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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창창한 날들 Feb 05. 2024

아따메 암시롱 않당께(아, 괜찮아)

고모랑 동거하기 - 무안 시골살이 적응기


마침내.


어두워져서야 집에 도착했다.

미남이와 쨍이가 미친 듯이 반겼다. 십여 년 개를 키워온 수연이 냄새를 알아보는 듯했다. 수연이에게 개 훈련법을 배울 생각에 나는 다시 신이 났다.


거실로 들어가니 고모께서 환한 얼굴로 맞아주셨다.

그런데 상이 차려져 있지 않았다. 워낙 손이 빠르고 맛나게 조리하시는 데다 지난 12월에 형제 분들 송년회 때 별별 음식을 차려주신 전적이 있으니 기대했는데. 고모도 막 귀가하신 듯했다.


수연이와 민지가 고모께 빵이 든 가방을 드리고 몇 마디 인사를 나눈 뒤 옷을 갈아입고 나왔다.

우리 셋은 고모가 텔레비전을 틀고 앉아 계시는 거실에 좀 앉아 있었다.

텔레비전을 틀어놓고 밥을 먹자고 하시는 겐가. 나는 친정에서도 밥 먹을 때만큼은 텔레비전 끄고 먹자고 모두에게 공표한 뒤 리모컨으로 툭 꺼 버리곤 하는 사람인데. 그것이 예의 아닌가.


지난 3주 동안 고모가 음식을 해 주시고 나는 상차림만 도왔으므로, 실질적인 조리를 해 본 적이 없었다. 양념도 어디 있는지 몰랐고, 뭐가 묻어 있는 양념통을 보는 것이 괴로워서 성역인 듯 그쪽은 가지도 않았다.

음식을 해 보려고 한 적은 있었는데,

"닌 글이나 써 야."

그렇게 말씀하는 고모에게 쫓겨났다.


그런데 고모가...

'현역가왕' 속으로 빨려 들어갈 듯 그곳에만 집중하고 계시는 거다.

원래는 재바르게 저녁을 준비해 주곤 하셨는데, 이 날은 일부러 그러는 듯 음식을 만들 생각을 하지 않으셨다.

'고모, 어떻게 좀 해 주세요. 왜 앉아만 계세요?'

내가 고모께 여쭈었다.

"고모, 김치찌개 해 먹을까요?"

고모께서 요리하시라는 건지, 내가 하겠다는 건지 모호한 질문이었다.

눈치 빠른 수연이가 "고모님, 저희가 할까요?" 하고 여쭈었고, 고모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악! 안 돼!

상상도 하지 않은 시나리오가 펼쳐지려 하고 있었다.

친구들을 부엌 근처도 못 가게 하려고 했는데 음식을 직접 하겠다니.

하긴 삼십 년 살림꾼들 오십 대 여자 셋이 모였는데 무얼 못하겠는가만은, 여기 살림은 내 영역이 아니라서 나도 안 해 본 음식이라고. 그런데 너희들이 하겠다고?

나는 예전에도 시엄니 댁에서 손이 얼곤 하던 덜떨어진 데가 있는 애라서 그럴 경우 머리가 멈춘다.


그런데! 다행히도 우리 두 친구들로 말하자면.

수연이는 노인을 상대하는 사회복지사라서 '노잘알(노인을 잘 알아)'이라는 자부심이 있는 친구인 데다 센스가 매우 발달했고, 민지는 6개월 사이에 부모님을 차례로 여읜 데다 어른 공경심이 큰 친구라서 내 걱정 중 반은 불필요했을지 몰라,라는 생각이 났다.


수연이가 가스레인지 쪽으로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수연이는 삼겹살을 썰더니 김치찌개를 끓이기 시작했다.

민지는 냉장실을 떡하니 열고는 반찬통을 꺼내어 접시에 담았다.

두 친구 다 얼굴을 찌푸리기는커녕 커다랗게 들리는 텔레비전 소리에도 아랑곳 않고 나지막하게 수다를 떨며 상차림에 집중했다. 그 사이에 어리바리한 창창은 방금 시집온 새댁처럼 우물쭈물거렸다.


수연 "창창아, 두부 사 온 것 좀 꺼내 줄래?"

민지 "양배추 썰어 놓은 게 있네. 마요네즈도 있을까?"

'아악! 마요네즈 없어! 아니 안 줄래!'


내가 답할 사이도 없이 고모가 냉장고를 열고는 안 보이네, 하시더니 창고에서 새 마요네즈를 꺼내다 상에 올려놓으셨다.

나는 민지에게 눈짓을 하며 유통기한을 슬쩍 보여주었다. 민지가 알았어 알았어하는 눈빛으로 봉투를 뜯었다. 난 눈을 감았다. 그래 아무 탈도 안 나기만 바라자.


수연이가 김치찌개를 두 그릇에 담아 상에 갖다 놓으라고 했다.

"나랑 민지랑 먹을게. 고모님 창창이랑 잡수세요."

'어? 둘이 둘이 먹으라고라고라?'

평소 내가 흉내내기 어렵게 청결 깔끔 왕 두 친구가 머리 맞대고 찌개를 퍼 먹기 시작했다. 집에 방문하면 개인접시에 정갈하게 상 차려 주는 아그들인데.

둘은 마요네즈 뿌린 양배추를 젓가락으로 잘 섞더니 젓가락으로 덥석덥석 집어 먹었다.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들이었다.


"와, 이 마요네즈 맛있네. 처음 먹어보는 건데, 이름 좀 알아가야겠다."

민지가 밥상 아래 놓인 마요네즈 포장지를 들어 보더니 생긋 웃었다.

"젊은 사람덜이 맹긍께 찌개가 아조 맛있네잉."

고모와 친구들은 현역가왕의 누구누구를 이야기 나누며 맛나게 식사했다.

"모름지기 텔레비전 보면서 밥 먹는 게 제맛이지."

수연이 말하자 민지도

"나도 텔레비전 안 켜놓고 밥 먹으면 허전하더라. 우리 어릴 때부터 그러지 않았니?"

하고 맞장구를 쳤다.

고모 신이 나서 가수들 신상을 들려주셨다. 김다현, 하이랑, 마스크걸, 마리아 등 고모는 동네 사람들의 조카들처럼 알고 계셨다.

나도 모르는 트롯 가수 몇 명을 친구들은 알고 있는 눈치였다.

"그래요? 아, 그랬구나."

하면서 고모 말씀을 흥미롭게 들었다. 나는 관심도 없는 트롯 가수들을.

그럴 줄은 몰랐다. 창창은 삼십년지기 친구들을 정말 몰랐다.

창창이 여전히 어리둥절해하는 가운데 웃음소리가 저녁 밥상을 채웠다.





독자 님들 안녕하세요?

저는 지금 안산에 돌아와서 이 글을 쓰고 있습니다.

지난 1월 31일에 아주 올라왔어요.

30일을 다 채우지 못하고 25일 만의 귀환을 하기에 앞서, 시골살이 연재를 시골이 아닌 데서 하는 게 맞나 고민했어요.

왠지 정직하지 않은 것만 같아서요.

과거형으로 쓰기로 하고 결국 올라오기로 결정했답니다.


아직 쓰고 싶은 얘기가 있어서 연재는 15화까지 이어질 예정입니다.

<시골서 한 달, 살아볼랑가?> 브런치북을 읽어주시는 독자님들께 다시 한번 감사합니다.^^



#마요네즈 #시골살이 #무안

#김치찌개 #삼겹살 #두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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