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오늘도 울고 있는 모든 나를 돌보는 이야기

고정순 작가를 만난 여름 이야기

by 창창한 날들

<가드를 올리고>(고정순, 만만한 책방)에서




작년 유월, 도서관에서 주최한 [그림책 작가 양성 교실]에 참여했다.

그림 초보자들을 대상으로 책으로 엮기까지 멘토가 돼 준 박선미 작가가 '고정순' 그림책 작가를 특강 강사로 초대했다.

시인과 그림책 작가 몇 분을 만나 본 느낌은, 그들이 꺼내는 말마다 어록이 된다는 것이다.

다발성 통증증후군을 앓으며 붓을 손에 동여매고 그림을 그렸다는 작가는 ‘과로는 금물이 아니라 내겐 꿈이었다.’고 말했다. 내내 웃으면서 때로 창작 일지를 읽으면서 담담하게 전하는 작가의 태도와 목소리 모두 일 년이 다 돼가는 지금도 울림이 크다.

신체의 제약이 있다 보니 스포츠 선수들이 ‘자신의 신체를 가지고 예술을 한다’고 표현했다. 작가는 사지가 자유로운 사람들에 대해 남다른 시선으로 본 것 같다. <가드를 올리고>라는 그림책이 탄생한 배경이 되기도 했다.


날마다 A4 한 장씩은 꼭 쓴다는 작가는 '생각만 하는 건 아무것도 안 하는 거다, 그러니 행동으로 남기라'라고 당부했다.

마지막에 '모든 책을 그냥 읽지 마라. 이 책이 내게 온 이유, 이 책을 내가 사랑하게 된 이유에 적극적으로 감응하기 바란다'며 당부했다.


그 여름 나는 100일 글쓰기 도전을 시작했고, 아침저녁으로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유월에 시작된 그림이 꼬박 삼 개월 동안 이어져 팔월에 마감됐다.

재료를 다룰 자신이 없던 나는 연필과 색연필만으로 스케치북에 스무 장 가까이 그렸다.

학창 시절 어떻게 하면 미술 시간을 피할까 궁리하던 내가 그림이라니.

그 시간은 내게 소중한 깨달음을 주었다. 모든 창작은 통한다.


아래는 고정순 작가가 수강생들의 질문에 답해 준 꿀팁이다.

몸으로 쓴 작가의 말이라선지 하나하나가 예사롭게 들리지 않았다.


1. 사진을 찍어라. 그것을 그려라. 구도 잡는 법을 연습하게 된다.
2. 영화 주인공을 그려라.
3. 어린 시절의 경험은 가장 중요하다.
단 그것을 자기 것으로 만들도록 기록하라.
4. 추상적인 개념일수록 일상성을 표현하라. 자세히 써라.
5. 일상의 모든 것을 기억해 두었다 꼭 글로 써라.
6. 책 읽는 것보다 훨씬 중요한 것은 글을 쓰는 것이다.
7. 글을 쓰면 자기 생각을 정리할 수 있다.
감정이 앞서는 것은 자기 생각을 정리하지 못해서다.
8. 공개적으로 글을 써라. 보여주지 않으면 똑같은 말을 쓰게 된다.
9. 내 삶에 주체적인 사람이 되는 길은 글을 쓰는 것.
10. 그림책에서 군더더기의 문장을 빼라. 정확하게 써라.
11. 언제든 끼적일 수 있는 도구를 지니고 다녀라. 그려라. 낙서하라.
12. 자기만의 책상을 꼭 가져라!!


‘잊어야 한다는 마음으로 오늘도 울고 있을 사람들에게’

첫 장에 이 문구가 부제목 대신 자리하고 있는, 고정순 작가의 그림책 <철사 코끼리>이다.



표지 뒤쪽에는 이 문장이 쓰여 있다.

‘데헷은 얌얌이 보고 싶었습니다.

몇 날이 흘러도 그 마음 그대로였습니다.’


고철을 모아 돌산 넘어 대장간에 갖다 주는 일을 하는 ‘데헷’.

그에게는 늘 함께하는 코끼리 ‘얌얌’이 있다.

이야기 초반부터 얌얌이 죽게 된다. 슬픔을 견디지 못한 데헷은 철사를 모아 얌얌처럼 만들고 늘 그것을 끌고 다닌다. 하지만 철사 코끼리는 얌얌이 아니다.


데헷은 철사 코끼리를 끌고 돌산을 넘어 대장간에 다닌다.

그러나 커다란 철사 코끼리는 사람들을 위험하게 만들고 데헷 역시 철사에 찔려 상처투성이가 된다. 사람들이 그만하라는 말을 해도 데헷에게는 들리지 않는다.

슬픔의 늪에 빠져 있을 때는 누구의 말도 들리지 않는다. 오히려 슬픔만이 친구인 것 같다.

헤어진 그에 대한 이야기만 하고 싶은데, 오래도록 그 이야기를 들어주고 나눠줄 사람은 없으므로.

그리하여 사랑하던 이를 잃은 사람은 그를 대신할 애착 대상과 오롯이 함께인 걸로 다 됐다고 느낀다. 그럴수록 사람들과 멀어질 테고.


‘철사 코끼리를 멈추니 사람들의 소리가 들렸습니다.’


자신과 애착 대상만 바라보는 행위가 자신은 물론 사람들까지 상처 입힌다는 걸 깨달은 순간 ‘사람들’이 보인다.

데헷은 사랑하는 얌얌이 이제 자기 곁에 없다는 걸 받아들여야 다음의 삶을 살아갈 수 있다. 사람들과 더불어 살아갈 삶을.


이 그림책은 가로로 길게 표지 한쪽 끝에 철사 코끼리와 다른 쪽에 데헷이 그려져 있다.

데헷은 하필이면 돌산을 넘어 다녀야 한다. 가로로 긴 책이 그 여정을 딱 맞게 보여준다.

얌얌과 함께일 때도 데헷이 돌산을 넘어야 한다는 설정이 고달픈 삶의 여정인 것만 같아서 마음이 아렸다.


작가는 자신의 곁을 떠난 친구들에게 제대로 안녕을 건네기 위해 이 책을 쓰게 됐다고 한다.

데헷을 그리는 동안 작가는 몸살을 앓았을 것이다.

하지만 데헷을 통해, 데헷이 어떤 선택을 하게 할까 고심하는 과정에서 작가 안에 도사리고 있던 얼굴 없는 슬픔을 떠나보냈으리라.


‘얌얌하고 하나도 닮지 않았어.’


비로소 얌얌의 부재를 받아들인 데헷은 용기를 냈다.

가짜 애착 대상을 스스로 죽이는 용기였다.

작가가 선택한 용기였다.


엄마가 이 세상에 없는 슬픔, 삼십 년지기 친구이자 남편을 떠나보낸 안타까움과 그리움, 다시 돌아온 사월의 노란 리본까지, 그때도 지금도 적잖은 위로가 되는 책이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