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대폰에 정수재라는 이름이 떴다. 초등학교 3학년인 남학생 이름이다. "선생님, 선생님 아버지는 어떠세요?" 전화해서 대뜸 내 아버지의 건강을 물어주다니, 너란 녀석 도대체 뭐냐. 평소에도 어른스러운 멘트에 나를 수없이 놀라게 하더니만. "아버지? 음... 크게 좋아지진 않았지만 괜찮으셔. 우리 아버지 건강을 물어주다니. 수재야 고마워." 헤어지기 전 나한테 6인용 책상은 어떡할 거냐 물었던 친구다. 내가 이사 갈 집이 좁아서 누굴 줄 수도 있고 버릴 수도 있다고 말했더니, "선생님, 그건 안 되죠. 선생님 보물 1호라고 했잖아요. 저는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고요. 제가 처음 왔을 때 선생님이 하신 말씀이오. 보물은 어떤 일이 있어도 버리면 안 되는 거거든요." 라고 말한 그 친구 덕분에 6인용 식탁은 살아남았고, 지금 내 거실에 있다. "선생님 제가 선생님에게 찾아가도 될까요?" 이건 무슨 소린가. 뭐라고 답해야 할지 망설였다. 마침 서울의 아버지 댁에 있기도 했고, 설사 안산에 있더라도 그 애를 오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 아닌가. 내가 멀리 이사 왔다고 하니 시간이 얼마나 걸리느냐 물었다. "한 시간만큼 멀어요? 선생님 만나서 콩 게임 하고 싶어서요. 선생님이랑 했던 게 너무 재미있었거든요."
수업을 정리하기 한 달 전부터 그 친구와 독서 수업하기가유난히 힘들었다. 저녁 시간에 혼자 와서 책을 읽던 그 친구는 선생님과 헤어지기 전에 추억을 만들어야 한다면서 자꾸만 나랑 무얼 하자고 했다. 책을 읽는 현황이 부모에게 전달되는 시스템이라 내가 꺼려했더니, 평소보다 빨리 읽어 치우고는 10분만 놀자고 졸라댔다. 9월의 월수금 수업 내내 그랬다. 초성퀴즈, 끝말잇기, 그림 알아맞히기, 트럼프까지 하다가 마지막 하루를 '보난자'라는 콩 게임을 가르쳐 주었다. 옛다 선물이다 하는 심정으로.
며칠 뒤 추석 연휴에 그 친구로부터 전화가 왔다. 콩 게임을 하러 우리집을 방문하겠다는 것이었다. 이제 나는 학원 샘도 아닌데. "저는 놀아줄 사람이 없다고 했잖아요." 그랬다. 부모님이 맞벌이하셔서 늘 저녁 여섯 시에 혼자 와서책을 읽고 가야 했던 아이다. 트럼프로 노는 걸 5분 가르쳐 줬더니 "세상에 이렇게 재미있는 걸 우리 엄마 아빠는 왜 모르는 걸까요?" 그러던 아이.
페미니즘 에세이집 출간한다고 고쳐 쓰고 이삿짐 정리할 때라 어수선한데 아이를 오지 말라고 일언지하에 거절할 수가 없었다. 게다가 보드게임의 마력이 무언지 나는 너무나도 잘 알지 않나. 눈앞에서 얼마나 아른거리는지. 게임한 지 두 시간 가까이 흘렀을 때 엄마로부터 전화가 와서 이제 집에 가라고 했다. 서운해하던 아이의 눈빛. 얼마나 가기 싫어하던지. 그날 더 재미있었나 보다. "선생님 제가 찾아갈게요. 선생님 댁 주소 알려주면 할머니에게 같이 가 달라고 하면 안 될까요? 아님 저희 집으로 오실래요?" 마성의 매력을 가진 이 녀석 어쩌지.
"방학 때 너네 아파트 근처 카페로 갈게. 그때 만나서 하자, 어때?" "음, 너무 오래 기다려야 하지만 그럴게요. 꼭 연락하셔야 해요. 선생님 전화 받아주셔서 고맙습니다." 마지막 인사도 잊지 않는 꼬마 친구와 겨울 방학 약속이 생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