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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창창한 날들 Jan 24. 2022

홀로서기, 방점을 찍다 2

방심할 때 훅 치고 들어오는 사고, 인생의 변곡점



첫사랑이던 남편과 스물하나, 스물둘에 50만 원짜리 보증금에 월세 5만 원을 내는 임시가옥에서 함께 살기 시작했다. 삼십 년 동안 돈 버는 일을 멈춘 적이 없었다. 아이 낳기 일주일 전까지 출근했고, 초유만 겨우 뗀 신생아를 두고 다시 직장으로 나갔다. 이십 년은 직장인으로서, 십여 년은 자영업자로서 우리 둘은 성실하게 생계를 나누어 짊어졌다. 주어진 일을 열심히 하면서 살았고, 적당하게 익어간다고 믿었다.

막상 혼자가 되니 내가 할 줄 아는 게 없다는 걸 깨달았다. 결혼한 후 나 스스로 해결하고 책임지는 일을 점점 더 피했던 까닭이다. 특히 마흔하나에 몸과 마음을 제대로 추스르지 못할 정도로 깊은 우울증을 알았던 나는, 나를 살뜰하게 보살펴 주는 남편에게 너무 기대었다. 마침 학원을 함께 운영했으므로 24시간 동안 그와 나는 한 몸이었다. 남편은 한눈도 팔지 않았다. 집안일과 직장일, 하나부터 열까지 함께했고, 남자라고 빼는 법도 없었다. 학부모와 시부모에게서 방패막이가 돼 주었다. 헤어지기 전까지는 몰랐다. 그가 자기 몫의 이상을 해 내고 있다는 것을.

교통사고 등의 처리 역시 그가 나서서 해 주었다. 20년 운전하면서 사람을 다치게 하는 큰 사고를 낸 적은 없었는데 차량 접촉사고가 세 번 있었다. 그중 두 번은 우울증을 겪을 때였고, 남편은 몹시 불안해하는 나 때문에 해결사 노릇을 해 주었다.




혼자 지낸 지 일 년, 이렇게 살면 살아지겠구나 하고 몸도 마음도 조금씩 내 방식을 찾아가는 중이었다. 그런 지 얼마나 됐다고, 혼자라서 불안하고 두려운 일이 생기고 말았다. 어린애가 된 것만 같았다.


힐끔거리는 사람들을 뒤로하고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현관으로 들어서자 그대로 무릎이 풀려버렸다. 거실로 엉금엉금 기어가 구석에 기대앉아 소리 내 울기 시작했다.

그이라도 함께 있었다면 순리대로 해결할 방법을 찾아줄 텐데... 정황을 들어보고 잘못한 건 잘못한 것이고, 당신은 이것만 생각해, 하고 망상적으로 상상을 키우며 두려워하는 내게 안심하라고 말해줄 텐데... 피해자 분께도 어떻게 대해 드려야 할지 슬기롭게 처신하도록 조언해 줄 텐데...  

이제 어디에다 이런 일을 잘 처리하는 법을 물어야 하나.

남편부터 떠올랐지만 연락할 수 없었다. 지난 3월에 웬만하면 연락하지 말라고 당부했던 그의 말대로 연락한 적이 없었다.
1교시 학부모들에게 수업을 못한다는 내용의 카톡을 보냈다. 백신을 맞고 와 컨디션이 안 좋다고 둘러댔다. 경찰이 언제 부를지 몰랐기 때문에 우선은 시간을 두고 기다려야 할 것 같았다. 그러는 동안 울음이 쉴 새 없이 흘렀다.


보험회사가 어디더라. 얼마 전 휴대폰을 바꾼 탓에 주소록에서 찾아지지 않았다. 겨우 그 이름인 것 같아 연락하니 이미 해지한 회사란다. 그러고 보니 지금 내가 운전하는 차는 학원 운행 차량이었으므로 보험 처리 등을 죄다 남편이 했더랬다. 차량등록증 지갑을 들고 올라왔으니 그 안에 있을지 몰랐다. 30분 이상 연락처를 찾아내 겨우 사고 접수를 했다. 사고 처리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아무것도 모르는 것은 물론이고 차를 어찌 그렇게 무심하게 넘겨받았는지. 지난 몇 달 동안 말라 있던 눈물이 온몸에서 총출동했다.


어느 순간 내 뺨을 몇 번 때려 정신을 차리자고 스스로 경고했다. 내 신세한탄을 할 때가 아니야, 피해자 분은 마른하늘에 날벼락으로 멀쩡하던 몸이 다쳤는데, 그분이 혹 장애라도 생기면 어떡하니, 그분의 일상을 파괴해 놓고 울고만 있으면 안 돼.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지 알아보자.

친정 오빠가 생각났다. 오빠는 오래 운전한 사람이고 무슨 일이든 정직하고 책임감 있게 처리하는 믿음직스러운 사람이라 조언을 해 줄 것이다. 이럴 때 가족이든 아니든 남자를 떠올리는 내가 무력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오빠, 오빠한테 이런 이야기 하고 싶지 않았는데..."

다시 눈물이 비어져 나왔다. 오빠는 나를 진정시키고 차분하게 상황을 듣더니 주위에 알아보겠다고 말했다.

