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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창창한 날들 Feb 06. 2024

친구들은 가고 나는 남았다

고모랑 동거하기 - 무안 시골살이 적응기

그림 한순화




"이틀 밤 여그서 자는 거제?"

첫날은 고모 댁, 이튿날은 목포에서 자고 서울로 올라가기로 얘기가 되었다고 말씀드렸다. 

"머더러(무엇하러) 돈을 쓴다냐. 여게서 기양 자믄 되제. 나는 일찍 자자네. 그라고 나믄 암 소리도 안 들레야."

나주에서 친구들에게 고모의 말씀을 전했을 때 친구들은 신중히 답했다.

"우선 하루 자고 난 다음에 결정하자."


친구들을 데리러 나갈 때 방 창문을 열고 나갔는데도 청국장 냄새는 빠질 줄을 몰랐다. 이런 방에서 자느라 두 친구의 여행 감성을 파괴할 수는 없었다.

"미안하다. 내일 숙소는 목포로 정하자. 이따 술 마시면서 예약하자."

"그래. 근데 이 정도면 심하진 않은 편인데."

"시골집 다 그렇더라. 농사 지으시면 집 관리하기 힘들어."

오, 바다 같은 마음을 지닌 나의 친구들아.


재바른 두 친구의 손길로 첫날의 저녁 설거지와 싱크대 정리를 신속히 마치고, 하이볼 만들 거리와 고모가 사다 놓으신 캔맥주, 마른안주를 준비해 방으로 가져다 놓았다.



우리가 소리 안 나게 움직이는 동안 고모는 이불을 깔고 앉아 일일드라마 '세 번째 결혼'을 틀어놓은 채 휴대폰으로 헥사 게임을 하고 계셨다.

고모께 인사하고 방으로 들어온 우리는 수학여행 온 소녀들처럼 킥킥대며 새벽까지 수다를 떠느라 냄새고 뭐고 잊었다.

   

"고모님 말씀대로 내일도 여기서 잘까?"

"뭐? 뭐라고? 냄새, 음식 다 불편할 텐데. 수연이 넌 어때?"

"응. 나도 좋아. 고모님 정도면 준수하신 편이야. 더한 어르신들 많아."

노잘알인 수연이 한 말이었다.


두 친구에겐 고모가 과묵하지만 다정한 분이라는 것, 청결 상태는 좋지 않지만 견딜만하다는 것, 특히 고모가 당신 세계에 몰입(게이트볼)해 계신 덕에 우리가 눈치 볼 일이 없다는 것이 하루 더 자기로 결정하기에 매력적인 조건이었다.


고모가 새벽에 알바를 가신 후 우리는 느지막이 일어나 아점을 먹었다.

계속 비가 내려서 움직이기 쉽지 않았지만, 어디라도 다녀와야겠어서 상의를 하던 중, 며칠 전 고모가 임자도에 데려가 주시겠다고 한 말씀이 떠올랐다.

"무안은 암것도 볼 것 읎시야. 임자도나 목포 쪼까 댕겨오면 쓸 거인디."

셋 다 '가 볼 만한 곳' 보다는 마음 가는 대로 여행하자는 데 동의하였다.


아점을 먹은 뒤 간식과 차를 준비하여 느긋하게 임자도로 출발했다.

한 시간쯤 달려 임자 1 대교, 임자 2 대교를 건너니 천일염을 만드는 염전이 펼쳐졌다.

붉은색 지붕이 많은 것도 신기했다. 4월이면 튤립 축제가 치러진다는 임자도의 특산물은 대파와 민어라고 했다.  

  

가는 곳마다 '1004'와 '천사'라는 간판이 눈에 띄었다. 섬의 개수가 1004개라서 그런 줄 알았는데, 나중에 검색하니 1025개인데 홍보를 위해 그렇게 정한 것이라 한다.

현수막이 유난히 많이 보였는데 방범대장, 동문회장 등의 취임을 축하하는 내용들이었다.

"여기는 작은 일에도 축하와 응원을 많이 보내는구나."

운전하느라 정신없는 내 뒤에서 민지가 말했다. 우리 눈에 들어오는 모든 게 이야깃거리가 되었다.


바다가 보이는 곳에 차를 댔다. 카페가 있었지만, 트렁크 열어 놓고 찬 바람맞으며 바다를 보기로 했다.

잿빛 하늘과 잿빛 파도가 하나가 되어 철썩이는 바닷가에서 뜨거운 차를 마시니 노곤해져서 수다 사이에 짧은 잠을 청하기도 했다.

"실은 무안에 여행 올 일이 없잖아. 임자도는 말할 것도 없고. 비 몰아치는 바닷가에서 카크닉도 하고, 상상도 못 한 새로움이야. 창창이 시골살이 덕에 우리가 혜택 본다." 



두 번째 밤에도 술상을 차렸다. 민지가 말했다.

