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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창창한 날들 Feb 20. 2024

말이 가난한 이의 삶

순이 고모는 말하지 못했다 1


순이 고모는 과묵하다.

무안에 있는 동안 고모와 하루에 마디도 나누지 않고 지냈다. 말하기 좋아하는 내가, 대화 나누기 좋아하는 내가 그렇게 지냈다는 지금 생각해도 믿기지 않는다.

다른 고모가 한결같이 말을 잘해서 순이 고모의 과묵함이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던 나는, 유전자가 같아도 성격이 다를 수 있나 보다 짐작했을 뿐이다. 고모의 과거사를 듣기 전까진.


어느 날 저녁 밥을 먹던 끝에 고모가 갑자기 말을 쏟아낸 덕분에 듣게 된 고모의 과거. 날마다 천국을 살고 있다고 말씀하는 순이 고모의 무구한 얼굴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이야기였다.

"사람을 미워하는 건 지옥인디, 절대로 그라믄 안 되는디. 내가 딱 두 사람은 용서 모뎌. ** 아비(순이 고모의 전 남편), A 딱 그 두 사람 말이여. A는 무덤까지 갖고 가야 항께 너 그 글에는 쓰지 마라잉."  




순이 씨는 이십 대 초반에 무작정 상경했다.

집이 가난하여 초등학교를 겨우 졸업했을 뿐인 무안의 삶에서 희망은 없었다.

서울의 한 공장에 들어가 일하다 허우대가 멀쩡한 경상도 남자를 만났고 사랑에 빠졌다. 남자가 자기의 고향인 창원으로 내려가 살자고 순이 씨를 꼬였다.

"순이야. 내만 믿고 따라오라카이."


순이 씨는 키가 크고 힘이 좋아 무슨 일을 하든 자신 있었다. 창원에서 방 두 칸에 신접살림을 차리고 둘이 농사를 짓기로 했다.

해가 뜨기 전 시작해 캄캄해질 때까지 쉴 줄 모르고 일했지만, 번듯한 땅 한 마지기를 마련하기 힘들었다.

남자가 아무개의 소개로 원양 어선을 타게 된 것이 문제를 키웠다.

순이 씨가 바람날까 봐(늘씬하고 예쁘장하니까 얼굴값 한다고) 시댁으로 들어가 살게 한 뒤 남자는 먼바다로 떠났다.


전라도 여자, 늘씬하고 어깨가 벌어진 전라도 여자가 경상도 사람들 소굴에서 그것도 시댁에서 그것도 동서네 부부가 함께 사는 대가족의 틈바구니에서 남편 없이 살아남기란.

순이 씨는 인질이었고 볼모였으며 노예였고 찬밥이었다.

남편이 있을 땐 남편 뒤에 숨으면 그만이던 전라도 새댁은 시댁 어른들 층층시하에서 말을 해도 문제, 안 하면 더 문젯거리가 되었다.


남편이 원양어선을 타고 떠난 뒤 순이 씨는 첫아이를 가진 것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시댁의 모든 힘든 일은 순이 씨에게 맡겨졌다. 배가 불러온다고 봐주는 법은 없었다.

순이 씨는 장정이나 할 일도 척척 해냈다. 죽을힘을 다해 쌀가마니를 들었다.

"일 못 한다고 눈밖에 나면 쫓겨날까 봐 죽어라 했당께."


시할머니와 시모에게 아침 문안 인사를 여쭈고 부엌에 나오면 손윗동서가 눈도 마주치지 않았다. 동서는 부엌에선 순이 씨를 사람으로도 대우하지 않다가도 사람들이 있으면 언제 그랬냐는 듯 낯빛을 확 바꿔 과잉으로 친절했다.

"얼굴이 바뀌는 사람, 참말로 환장할 노릇이었어야."

순이 씨는 점점 입을 다물게 되었다. 말하지 않으면 문제가 덜 생겼고, 심각해지지도 않았다.




아고타 크리스토프의 <문맹>(백수린 옮김, 한겨레출판, 2018)을 2018년에 읽었다.  

작가의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이 내 책꽂이에서 좋아하는 문학 작품 1위를 차지하고 있을 때였으므로, 작가의 자전적 이야기인 <문맹>이 출간된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읽지 않을 수 없었다. 게다가 등단작부터 마음에 쏙 들었던 백수린 번역이라니.


<문맹>을 처음 읽은 2018년에는 '왜 나는 쓰고 싶어 하는 질병에 걸린 걸까' 그것만이 화두였다.

이번에 토론 모임이 있어 이 책을 다시 읽기 위해 책의 앞뒤를 훑어보는데, 김연수 작가의 말에서 순이 고모가 떠올랐다.


자기 자신을 이해하기 위해 글을 쓰는 사람을 생각한다. 그것도 뒤늦게 배운 외국어로. 그는 하고 싶은 말이 아니라 할 수 있는 말만을 골라서 쓸 것이다. 말은 가난해진다. 그리고 그를 둘러싼 세상은 단순해진다. - 김연수


아고타 크리스토프는 헝가리 혁명(1956년) 당시 조국인 헝가리를 탈출하여 스위스로 망명하였다. 스위스에서 공장 일을 하면서도 읽고 쓰는 일을 그만 두지 못한 그녀는 말을 처음 배우는 어린아이가 되어 프랑스어로 쓰기 시작했고, 드디어 작가가 되었다.


이 언어는 내가 선택한 것이 아니다. 운명에 의해, 우연에 의해, 상황에 의해 나에게 주어진 언어다.
프랑스어로 쓰는 것, 그것은 나에게 강제된 일이다. 이것은 하나의 도전이다.
한 문맹의 도전. - 113쪽 <문맹>


말을 잃어버린 사람으로 살아야 했던 여자, 순이 씨가 아고타 크리스토프처럼 생각됐다. 전라도 여자 순이 씨가 경상도 창원에서 자신이 잘 할 수 있었던 말을 입밖으로 꺼내지 않고 살았던 40년, 그러니까 14,600일, 다시 말하면 350,400시간을 나는 도무지 상상할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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