"이런 사고는 언제든 일어날 수 있어. 너무 자책하지 말고, 그분이 크게 다치지 않았기를 빌자."

오빠는 상황이 변경될 때마다 오빠 입장 생각지 말고 연락하라고 했다. 남편에게 말했는지도 조심스레 물었다. 안 했다고 하니 한숨을 쉬며, 아들에게는 말할 건지 물었다. 안 할 거라고 했다. 아들네서 나온 지 5분 만에 일어난 사고였는데, 아들에게 말하기 주저됐다. 우는 목소리로 미숙한 엄마를 드러내기 싫었다. 오빠는 가해자가 할 수 있는 건 별로 없으니 우선 잘 자라고 당부했다.


오후 5시 팀 학부모들에게 카톡을 보냈다. 지난 추석 연후에 수업을 못한 데다 이번까지 포함하면 회비가 덜 들어올 것이었다. 얼마 전 인근 초등학교에 확진 학생이 많이 나온 바람에 온라인으로 수업한 학생들도 있는 데다 분위기가 흉흉하던 때였다. 그래도 어쩔 수 없었다. 경찰서에 언제 가야 할지 몰랐고, 아이들을 대면할 자신도 없었다. 범죄를 저지른 것만 같아 수치스러웠다.  

급박한 상황이 생겼을 때 연락할 상대가 남편이 아닌 오빠가 되는 날이 오리라고 상상해 본 적이 없었는데.

우리 오빠, 자기 가정뿐 아니라 혼자되신 친정아버지를 살뜰히 보살피고, 친정의 모든 일을 나서서 처리하느라 고달픈 사람인데, 내가 어쩌다...




어릴 때부터 병은 소문내라는 말을 진리로 여기며 살아온 자세가 내게는 주로 긍정적 강화가 된 것 같다.

오빠에게 전화한 이후 거실에 웅크린 채 울다가 멍하니 있는데 L로부터 전화가 왔다. 액정화면에 보이는 L의 웃는 표정에 또 눈물이 났지만 전화를 받았다. 상황을 다 들은 L은 피해자 분을 걱정하며 그나마 더 큰 사고가 아니어서 다행이라고 했다. 그 동생은 전에 함께 일하던 동료였고, 나와는 친자매처럼 지내는 사이였다. L은 경찰 제자에게 연결하겠다고 했다. 직접적인 도움을 받지 않더라도 대처법이라도 들어보자며.

그렇게 해서 제자 R이 조언해 주기 시작했다. R은 내가 가르치진 않았지만 그의 친구들과 함께 우리 집에 두 번인가 놀러 와서 친근함이 있는 사이였다. 그래도 그 친구에게 연락할 생각은 하지 않았다. 워낙 법대로 처리하려는 친구라 지인 찬스 같은 일이 그를 불편하게 할 것 같아서였는데, L의 권유 덕에 통화를 하니 R은 가족에게 하듯 자기가 아는 것만 일러줄 거라고 했다. 무엇보다 피해자 분의 심기를 불편하게 하면 안 된다고 했다. 최대한 그쪽의 처지를 배려하는 마음으로 언행을 삼가라고.


L, R과 연이어 통화를 끝낸 뒤 S로부터 카톡이 왔다. 중간에서 만나 걷자는 것이다. 일주일에 두어 번 함께 만나 걷는 언니인데 내가 이러저러한 상황이라고 답 톡을 보냈더니 언니는 당장 전화를 걸어 우리 집으로 오겠다고 했다. 승용차가 없는 언니가 오기엔 교통편이 안 좋은 곳인데 전화를 끊은 언니는 30분도 안 돼 달려왔다. 집으로 들어온 언니를 보니 또 울음이 터졌는데 언니는 청심환을 열어주며 우선 마시라고 내밀었다. 웃음도 나고 고맙기도 하고.

언니 역시 피해자의 안위부터 걱정하는 동시에 나를 토닥였다. 최대한 그분이 덜 다쳤기를, 내일 아침 되면 더 아프겠지만 평소에 건강을 잘 유지해 와서 큰 충격파에도 견딜 수 있는 분이기를, 온 마음으로 기도하자고 했다.

 

내 주위의 모든 이들이 그분의 무사안일을 위해 기도해 주니 내가 겪는 후회와 자책, 돈 걱정, 평판 걱정 등의 심리적 고통은 사그라들고 나 역시 오로지 그분이 무사하기를 비는 마음이 되었다.

언니가 함께 자고 가 줄까 물었으나 괜찮다고 했다. 그날 밤에 중2 학생들의 온라인으로 시험 보충을 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언니는 마음이 놓이지 않았는지 남편에게 연락하라고 권했다. 경찰서에 스스로 운전해서 못 갈 텐데 운전도 해 줄 겸 밤에 함께 있어달라고 해 보라는 것이었다. 내가 망설이자 아들에게 먼저 연락해 제 아버지에게 연결하게 하면 어떻겠느냐 물었다. 내 마음에서 이미 그러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아서 언니의 말에 용기를 내 아들에게 톡을 보냈다.

얼마 뒤 아들로부터 전화가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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