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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창창한 날들 Apr 10. 2022

우리 집, 나의 집

꿀잠, 단꿈




작년 여름에 JTBC에서 <월간 집>이라는 드라마를 방영했다. 집에 얽힌 갖가지 사연이 있는 '월간 집' 편집부 직원들과 부동산으로 부자가 된 대표를 통해 집이란 어떤 공간이어야 하는지 생각하게 하는 드라마였다.
나한테 집이란 어떤 공간이며 어떤 공간이어야 할까, 내가 행복한 집은 어떤 곳일까.





결혼 전에도 후에도 나는 '자가' 주택과 인연이 별로 없었다.

어린 시절부터 서울 변두리에 있는 방 두 개짜리 무허가 주택에서 살았는데, 내 나이 열아홉 살에 아파트 딱지를 얻어 18평 아파트에 입주한 게 우리가 살았던 집다운 집이었다. 우리 부모님이 얻은 첫 '자가'였다.

나는 2년 뒤인 스물한 살에 그 집을 나와 첫사랑인 남편과 동거를 시작했다.

우리 부부의 첫 집은 방 한 칸짜리 임시가옥으로 부엌도 없는 보증금 50만 원에 월세 5만 원짜리 방이었다. 초여름에 들어가 초겨울에 나왔다. 그 이후 시흥동 반지하에서 몇 개월, 이문동 지층에서 몇 개월, 성수동 옥탑방에서 일 년 정도 살다가 아이를 가지게 되어 지금 사는 도시에 정착했다. 아이 아빠가 휴학을 하고 선배네 학원에서 일하게 된 것이 인연이 되어 이 도시에 살게 됐고 아들의 고향이기도 하다.




우리 부부가 처음 집을 산 것은 아들이 여섯 살 때였다. 내 명의로 된 아파트였다. 안방, 거실 겸 방, 부엌, 작은방으로 이루어진 16평 아파트였다. 입주한 첫날밤 짐을 다 풀지 못한 채 거실 겸 방에 셋이 나란히 누워 이야기 나누던 시간이 꿀 같았다.

대궐같이 느껴졌던 그 집이 몇 년 사니까 요술을 부린 듯 좁아졌다. 청소기를 돌리다 식탁 모서리에 엉덩이를 찍히고, 식구끼리 다퉈도 도망갈 때가 없었다. 우리 부부의 싸움이 점점 잦아졌는데 집이 좁아서, 마음의 여유가 없어서라고 원인을 분석한 우리는 집이 넓어지면 다 해결될 줄 알았다.

마침 한 사람에게 필요한 공간이 여덟 평이라는 말도 들었다. 그 말대로라면 세 식구에게 24평이 필요했다.
16평 아파트를 월세 주고 24평 아파트에 월세로 들어갔다. 월세를 내야 하는 게 무리됐지만, 월세 받아서 20만 원만 보태어 내면 되겠다고 단순하게 생각했다. 방 셋, 화장실 둘, 베란다 네 군데인 24평 아파트는 만리장성 같았다.

아이는 초등학교 5학년이 되었다. 부모가 이런저런 이유로 잦은 이사를 하느라 아들은 초등학교를 모두 군데 다녀야 했다. 저학년 때는 말썽을 더러 피웠지만 고학년이 되어서는 공부도 잘하고 친구 문제도 별로 없는 것 같아 음, 강하게 성장하는군, 우리는 그렇게 안심했더랬다. 그런데 최근 성인이 된 아들이 '그럴 리가 있었겠느냐, 그 환경은 역경이 있을 수밖에 없었지.'하고 담담히 지나치듯 말한 바람에  시절 우리가 아들이고 뭐고 앞만 보고 살았구나 깨달았다.

인생이 계획대로 되는 없듯이, 세입자가 월세를 밀리기 시작하면서 우리의 계산에 균열이 갔고 우리의 빚도 쌓였다. 우리가 모르는 사이 부부 싸움도 고질적인 형태를 갖추었고 나중에는 싸우지 않고도 넘어가는 일들이 자주 생겼다. 우리는 눈빛만 봐도 있잖아, 노랫말처럼 지친 서로에게 적응돼 갔던 것이다. 단란해진 아니라 싸움이 만한 각자의 생각을 견고하게 가슴속에 묻었던 같다.




