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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를 생각하는 나의 자세

책, 돼지가 한 마리도 죽지 않던 날

by 창창한 날들




아버지를 사랑한다고 생각한 적이 없었다.

내게 아버지는 엄마를, 우리 형제를 가난 속에서 고생만 시킨 민폐 가장일 뿐이었다.

성실하게 일했지만 실직을 앞둔 어느 날부터 노름에 손을 댔고, 수 천의 손해는 고스란히 엄마와 오빠네 부부의 짐으로 얹히게 됐다.

정신을 차린 아버지는 출근길에 다리를 다쳐 퇴직할 때까지 이십 년 가까이 기업체와 아파트의 경비로 성실하게 일했다.

하지만 그전에 우리 세 남매는 성인이 되었고, 물질적 지원을 받았다면 순전히 엄마의 노동 덕분이었다.

엄마와 소통하는 동안 아버지의 이미지는 엄마를 총대 매게 한 회피자였고, 비겁자였다.




<돼지가 한 마리도 죽지 않던 날>의 주인공 소년 로버트는 아버지의 장례식 날 상주로서 예의를 갖추고 싶은데 그럴 수 없는 경제적 상황 때문에 참고 참았던 울음을 터뜨린다.

"하느님, 왜 이렇게 가난해야 합니까? 사는 게 지옥 같아요."

유일한 보물이자 친구로서 키우던 돼지 핑키까지 제 손으로 죽여야 했던 로버트가 처음으로 울분을 표출한 장면이었는데, 인생이 참으로 모질다 싶었다.

그런데 장례식에 참석하리라 생각지 못했던 이들을 맞으며 로버트의 마음이 바뀐다.


마지막으로 클레이 샌더 사장님이 아빠랑 일하던 동료들과 함께 찾아왔다. 그날 하루만큼은 모두들 일손을 놓았다. 돼지가 한 마리도 죽지 않는 날이었다.
아빠 동료들이 찾아와서 반가웠다. 더러는 나보다 더 볼품없는 옷을 입고 온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그래도 찾아온 거다. 아빠를 묻는 일을 도와주려고 왔다. 아빠를 존경하고 존중하기 때문에 찾아왔다. 좁은 집에 사람들이 꽉 들어찬 걸 보니까 아빠도 좋아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빠는 부자가 아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가난하지도 않았다. 아빠는 언제나 당신이 가난하지 않다고 말했다. 그렇지만 나는 그 말을 농담으로 받아들였다. 그런데 과장이 아니었다. 아빠는 많은 것을 가지고 있었다. 정말 그랬다.
<돼지가 한 마리도 죽지 않던 날>/로버트 뉴턴 펙/사계절/ 148쪽


로버트의 아버지는 헛간에서 짚단으로 손수 만든 침대에서 자다가 세상을 떠났다.

가난하지만 누구에게도 기대지 않는 삶을 살았던 아버지는 가족의 곁을 고요히 떠난다.

로버트는 때론 갸웃하고 때론 도망치고 싶고 때론 화가 났지만 '가능하면 침묵을 지켜라'라고 말한 아버지의 가르침을 조금씩 이해하게 되었다.

아버지의 말대로 아버지가 가난하지 않았다는 의미도 알게 되었다.

아버지가 십삼 년 동안 보여준 삶의 자세는 로버트에게 큰 유산이 될 것이다.


"하루 일이 끝나면 씻고 또 씻는데도 돼지 냄새가 좀처럼 떠나질 않아.
그래도 네 엄마는 조금도 불평하지 않았어.
이렇게 오랜 세월이 흐르는 동안 단 한 번도 내 몸에서
지독한 냄새가 난다는 말을 한 적이 없단다.
언젠가 내가 엄마에게 미안하다고 말한 적이 있지."
"그러니까 엄마가 뭐랬어요?"
"엄마가 말하길, 나한테서 성실하게 노동한 냄새가 난다더구나.
그러니 창피하게 여길 필요가 없대."
<돼지가 한 마리도 죽지 않던 날>/로버트 뉴턴 펙/사계절/ 146쪽


위 문장만으로 <돼지가 한 마리도 죽지 않던 날>에서 넘치는 선물을 받은 것 같다.

사랑하는 아내에게 좋은 향기를 주고 싶은 아버지와 그것이 어떤 냄새든 성실하게 일한 사람임을 알아보는 태평양 같은 엄마의 마음이 느껴져 고개가 숙연해지는 대사다.

'성실한 노동의 냄새'는 이 책 전체를 관통하는 작가의 철학이자 믿음이다.

주인공 소년 로버트의 아버지는 자신과는 다른 사람이 되기를 바라서 가난 속에서도 아들을 학교에 보냈다.

하지만 아버지야말로 삶을 치열하게 살아낸 사람에게만 배어 있는 향기를 지녔다.

로버트는 그런 아버지를 존경한다.

이 책은 아버지들 이야기이자 아버지에게 헌정하는 아들의 뜨거운 편지이다.




아버지를 다른 존재로 바라보게 된 건 엄마가 우리 곁을 먼저 떠나고 난 뒤였다.

아침저녁으로 엄마의 영정사진에 인사하는 아버지, 성실함의 대명사인 엄마의 삶을 존경한다는 아버지, 자식들에게 손을 벌리지 않으려고 애쓰되 생색내지 않는 아버지, 자신의 삶을 꿋꿋하게 홀로 일구어 가는 아버지, 우리 형제의 말을 귀 기울여 들어주는 아버지, 전화기 너머에서 긴 통화를 하고 싶으나 기대를 티 내지 않는 아버지...

이제야 아버지를 선명하게 알아가고 있는 것 같다.

특히 내가 남편과 헤어진 이후에 아버지는 또 다른 모습으로 다가왔다.

"저희 헤어져 살기로 했어요. 그 사람이 혼자 살아보고 싶대요."

아버지는 세 남매 중 부부 사이가 가장 좋았던 우리 커플의 말도 안 되는 결정을 담담하게 듣더니 "너희가 그렇다면 그래야지." 하고는 그뿐이었다.

딸과 사위의 상처가 더 깊어지지 않도록 조용히 그 일을 덮은 거였다.

당신의 위신과 사회적 시선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언급하지 않았다.

아버지는 침묵으로 내게 이렇게 말했다.

"네 삶을 스스로 개척하고 책임지면 돼. 이제 그 기회가 제대로 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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