싱글맘인 사오리와 왕따를 당하는 것으로 보이는 아들 미나토의 이야기로 시작된다. 엄마는 아빠 없이 성장해야 하는 아들의 결핍감을 덜어주려고 애쓰며 꿋꿋하고 정직하게 살아가는 인물이다. 학교 폭력에 적극 대항하려는 엄마의 시선에 이입돼 따라가다 보니 담임선생이 쳐 죽일 놈이네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대화 도중 사탕을 먹는 그의 사소한 행동까지도 학부모와 학생의 처지를 공감하지 못하는 소시오패스처럼 보인다.
관점이 바뀌어 미나토의 담임선생 호리와 그의 연인 이야기가 나온다. 담임은 소명의식을 가지고 아이들을 사랑으로 대하지만, 문제 상황을 영리하게 해결하지 못한다. 자신이 저지르지 않은 일인데도 미나토와 다른 아이들의 거짓말과 헛소문의 희생양이 된 후 학교 시스템의 꼭두각시가 되어 사태를 수습하려 하지만 결국은 폭력 교사로 낙인찍힌다. 미나토마저 엄마가 담임을 오해하게 만드는 꼬투리를 제공한다. 그 꼬투리는 사실 미나토가 좋아한 친구, '요리'의 아빠로부터 나온 대사였다는 것이 뒤에 나온다.
다시 관점이 바뀌어 미나토와 요리의 진실이 펼쳐진다. 요리는 학급의 남학생들로부터 집요하게 왕따를 당하는 학생으로 그 때문에 미나토도 요리와 가까워지기까지 여러 장애를 겪었다. 게다가 아빠로부터 지속적으로 '인간이 아닌 돼지의 뇌를 가졌다'는 가스라이팅을 당하여 미나토까지 혼란스럽게 하는, 어찌 보면 문제의 출발점이라 할 수 있다. 그 둘은 어떤 어른에게도, 심지어 또래들에게도 이해받지 못한 채 둘만의 세계에서만 자유로웠다. 결말이 너무나도 가슴 아프게 다가오는 이유다. 그 애들이 저지르는 모든 상황은 사실 어른들의 시선, 부추김, 취조, 의심, 오해 등으로부터 피하려다 거짓말이 이어지면서 생긴 결과들이다.
여러 인물의 처지와 관점에서 학교 폭력, 타인을 향한 선입견, 상처 치유 방식 등의 문제를 접근하는 전개가 낯선 방식은 아니지만, 솔기가 보이지 않는 편집으로 시종일관 긴장감을 유지하며 보게 되는 영화이다.
영화의 시작부터 도대체 누가 괴물이라는 걸까 하고 적극적으로 추리하며 따라가게 된다. 미나토와 요리가 아지트에서 하필 '괴물은 누구게?'라는 놀이를 한다. 현실의 담임, 교장 선생, 중간 관리자 선생들, 요리의 아빠, 미나토의 엄마, 미나토, 요리까지 모두를 다 의심케 하는 정황들이 나온다. 특히 교장 선생은 학교의 메뉴얼을 기계처럼 읊조리는 무기력한 인물이면서 비밀스러운 상처가 있다. 사건을 따라가다 보면 모두가 괴물이다. 그러나 점점 그가 아닌데, 아닌데 하게 되고 영화가 끝나갈 즈음엔 그들 모두는 각자의 이유가 있어 어떤 행동을 하였고, 그것이 가해 혹은 피해의 결과를 낳게 되었을 뿐임을 깨닫게 된다. 그들을 괴물로 의심한 내가 괴물이었다는 자각을 하게 되고, 어두운 극장에서 젠체하며 추리하느라 바빴던 나를 누군가가 손가락질할 것만 같다. 게다가 나는 요즘 어떤 이를 몹시 미워하고 싫어하였는데 그를 내가 괴물로 만든 것이 아닌가, 회한이 들었다.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영화를 <걸어도 걸어도>부터 찾아보게 되었다. <태풍이 지나가고>, <원더풀 라이프>, <환상의 빛>, <공기인형>,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 <바닷마을 다이어리>, <브로커>를 보았으니 감독의 필모 중 상당수를 본 셈이다. 감독의 영화 속 인물들은 각자가 처한 상황에서 최선을 다하지만 각자의 신념과 이유로 오해와 갈등이 빚어지고 파국을 향해 간다.
감독의 영화는 아주 섬세한 문제의식을 남기곤 하였다. <아무도 모른다>를 본 뒤의 충격, 죄책감은 몇 년이 지나도 좀처럼 사그라들지 않았고,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는 '너라면 어떤 선택을 할래?'라는 질문을 남겼다.
<괴물> 역시 불편한 진실을 직시하고, 내 안의 괴물 찾기부터 하라, 는 숙제를 남긴 영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