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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이 된 아들과 그림책 보기

<삶의 모든 색> 리사 아이사토

by 창창한 날들




그림책 사랑이 무한한 친구가 있다.

올해 이월 함께 산길을 걸으며 올해는 뭐하며 놀까, 즐겁고 유익한 일이 뭐가 있을까 하고 이야기를 나누다 전국의 그림책방을 탐방하기로 한다.

나는 그림책 볼 줄을 몰라 운전을 자처하여 동행하는 즐거움만 맛보기로 하였다.

그림책 좋아하는 몇 친구를 청하여 동행하였다.

매월 마지막 주 일요일에 당일로 떠나는 여행에서 책방 견학, 그림책 한 권 이상 사기, 그 지방의 맛난 음식 먹기, 산책 등이 기본적인 일정이다.

삼월에 당진의 그림책방 '오래된 미래'를 찾았다.



그곳에서 내 인생 처음으로 소장하고 싶은 그림책을 발견했다.

요람에서 무덤까지 다채로운 색으로 표현된 이 책은 단번에 나를 사로잡았다.

노르웨이의 일러스트레이터이자 예술가인 리사 아이사토는 이 작품으로 2019년 노르웨이 북셀러 상을 수상하였다.


[삶의 모든 색] 리사 아이사토 지음/김지은 옮김/200쪽/38,000원/길벗어린이



늦도록 환한 여름 저녁,
들판 가득 핀 민들레를 만지면 묻어나는 진액의 끈끈한 감촉을 기억하나요?



그 시절의 어느 날, 우리는 무적이었고
어느 날에는 다치고 상처를 입었어요.
때때로 세상은 불공평했고
그래서 우리는 싸워야 했어요.



하지만 당신이 그 시절에 사랑받았다고 느꼈으면 좋겠어요.



누가 좀 가르쳐 주면 좋겠어요.
이 힘든 아침을 어떻게 하면 좋을지
낮에도
밤에도
하지만 자초한 일인 걸요. 대가를 치를 수밖에 없어요.



우리는 자신의 새로운 면을 보게 될 거예요.



아이들이 떠나고 나면 우리는 더 가까워질 수도 있겠지만
지옥으로 떨어지게 될지도 몰라요.
다른 누군가를 다시 찾아다니고, 새 사람을 만날 수도 있어요



혼자서 노를 저어갈 수도 있겠죠.



이제 연금 수령자들의 노랠 불러야 해요.
낯선 일이지요.
마음은 아직 스물두 살인걸요.



어느 순간, 몸이 뜻대로 되지 않아 속상할 수 있어요.
어쩌면 그동안 있었던 일들을 모두 잊어버릴지도 모르지요.
외로울 거예요.



삶의 모든 순간,
당신이 사랑받았다고 느꼈으면 좋겠어요.


친구가 나를 콕콕 찌르며 아름다운 그림책 세상에 함께 가 보자고 청할 때 오랫동안 눈과 귀를 막았다.

'그림책에서 내가 얻을 건 별로 없는 것 같아. 소설만 읽을 테야.'

그 친구는 모든 것의 중심에 그림책을 두고 있다. 그런 친구가 때로 부러웠다. 맹목에 가깝게 사랑할 수 있는 대상이 없던 나는 친구의 그림책 사랑에 샘이 났던 것 같다.

언젠가부터 그런 '나'라는 옹벽에 조금씩 균열이 가기 시작했다.

친구가 고집스레 밀고 들어왔다면 더욱 단단하게 쌓아 올렸을지 모르는 옹벽이지만, 그 세계를 오롯이 즐기고 사랑하는 친구의 찐사랑 덕분에 비로소 나는 그림책 맛을 살짝 보기에 이르렀다.


이 책에는 특별한 서사가 없다.

모든 이가 주인공이고 모든 인생이 특별하다.

삶의 모든 순간은 때로는 따스한 빛깔로, 때로는 기괴하고도 어두운 빛깔로 채워지지만,

헛된 순간이 하나도 없다.

그림 속 빛깔들에 넋이 나가 보게 된다.

사랑하는 이들의 모습이 남과 여, 남과 남, 여와 여 등으로 다양하게 표현되는데, 작가가 편견 없어 세상을 바라보고 있음을 느끼게 한다.

위트 있게 표현된 순간들도 있어 스르르 웃게 된다.

기억을 잃은 이가 눈길을 걸어가는 모습처럼 처연한 장면들도 있다.

시와 같은 문구를 읽노라면 먹먹함을 이기지 못하기도 한다.




아들이 밤참을 먹자고 찾아온 밤, 이 책을 보여주었다.

아들은 몇 장면에서 눈시울을 붉혔다.

아들 역시 그림책의 맛을 잘 모른다고 했지만, 이 책 덕분에 아들이 기억하는 최초의 순간, 학창 시절 비밀스러운 일들, 엄마와 아빠를 어떻게 기억하고 있는지, 그때의 조부모가 지금은 병약해진 모습이 되어 버린 것, 내가 미처 모르고 있던 아들의 시간에 대해 들을 수 있었다.

그림책 덕분에 공동의 추억을 길어 올리기도 했고, 각자의 기억을 이어보기도 했다.


나처럼 그림책을 가까이할 기회가 없던 이들도 <삶의 모든 색> 소장할 만하다.

덕분에 주위의 고마운 분들께 선물하기도 했다.

그 분들이 어느 날 무심코 책장의 아무 곳이나 펼쳐 자신과 가족, 친구의 삶의 모습을 떠올리며 웃음과 아픔과 슬픔과 기쁨을 떠올리기를.

묵혀두었던 가슴 속 이야기들을 나누어 보기를.


지난날을 누가 흑백이라고 했을까.
이 책은 당신의 모든 삶이
찬란한 색이었음을 보여준다.
살아갈, 살아가는,
살아온 사람들을 위한
존경의 기도가 담겨 있다.
- 김지은(아동문학평론가) 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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