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삶이 유예되는 곳

<깨끗하고 불이 환한 곳> 어니스트 헤밍웨이

by 창창한 날들




책을 읽는 안경 쓴 내 모습을 너는 참 좋아해 주었어.

이른 아침부터 머릿속 돌풍을 껴안은 채 글 쓰느라 노트북 앞에 앉은 모습도.

조금 늦게 일어난 네가 글 쓰고 있는 내 곁에 다가와 묻지.

"따끈한 차 갖다 줄까?"

"뭐 먹을 것 좀 줄까?"

나랑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서 그런다는 걸 아는 나.

우리가 차를 마시기 시작하면 두 시간은 훌쩍 흘러가 버리곤 해.

원고 한두 장을 쓸 수 있는 시간인데... 이야기를 나누면서도 마음은 조급해져.

오후 시간부터 공식 업무를 시작해야 하니까 점심 먹기 전까지 글 쓰는 시간을 확보하려고 내가 무진 애를 썼던 것 알고 있지?

어느 날부터 네가 일어날 아홉 시가 되기 전 후다닥 짐을 싸서 집을 나서기 시작했어.

내 뒤에 박힌 너의 시선, 그것을 모른 체하고 소설을 쓰러 달아나곤 했어.

너랑 나누는 이야기 시간을 줄여야 내 소설이 나올 테니까.

그때는 너와 함께하는 시간이 언젠가는 끝나리라는 걸 상상한 적이 없었어.

자주 그래 왔듯 잃어버려야 소중함을 깨닫는 어리석은 나니까.

"꼭 카페에 가서 글을 써야 해?"

카페에 들이는 돈 걱정하느라 꺼낸 말이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그땐 그런 말도 야속했어. 변명을 늘어놓지.

"도서관에서도 글을 써 보았지만, 카페만 한 곳이 없어. 깨끗하고 분위기 좋은 카페를 찾아 노트북을 켜 놓고, 개입하지 않는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기 시작하면 어느새 목표한 일에 몰입하게 되고 속도가 붙거든."

"그럼 내가 개입할까 봐 도망가는 거야?"

앗. 들켰다. 내 눈에 넌 이미 기분이 조금 언짢아 보였어.

"오늘은 어느 카페에 가서 쓸 거야? 차 원 샷 하고 가. 아니다 가서 마시는 거지. 어서 가."

현관 앞에서 나를 안아주는 너를 뒤로 하고 나오면서 중얼거려. 두세 시간 뒤에 들어올 건데 왜 저렇게 포옹을 그윽하게 한담. 멀리 떠날 것도 아닌데.


너한테도 읽어 준 <깨끗하고 불이 환한 곳> 기억나? 그래. '좀머 같은 노인'이 나오는 카페 말이야.

소설을 잘 안 읽는 네가 문득 마음을 활짝 열고 귀를 기울일 때가 있지. 그날은 내가 어떤 도입의 말을 했기에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무척 짧은 소설이라고 꼬였는지, 읽고 난 후 네가 와인을 마시자고 했던가.


한 카페에서 늦은 밤 한 노인이 브랜디를 마시며 귀가 시간을 늦추고 있어.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길 수 있는 밤, 깨끗하고 불이 환한 곳이야.

두 웨이터는 퇴근할 때를 기다리고 있어. 노인이 계산을 하고 돌아가야 퇴근할 수 있거든. 두 웨이터가 노인을 대하는 시선을 보면 청년과 중년 같은 느낌이야.

젊은 웨이터는 새벽 세 시까지 집에 갈 생각을 않는 노인의 루틴 때문에 그 시간을 견뎌야 하는 게 참을 수 없이 지루했어.

나이 많은 웨이터는 노인이 며칠 전 자살을 시도했다 조카의 발견으로 살게 됐다는 말을 젊은 웨이터에게 전해 주었어. 젊은 웨이터는 말하지.

"저 노인네가 지난주에 자살에 성공했어야 했는데. (중략) 어서 집에 가 줬으면 좋겠어요. 일을 해야만 하는 사람들을 배려할 줄 몰라." -127

젊은 웨이터에게 노인은 자신의 퇴근을 미뤄지게 하여 아내와의 속살거림을 방해하고, 잠을 못 자게 하는 귀찮은 타인일 뿐인 거야. 그의 나이는 중년은 물론 노년까지의 거리가 아주 멀어서 그들의 삶과 의식에 닿을 만한 사유가 없는 거지.

어떤 시나 단편의 문장들을 읽어 주면 너는 뜻밖의 생각을 꺼내 놓기도 했어. 이 소설에도 넌 의외의 반응을 했지.

"죽지 않으려고 나간 거야. 좀머 씨처럼. 강렬히 살고 싶은데 살 수 없으니까."

한때 나와 다른 친구들과 함께 독서 토론 모임을 하며 읽었던 '좀머 씨 이야기'를 네가 좋아했단 걸 떠올렸지. 좀머의 의식 세계를 감히 짐작할 수 없었던 내게 좀머를 바라보는 너의 시선이 신선했던 기억. 넌 공대생이고 난 소설 짱인데, 자존심이 건드려지는 너의 발언은 오래도록 내게 남았거든.

"좀머가 죽지 않았다면 늙어서 저 노인이 됐을지 모르겠군."

