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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창창한 날들 Feb 02. 2024

어쨔쓰까잉(이 일을 어떻게 하면 좋을까)

고모랑 동거하기 - 무안 한달살이 적응기

친구덜 놀러 오라게(놀러 오라 해).


무안으로 내려가서 이삼일 지났을 때 고모가 말씀하셨다.

"꺄악! 친구들까지요? 정말요? 고모 고맙습니다."

안산과 서울에 사는 여러 친구가 나의 시골살이를 부러워했지만 모두 부를 수는 없어서 가장 오고 싶어 하고 일정이 맞는 두 친구에게 연락했다.


노인 돌봄 관련 일하는 친구 수연(가명)과 시골살이를 꿈꾸는 친구 민지(가명)였다.

스무 살에 만난 우리는 재작년부터 매일 글쓰기 글벗으로 더욱 가까워졌고 많은 경험을 공유하는 사이다.

친구들은 1월 19일에 내려오기로 했다. 나주 KTX역으로 와서 함께 나주를 둘러본 뒤 고모 댁에서 하루 자기로 했다. 두 번째 밤은 목포 호텔이나 펜션에서 자고 서울로 올라가기로 했다.


시골살이도 색다른 경험인 데다 브런치북 연재를 통해 지지와 격려를 많이 받아서 신나는 하루하루를 보내며 설렘 가득 안고 친구들을 기다렸다. 친구들이랑 무얼 할지 즐거운 상상을 하며 나주, 무안, 목포에 여행할 장소를 찾아보기도 했다.


고모네 집 근처 카페에서 찍은 사진


친구들이 오기 이틀 전 고모가 창고와 냉장고의 식재료 몇 박스를 내놓으셨다. 마요네즈, 비벼 먹는 소스, 각종 비슷비슷한 종류의 먹을거리들이 엄청 많았다. 고모는 자연에서 난 것들로만 충분히 맛나게 드시는 분이라 이런 걸 쌓아만 놓고 드시지 않는 것 같았다.


유통기한 2년 지난 생면. 친구들 돌아간 뒤 이걸 끓여먹자 하셔서... 먹었다.


"오늘 저녁에 양배추에 뿌려 먹고, 친구들이랑 먹어라잉."

마요네즈였다. 양배추를 쪄서 먹는 게 조금 질릴 때여서 마요네즈의 느끼한 맛이 반가웠다.


그런데!

유통기한이 '2022년 1월 *일'이었다. 앗, 유통기한이 너무 많이 지났는데. 다른 것을 들어보니 심지어 '2021년'이었다. 상자에 들어있는 모든 재료들이 2년, 혹은 3년 전 날짜로 찍혀 있었다. 오 마이갓!


"괘차네(문제없어). 옥이(고모의 딸)도 질색을 하더만. 나도 묵고 게이트볼장에서도 묵는당께."


유통기한 몇 달 지난 냉동만두 따위를 드신다고 아버지께 성질부렸던 일이 생각났다. 어른들은 도대체 왜 이렇게 먹을거리 유통기한에 무감한 것일까. 게다가 아무렇지 않게 나에게 권하는 걸까.

고모 딸도 질색한다니 나만 유난스럽게 비치진 않아서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이 상황을 어떻게 모면할까 궁리하느라 머릿속이 복잡했다.


뚜껑 밖으로 기름이 줄줄 흐르는 두 개는 정말로 먹으면 안 될 것 같았다.

"고모, 이것들은 기름까지 밖으로 흐르는데 변질됐을 것 같아요. 저걸로 먹으면 안 될까요?"

'저것'도 유통기한 2년 지난 건 마찬가지였지만 안 먹을래요 할 수는 없고.


지금까지 고모네 집 냉장고에 있는 어떤 음식도 가리지 않고 먹으려고 노력해 온 내게 최대의 난관이었다. 약간 쉰 듯한 찐 양배추, 기분 나쁘게 변색된 육류, 밀폐용기가 제대로 닫히지 않은 무침이나 김치들, 유통기한 며칠 지난 우유, 허연 곱이 깔린 젓갈 등도 먹었다.


고모네 부엌 겸 거실


냉장고와 냉동고를 싹 뒤집고 버릴 건 버리고 정리해 드릴까 하는 마음이 하루에도 몇 번씩 올라왔지만, 어디까지나 고모의 생활방식이 있는데 내가 뭐라고 나선단 말인가.

"이런 방식으로 사시면 안 됩니다. 고모님 틀리셨어요."

그럴 자격은 없는 것이다.  


고모의 호의 덕에 터무니없이 저렴하게 시골살이를 하게 되었으니, 웬만한 건 고모에게 맞추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변질된 음식을 드시는 고모는 건강하시지 않은가. 소화도 잘 되고 잠도 잘 주무시고, 아무 문제 없이 잘 지내시지 않은가. 그래서 고모가 주시는 음식은 싫은 내색하지 않고 먹었다.

 

그랬다. 친구들이 오기 전까지는.

나는 눈 딱 감고 먹었지만 친구들에게 음식을 먹여야 하는 일이 발생하기 전까지는. (실은 무안살이 사나흘 지나면서부터 약속을 없앨까 몇 번이나 생각했다. 하지만 양측에 말할 이유를 찾지 못한 채 날이 흘렀다. 하루만 자고 갈 거니까 그 정도는.)


고모가 몇 상자나 되는 식재료들을 꺼내고, 내 눈으로 확인하기 전까지는.(그 식재료들이 어디서 왔는지는 밝히지 않겠다. 그쪽의 입장을 난처하게 하는 일이 될 수도 있어서.)

그것들이 내 위장에 들어가 어떤 일을 발생시킬지, 그보다 더 걱정되는 건 장이 약한 두 친구에게 혹시 탈이나 나게 하진 않을지.


무안 도서관에서 고모네 가는 길에 해넘이에 반해 멈춰서 찍은 사진. 먼 데 바다가 보인다. 예쁜 곳을 다 지나치고 난 뒤에 찍었다.ㅠ


이틀 동안 잠을 설쳤다. 어떻게 하면 고모네서 음식 먹는 걸 최소화할까. 혹시 먹더라도 유통기한 보이는 것들을 꺼내지 않게 할까.

방에 청국장 환 냄새가 난다고 친구들에게 미리 얘기했고, 환기만 신경 쓰던 터였다. 그런데 전혀 예상치 못한 난제가 닥쳤고, 나는 언제나처럼 슬기로운 대처 방법을 찾지 못하는 자신을 탓하고 있었다.

고모 마음도 다치지 않고, 친구들에게도 결례가 아니게 하려면 어떡해야 할까.


도와줘요. 뽀빠이


미남이, 쨍이와 산책하다가...



#무안 #음식 #식재료 #냄새 #친구

#시골살이 #한달살이 #고모 #동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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