"우리 수학여행 온 것 같지 않남? 느무 재미있었당께. 비가 계속 왔지만서도 카크닉도 하고 말여. 우리를 너무 편하게 해 주셔서 고모님 계신다는 사실도 잊었응께. 하하. 냄새는... 하하하."

그 순간 동시에 각자 옷에 코를 대고 킁킁댔다. 동시에 깔깔깔 웃었다. 우리끼리 있을 때가 아니고 외출했을 때가 문제였다.

"소리 줄이랑께!"

"괜찮여. 고모는 잘 못 들으신당께."

"서울 올라갈 때나 조심들 햐. 앞뒤 사람한테 민폐 주면 으뜩혀."

"시골 아줌니 코스프레 하며 올라가는 것이제."

우리 셋 다 얼마 전 드라마 '소년시대'를 재미나게 본 터라 충청도 사투리 쓰는 놀이에 재미들려 있었다. 게다가 무안에 온 김에 전라남도 사투리랑 마구 섞어 쓰며 시도 때도 없이 웃었다.

"한 번 무안하믄 되는겨."

또 깔깔깔. 무안 왔으니 무안 좀 하지 머, 이 말을 몇 번 하면서 웃고 다녔는지.


"그렁께. 나도 좋은디야... 개들 상태가 젤로 걱정되는구먼. 쨍이를 쇠사슬로 묶은 것도 그렇고, 처마 아래에 쨍이 집을 옮겨주시지 눈비 다 맞아서 어떡한당가."

수연이는 넓은 마당에 미남이와 쨍이를 묶어 놓고 기르는 걸 몹시 안쓰러워했다.

게다가 며칠 전부터 먹이고 있는 고양이 사료를 걱정했다. (마을 이장이 주문했다고 하던데. 나도 걱정은 됐지만 고모에게 문제 삼진 않은 건데 매의 눈으로 본 수연이.)

"쨍이는 생후 두 달이라 안 혔어? 아가한테 성견 사료를 먹이는 것도 좋지 않을 텐디, 캣사료라니. 탈 날 것 같어서 걱정이구먼."


삼일 째 되는 날 아침, 잠시 비가 갰다.

수연이가 미사 보러 갈 '압해도' 성당에 오전 미사를 언제 할지 문의해야 하는데 연락을 받지 않아 무조건 오전 10시까지 맞춰 가기로 하고 출발했다. 가는 길에 겨우 닿은 통화에서 11시에 시작한다는 것이었다. 선물처럼 시간이 생겼다. 우리는 깔깔거리며 차를 돌렸다.

비 때문에 하지 못한 바닷가 산책을 가기로 했다. 미남이와 쨍이를 데리고.


차에 짐을 실을 때 컹컹거리며 얼른 운동시켜 달라고 안달하던 두 녀석이 우리가 돌아온 걸 보고 얼마나 반기던지.  

십여 년 동안 개를 키워본 수연의 가이드 덕에 두 녀석과 안전하게 산책을 다녀왔다. 친구들 가고 난 뒤 미남이를 대하는 데 도움이 많이 되었다. 개를 무서워하는 민지는 뒤에서 우리 사진을 찍으며 따라다녔다.

고모 댁 주변을 비 때문에 걸어보지 못한 게 내내 아쉬웠는데, 단 한 시간이었지만 우리 셋에게 잊지 못할 추억이 되었다. 



이 친구들 목포의 빵 맛집을 검색해 고모의 선물을 또 사 주더니만. KTX 안에서 선물을 주문했다고 톡을 보내왔다. 쨍이의 목줄과 아기용 사료, 두 녀석이 먹을 간식까지.


민지 톡.

3일간 너무 편하게 잘 놀고 쉬었다 가네. 고모님과 창창의 넉넉한 인심에 감동이었어.


수연 톡.

고모님의 무관심한 듯한 많은 관심과 사랑을 가슴 깊이 받아 왔다.


목포역에서 친구들을 내려주고 무안으로 돌아가는 길, 해는 설핏 기울고 날이 차가워졌다.

압해대교를 달리는데 먼 데 작은 섬들이 쓸쓸해 보였다.

스산한 공기 탓인지, 친구들을 떠나보낸 허전함 탓인지, 감수성 짙은 성향 탓인지, 느닷없이 눈물이 흘렀다.





무안에서 쓰는 글과 안산에서 쓰는 글이 이렇게도 다를까요.

공간이 사람을 만든다는 말을 절감한 시골살이였어요.

게다가 오늘 글은 기억에서 희미해진 1월 하순의 일을 쓰느라 애 좀 먹었네요.

목포 여행도 기대 이상으로 좋았답니다. 

다음 기회에 소개하겠습니다.^^






#임자도 #1004섬 #신안군 #전라남도

#무안 #섬 #바다 #천일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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