었다. 크리올은 유럽인에게는 무시당하고 원주민에게도 다른 인종으로 차별받았다. 그녀는 영국의 관습에 의해 영국 본토에서 온 남성 로체스터와 결혼하여 기득권층이 되고 싶었다. 하지만 남편 로체스터에 의해 광녀로 의심받기 시작하여 정체성이 지워지고 파괴되는 인물이다.


로체스터는 자메이카와 그곳의 원주민, 그들과 거리낌 없이 자유롭게 지내온 앙투와네트를 이상한 눈으로 보았다. 그들의 일원이 될까 봐 두려운 그의 혐오 정서가 앙투와네트를 무너뜨리는 동력이 되었다.


나는 그녀의 모습을 비판적인 눈으로 바라보았다. 길게 찢어진 눈, 검은 동자의 눈, 서글픈 이방인의 눈. 그녀가 아무리 영국 순수 혈통 크리올이라지만, 크리올을 영국 사람이나 유럽 사람이라 할 수는 없지. (101쪽)


로체스터는 외모가 아름다운 그녀를 사랑했지만, 주변 사람들의 부정적 정보를 받아서 그녀의 영혼을 거침없이 죽이게 되었다.

당시 영국법은 영국 남성이 크리올 여성과 결혼하면 남성의 재산이 되었고, 로체스터는 영국법을 악용하여 앙투와네트의 모든 것을 강탈했다. 심지어 앙투와네트의 하녀와 정사를 벌여 질투를 유발함으로써 앙투와네트에 대한 죄의식을 잔인하게 되갚는 비열한 인물이다.


다행히 앙투와네트에겐 조력자가 있었다. 어떤 일을 직접 겪지 않고도 상황을 꿰뚫어 보는 사람으로, 크리스토핀이라는 지혜롭고 강단 있는 유모가 바로 그런 인물이었다. 크리스토핀은 앙투와네트가 영국에서 온 남자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걸려고 했을 때 홀로서기를 권유하였다.

"용기를 가지고 혼자 투쟁하세요."

하지만 앙투와네트에게는 무의식 속에 숨어있는 인종 편견이 있었다.

그녀는 크리스토핀을 떠난다. 크리스토핀이 한 아래의 말을 듣지 않고서.


"이 무식하고 고집불통인 데다 영국이라는 나라가 존재하는지도 모르는 늙은 검둥이가 어떻게 내가 취해야 할 가장 좋은 방도를 가르쳐줄 수 있겠어?" - 크리스토핀을 향한 앙투와네트의 독백 (161쪽)


로체스터의 사랑을 갈구한 앙투와네트는 그가 자신에게 '버사'라는 이름으로 바꿔 부르는데도 내버려 두게 된다.

아프리카 사회에서 이름을 바꾼다는 것은 그의 인생을 바꾸는 것으로 인식했다고 한다. 그것을 ‘오베아’라고 하는데, 좀비로 만드는 예식에서 희생자에게 새 이름을 주는 것이 일반적이었다고 한다.


결국 앙투와네트는 자신의 이름을 잃어버리게 되었다. 그녀는 왜 타인에 의해 짓밟히고 자신이 지워지도록 두었을까. 그것은 권력의 중심인 영국을 지향점으로 두었고, 맹목적으로 영국법을 따랐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그녀만의 문제일까. 그녀를, 모든 크리올을 영국 남성에게 의존하게 만든 유럽 중심의 식민지 구조가 문제였다. 사회 구조는 개인의 의지를 말살한다.

앙투와네트에게 구조를 깨뜨리는 투쟁을 하지 그랬냐고 하는 것은 무책임한 비난일지도 모른다.


이 책을 읽고 나를 함부로 지칭하고 내 정체성을 규정하는 행동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게 된다.
인생의 변곡점에서 의미 있는 소설을 만나게 된 것도 필연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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