그래 와인 맛이 탐탁잖은지 네가 인상을 쓰며 말했구나.


젊은 웨이터는 브랜디를 흘린 노인을 타박하며 평소보다 30분 일찍 귀가시키는 데 성공하지. 나이 든 웨이터는 30분이 뭐라고 좀 놔두지 그랬냐면서 말해.


나는 카페에 밤늦게까지 앉아 있고 싶어 하는 쪽이야.
잠들고 싶지 않은 그 모든 사람 가운데 하나이고, 밤에 불을 켜 두어야 하는 그 모든 사람 가운데 하나이기도 하지. (중략)
매일 밤 나는 카페 문을 닫는 게 망설여져. 혹시 이곳이 필요한 사람이 있을까 봐. (중략)


젊은 웨이터는 '보데(술집)'가 있잖느냐고 대꾸하지. 나이 든 웨이터가 퇴근길에 잠깐 들르는 곳이었어.


이해 못 하는군.
여기는 깨끗하고 쾌적한 카페야.
또 불이 환하지.
빛이 아주 좋고, 게다가, 이제는 나뭇잎 그림자도 있어. 131쪽

돈 많은 노인이 밤마다 저택을 놔두고 카페로 나와 홀로 술을 마시는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관여하지 않는(않으리라 믿는) 웨이터들의 시선이 있으며 ‘약간의 깨끗함과 질서가 있는’ 카페에서 노인의 절망과 자살은 잠시 유보되었을까.

나이 든 웨이터는 젊은 웨이터를 보내고 혼자 생각해.


그는 뭘 두려워하는 걸까? 두려움이나 걱정은 아니었다. 그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허무였다. 모든 게 허무였고, 사람 또한 허무였다. 다만 그것뿐이었기에. 필요한 것은 오직 빛, 그리고 약간의 깨끗함과 질서뿐이었다. 어떤 사람들은 그 허무 안에 살면서도 결코 그것을 느끼지 못했지만, 그는 그 모두가 나다(허무) 임을 알았다. 131~132쪽


'그'가 노인인지 나이 든 웨이터인지 누구를 지칭하는 건지 몇 번을 읽어. 이럴 땐 원작으로 확인하고 싶지만, 정영목 번역가도 헤밍웨이가 쓴 대명사가 지칭하는 대상의 모호함을 언급했으니, 다양한 상상을 하라는 뜻인가 보다 했어.


헤밍웨이에게 말이 완전히 사라지고 행동만 남는다기보다는, 있어야 할 것 같은 말이 아예 생략되거나 대명사로 대체되고 기존의 언어는 아직 말이 되지 못한 것들로 진입하는 우회로 역할만 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뜻밖에도 헤밍웨이의 소설, 특히 단편들은 분명하기는커녕 모호하며 다양한 해석의 여지를 남긴다. (옮긴이의 말 중)


나이 든 웨이터의 말대로 젊은 웨이터는 젊음, 자신감, 일자리를 다 가졌어. 자신의 쉼과 행복이 더 소중하고 보장받아야 한다고 믿고 있어.

이 소설이 쓰인 때가 1933년이야. 헤밍웨이는 이 소설의 젊은 웨이터를 자신의 젊은 시절, 나이 든 웨이터를 중년인 현재, 노인을 미래의 모습으로 본 것이 아닐까. 나이 든 웨이터는 노인이 허무에 잠식 당해 스스로 목숨을 끊지 않도록 지켜주는 헤밍웨이 자신이기도 한 거지.


때때로 아무런 관계도 아닌, 혹은 가깝지 않은 사람에게서 삶의 위로를 받을 때가 있잖아. 처음 받은 포춘쿠키를 망설임 없이 지인에게 건네는 손길에서, 자동차 바퀴의 펑크를 수리받는 동안 탁자와 의자를 내어준 떡볶이집 아주머니에게서, 산책로에서 몇 번째 마주친 이가 건네는 “안녕하세요”에서, 쌀쌀맞다고 느낀 빵 가게 여주인이 “요즘은 어떠세요?” 라며 서로의 안위를 묻는 미소 따위에서 말이야.

소설 속 노인은 나이 든 웨이터의 눈빛에서 그런 위로를 받았을 것 같아. 누군가 나를 지켜봐 주는 사람이 있으며, 숨 쉬고 있는 나를 미워하지 않아도 된다. 술기운에 잠들어 다음 날이 되면 다시 카페로 가게 되는 루틴은 그의 하루를 더 잇게 했던 거지.


그럼에도 헤밍웨이는 엽총으로 생을 마감했어. 노인과 바다》에서 '패배는 있을 수 없다. 파괴만 있을 뿐'이라고 했던 것처럼 스스로 파괴하는 결말이었던 걸까.

헤밍웨이가 머무는 곳 어딘가의 카페에 나이 든 웨이터 같은 존재가 있었다면 헤밍웨이의 삶은 좀 더 유예되었을까.


지금은 카페에 가지 않아.

나이 든 웨이터의 시선은 없지만, 개구리와 매미 소리가 가까운 이곳은 깨끗하고 불이 환한 데다 숨이 자유로운 나의 집이고, 나는 아무 때나 글과 씨름하거나 놀 수 있거든.

너는 요즘도 화이트 와인을 즐기는지.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