어차피 낼 월세라면 과외를 할 수 있는 곳으로 가자. 그렇게 간 곳이 Y아파트였다. 그곳에서 우리 부부는 과외를 본격적으로 시작했고, 금세 학생이 늘어 사무실을 얻어 나왔다.

사무실 크기를 키워가면서 우리 살림살이가 나아졌다고 믿었는데, 그저 거품일 뿐이었다. 달마다 카드로 당겨 쓰고 다음 달에 메꾸는 일이 반복됐다.

월세가 늘 말썽이던 16평 아파트를 팔고, 신도시에 24평형 아파트를 사서 이사했다. 대출 규모가 커진 만큼 우리의 거품도 커졌다. 무리수였지만 그렇게 사는 거려니 했다. 아파트 시세가 초미의 관심사가 되었다. 집값 올라가길 원했다기보다 대출이자 내는 만큼 큰 손해를 보지 않게만 해 다오 했다.
5년쯤 그곳에서 사는 동안 대출이자에, 학원 상황의 부침에 살림살이는 늘 빚 투성이었다. 학원에서 거리가 멀어져 차 한 대로 함께 다니면서도 많이 다퉜다.

학원생들이 있는 동네로 전세를 얻어 돌아오는 게 최선이었다. 차를 안 써도 되고, 담보 대출 이자보다 전세 대출 이자가 반으로 줄었다. 그 해 아들이 대학에 들어갔고, 2학년부터는 원룸을 얻어 살기 시작했다. 

어느덧 28평 집은 두 사람이 살기에 좀 큰 듯했다. 헤어지기 일 전부터 남편이 아들 방에서 자기 시작했다. 서로 밤낮이 다른 게 이유였다. 야행성인 그 때문에 나는 늘 잠 부족에 시달렸다.

아파트 시세 스트레스 대신 집주인이 언제 전세 보증금을 올릴지 2년 만기가 다가올 때마다 불안했다. 8년 동안 세 번 보증금이 변했는데 처음엔 1천만 원, 2년 뒤에 4천만 원이 올랐다.(그때 전세대란이 일어나 우리한테까지 쓰나미였다.) 다행히 2년 뒤 2천만 원이 내려갔다.
그때 이후로 내 이름을 가진 집이란 없다.




결혼 초 남편은 내게 베개만 대면 자는 사람이라고 했다. 그랬던 것 같다.

어느 때인가부터 선잠이 들고는 놀라서 깨고, 잠들면 꿈이 많아지더니 아침에 일어나면 머리가 띵한 날이 잦아졌다. 그런 무거움으로 남편에게 얼굴 찡그리거나 투정을 했다.

잠자는 시간이 돌아오는 게 공포스러운 지경까지 갔다. 우울증과 더불어 불면증으로 2년 가까이 항우울제, 수면제를 처방받았고, 그 이후로도 나한테 숙면은 해결하기 힘든 과제가 되었다.

이 글을 쓰면서 생각하니 내 집을 가졌을 때부터였지 싶다. 그만그만한 친구들과 앞서거니 뒤서거니 집을 사고 집들이를 하고 축하해 주며 일 년이 가고, 십 년이 갔다. 그런 게 삶인 줄 알았다. 하지만 75%의 대출을 안고 입주한 '내 집'은 허울만 좋았지 일상이 불안이었다.  

어느 날 우리 부부는 브레이크를 걸지 않으면 불행 속으로 서로의 옷자락을 움켜쥐고 질주하게 될 거라 느꼈다. 각자의 길을 가기로 했고, 자연스레 상대의 기호나 필요가 아닌 '나의 필요'에 의해 각자의 집을 구했다.

십여 년 동안 불면의 밤을 지나온 내게, 처음처럼 혼자인 내게, 집에 대해 대단한 의미를 부여할 것은 없다.

사랑하는 사람이 있으면 더할 나위 없겠지만, 집은 꿀잠 자며 단꿈 꾸는 공간이면 된다. 수면의 질이 좋아지고 있지 않은가. 그것으로 충분하다.

욕심을 조금 더 내자면 벗들을 불러 끼 대접하고, 따뜻한 차로 속내를 나누며, 더러는 잠잘 공간을 내어 수 있는 곳, 그렇다면 넘치게 감사한 일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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