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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창창한 날들 Feb 05. 2024

그란해도 된당께(그렇지 않아도 돼)   

고모랑 동거하기 - 무안 시골살이 적응기




마중


겨울비가 스산하게 내렸다.   

고모는 아침부터 조카 친구들의 방문으로 신경이 쓰이시는 눈치였다. 거실 의자들에 산더미처럼 쌓인 옷가지도 치우고 온갖 것들이 놓인 서랍 위도 조금 치우셨다.

무심한 듯 냉동고에서 삼겹살을 꺼내어 싱크대에 올려놓더니 구워 먹든가 찌개를 해 먹든가 하자고 말씀하셨다. 고기를 싼 팩이 조금 뜯어진 채로 색깔도 싱싱해 보이진 않았으나 알겠다고 답했다.


고모는 창고에서 양배추를 한 통 꺼내다 싱크대에 놓은 후 오전 알바를 가셨다.

12월 말부터 오전에 '유칼립투스'를 다발로 묶는 알바를 하시는 고모는 그 일이 끝나면 게이트볼장으로 직행, 오후 시간 내내 놀다가 퇴근하신다. 

"참말로 천국이여. 그런 천국이 없당께."

고모가 게이트볼 세계로 입문한 기쁨을 표현하신 말이다.


고모가 나가신 뒤에 나는 후다닥 움직이기 시작했다. 고모가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만 집안 상태에 변화를 주자, 하는 마음으로.

 

숨기기 : 유통기한 지난 식품들이 들어 있는 박스들을 거실에서 창고로 내다 놓았다. 뚜껑을 딴 마요네즈를 냉장고 안쪽으로 숨겼다.


닦기 : 냉장고 내부 정리를 한 뒤 행주로 훔치고, 싱크대, 가스레인지, 식기건조대 주변의 묵은 때를 닦았다. 창고와 작은방을 제외하고(거긴 내 능력으로 어떻게 할 수 없는 지경이라서) 거실과 내 방을 쓸고 걸레질했다.


옮기기 : 젓갈 위에 흰 곰팡이를 걷어내 버린 뒤 남은 것을 깨끗한 밀폐용기에 옮겨 담았다. 그릇에 덕지덕지 양념이 묻은 나물과 멸치볶음을 새 그릇으로 옮겼다. (고모는 오랫동안 혼자 지내셔서 통째 열어놓고 음식을 드시는 습관이 있는데 그대로 내놓으실까 봐 미리 수를 썼다.)


나주 KTX역으로 달려가는 동안 머릿속은 염려와 불안으로 가득 차 있었다.

우리 고모가 이상하게 비치면 어떡하지.

개선의 노력을 하지 않은 나의 불찰 혹은 방관을 나무라면 뭐라 하지.

이럴 때 변명하고 해명할 생각부터 하는 비겁한 나를 탓하며.


친구들을 만나 나주 국립박물관, 나주읍성을 관광하였다. 

저녁은 집에 가서 먹기로 했다. 친구들이 고모가 좋아하시는 게 무엇이냐고 물었다. 과일을 사다 드리고 싶다고 하기에 집안에 먹을거리가 많다고 말렸다.


우리는 빵을 사다 드리기로 했다. 수연이가 빵 맛집을 검색했다. 집까지 가려면 꽤 돌아가는 길이어서 내가 무안의 아무 빵집이나 들르자고 했는데 수연이는

"이왕이면 드셔보지 않은 빵을 드리자."

하고 말해 나는 친구들에게 먹일 음식이 더 걱정되었다. 친구들은 큰고모께 드릴 빵까지도 샀다.

나는 두 친구에게 냉장고 근처에 얼씬도 못하게 해야지, 하고 다짐만 할 뿐이었다.


"강원도, 제주도를 주로 다녀서, 전라남도를 여행할 기회가 없었는데, 창창 덕분에 이런 곳을 달려보네. 흙 빛깔도 특별하고, 높은 산이 없는 게 왜 이렇게 신기하지."

"얘들아, 우리 고모가 유통기한 2년 지난 것도 막 먹자고 하신다. 내가 최대한 방어할게."

"어르신들 많이 그러셔."

"고모님이 걱정이지. 건강에 안 좋으실 것 같은데. 우린 하루만 자고 가니까 너무 걱정 마."

나를 원망하지도 않는 친구들이 고마울 뿐이었다. 

나주에서 무안으로 펼쳐지는 너른 들판길을 달리는 동안 친구들은 끊임없이 경탄했다. 

그래 나주, 무안 멋지긴 하지. 

그래 얘들아, 제발 내일 아침 식사까지만 참아라. 별일 없기만을 바라자.






#무안 #시골살이 #한달살이 #마중

#나주역 #나주 KTX #나주국립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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