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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창창한 날들 Feb 04. 2024

산이 없더라

#1. 남도기행, 낯선 풍경 속에 스치는 짧은 생각들


산이 없더라

- 민지(창창의 친구) 씀


목포행 열차가 익산을 지나 정읍쯤 달리자 창밖의 풍광이 달라졌다.

응당 구불구불 뻗쳐있어야 할 그것이 사라진 것이다.

옆자리 친구 연두(가명)를 부르며 소리친다.    

"저것 봐, 산이 없어졌어!!"

어려선 부모님을 따라 경부선으로, 강원도 출신 남자와 결혼 후엔 영동고속도로로 지겹도록 다녔지만 호남선과는 인연이 없던 터라 그 낯섦에 놀란다.

산이 없으면... 그러면 죄다 논밭이고 싹 다 평지여?  

이야! 말로만 듣던 나주평야의 지평선을 실컷 볼 수 있겠구나.


나주역까지 마중 나와 기다리던 창창의 차로 비 내리는 나주읍성과 논밭길을 달린다.

겨울들판이라 황량한 흙빛 세상일 줄 알았는데 아니다.

놀랍게도 반은 초록이고 반은 붉더라는, 놀라운 색감이었다.

보리싹과 양파모종, 월동배추들이 생생하니 정녕 제일 추운 1월인가 싶었다.

과연 남쪽나라는 따숩구나.

좁은 국토라 제주도나 되어야 다르지 했더니만 남도의 들녘은 부슬부슬 오는 겨울빗속에 강한 생명력을 파릇하니 지키고 있었다.

갈아엎어 맨살을 드러낸 흙들은 또 어찌 저리 붉을꼬.

철제대문을 초벌페인팅 하는 붉은색의 무엇(정확한 용어를 모르겠다)처럼 찐한 색감이다.

교과서에 실렸던 단편 <붉은 산>에서 만주를 떠돌다 죽은 '삵'이 마지막에 그토록 보고 싶어 했던 고향땅이 저런 색이었을까?

내가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었다면 미처 준비 못하여 허둥댔을 색감으로 펼쳐진 예상 밖의 나주벌판이었다.


10월에 심어 5월에 추수한다는 양파.
무안의 특산물 양배추를 모조리 뽑은 뒤엎어버린 땅.


산이 없고 낮게 가지 친 배밭 외엔 나무도 별로 없으니 시야가 확 트여 멀리까지 완만한 중에 유독 많이 보이는 것이 있었다.

무덤들.  

조금만 경사가 있는 높이면 여지없이 올록볼록 봉분 두어 개씩 자리 잡고 있다.

산소라는 말처럼 양지바른 산골짝에 선산을 마련하고 묻는 풍경에 익숙한지라 처음엔 인가 근처 밭에 모셔진 무덤들이 편치 않았다.

눈만 돌리면 집에서고 일하다가도 수시로 마주칠 무덤이라니 슬프거나 무섭진 않을까?

찜찜한 작은 무덤들이 사춘기 소년의 여드름마냥 눈에 거슬리는데 매일 보는 이들은 괜찮은 걸까...

아니다. 공원묘지에 부모님을 묻고 돌아보았던 골짜기 빼곡히 다닥다닥 무덤뿐인 풍경보단 이 모습이 더 편안하고 인간적인 것 같다.

본디 삶과 죽음의 경계는 시간의 흐름처럼 구분되지 않는 것이니 납골당이니 화장터가 혐오시설이 되어 멀리 두고 외면하는 것이 더 부자연스러운 짓이다.


너른 들판. 무안에서 지평선 느낌이 무언지 조금 느꼈다.
나주국립박물관에서 만난 옹관묘. 퍽 인상적이었다. 영상물을 보며 눈물도 나왔다.
국립박물관 주변 봉분들의 사계를 보여주는 영상물.


자연지리 수업(지리학과 출신)에서 배우기를 인구가 늘어나면 집들이 들어서기 좋은 땅이 바로 무덤이 있던 곳이라 했다.

조상들이 양지바르고 물 잘 빠지는 삭박면을 잘 골라 무덤을 썼으니 애써 찾을 것 없다며, 땅을 두고 산 자와 죽은 자가 경쟁한다 했던 교수 말씀이 생각났다.

산은 없고 흙이 붉으며 무덤이 친근한 들녘을 따라 빗길을 달리며 잠시 과거와 미래를 돌아본 시간이었다.




위 글은 고모 댁에 여행 와 준 두 친구 중 민지(가명)라는 친구의 글이랍니다.

저희는 2월 1일에 100일 글쓰기 시즌 9를 시작했어요. 민지는 대학 새내기 때 만난 친구이면서, 시즌 3부터 8까지 함께하고 있어요. 끈끈한 글정으로 더욱 돈독해진 글벗이기도 하지요.


평소에 민지는 글쓰기, 작가 되기에 창창만큼의 욕심이 없어요. 그래서 그런지, 글이 차분하고 정직하고 단아합니다. 

 글은 진지하지만 다른 글엔 유머와 위트까지 겸비하여 스멀스멀 웃게 만들며 웃게 만드는 그녀. 다음 날 그녀가 무슨 글을 올릴까 궁금해지게 만드는 매력덩어리예요. 우리 글 밴드의 인기 있는 작가이기도 하죠. 


민지가 인상적인 남도의 모습을 묘사한 글이 좋아서 여기에 공유해 봅니다.(브런치 작가 아닌 사람의 글은 올리면 안 된다는 그런 규정은 없겠죠.^^)

민지에게 공유 여부를 물었더니 역시 겸손하게 답하더군요.

"잘 쓴 글도 아닌데, 부끄럽게. 그래도 네가 좋다면 그래."

"고맙다. 민지야.^^"


<시골서 한 달 살아볼랑가> 브런치북이 예상과 다르게 서사 중심으로 흐르다 보니, 묘사하고 싶었던 그곳의 모습을 담지 못해 아쉬웠어요.

게다가 매일 연재하지 않으니 쓰고 싶은 이야기는 많고요.

이 모든 게 ENFP의 너무너무 P스럽고 충동적인 성향 덕분(탓?)이지만, 어쩔 수 없지요.

아무쪼록 독자분들께서 무안과 주변 지역에 대해 이해하시는 데 도움 되기를 바랍니다. 



* <시골서 한 달 살아볼랑가>는 매주 화, 금, 일에 연재합니다.

오늘 연재글 올려야 하는데 아직 마무리를 하지 못했어요.

오늘밤이나 내일 발행할 예정이니 양해 부탁드립니다.

편안한 일요일 보내세요.^^



#나주 #붉은흙 #기행 #무덤

#봉분 #남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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