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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창창한 날들 Oct 12. 2022

헤어진 이유

우리는 왜 만날 수 없는 거야?

 

그대 오늘 하루는 어땠나요 아무렇지도 않았나요 혹시 후회하고 있진 않나요 다른 만남을 준비하나요 사랑이란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닌가 봐요 그대 떠난 오늘 하루가 견딜 수 없이 길어요 날 사랑했나요 그것만이라도 내게 말해줘요 날 떠나가나요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어요 어제 아침엔 이렇지 않았어요 아무렇지도 않았어요 오늘 아침에 눈을 떠보니 모든 것이 달라져 있어요 사랑하는 마음도 함께 가져갈 수는 없나요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돌아올 수는 없나요
<헤어진 다음 날> 이현우


구월에 아파트 재계약을 도와주러 X가 온 날, 그동안 가슴앓이한 질문을 하기로 했다. 언제 기회가 올지 모를 일이었다.   

그는 곧 싸울 사람처럼 표정이 굳어 있었다. 나와 헤어지기 얼마 전부터 본 얼굴이다. 내 어깨까지 굳어지게 만드는 얼굴. 그래도 이젠 끝내자 이 질문. 용기를 냈다.

"따로 사는 것도 좋고, 이혼도 좋은데, 우리가 이렇게까지 만나지 않아야 하는 까닭이 뭐였어? 삼십 년 동안 우리 제일 친한 친구였잖아. 당신이 집 나가기 열흘 전쯤 나한테 솔메이트라고 말했던 것 기억나?"

"음, 기억해. 솔메이트라고 말한 건 사실이야. 당신 처지에선 나를 이해할 수 없는 게 당연해."

"당신에게서 내가 납득할 만한 이유를 듣지 못한 채 연락을 차단당하고서 나는 지난 십팔 개월 동안 그 이유를 찾는 데만 몰두했어."

"하지만 그때 당신은 내가 어떤 말을 해도 받아들이기 어려운 상태였어. 적어도 내가 보기엔. 차라리 내가 나쁜 놈이 되자... 그랬어."

"덕분에 글을 오백 편이나 썼지 뭐야. 당신이 왜 그런 걸까, 화두는 그것이었고. 근데 난 추측만 할 뿐이지 당신이 아니니까 헛다리만 짚었겠지. 그래도 고맙게 생각하고 있어. 정약용도 아니고 오백 편이라니."

이런 말이 나올지 몰랐다. 정약용 선생은 유배지에서 십팔 년 동안 오백 여 편의 책을 썼다고 알려져 있다. 나는 빙긋 웃었다. 그 순간을 유머로 넘긴 내가 신기하고 대견했다.

X도 웃었다. 저 웃음 오랜만이다. 재작년 구월 이후 볼 수 없던 그의 웃음이지 않은가. 내가 그를 웃게 하였다. 실로 오랜만이다.

"지금 내 곁에 남아 있는 선생들도 당신 사람들이었으니 당신 덕이고, 문득 례전 일이 떠오를 때가 있는데 즐거웠던 추억이 많더라고. 그런 일들 떠올리면 기분이 나쁘지 않아."

진심어린 표정으로 말하는 그의 얼굴이 더 펴졌다. 언젠가부터 내 앞에서만 경직된 표정으로 말하던 그가... 그 얼굴이 아니다.   


그가 스물하나의 나를 좋아했던 가장 큰 이유는 나와 있으면 웃을 일이 많아서였기 때문이라 했다. 사실 그때의 나는 걱정 근심 없는 초긍정의 아이콘이었다.

그런 내가 언젠가부터 울음이 많아지고 언제 폭발할지 모르는 사람이 되어 버려서 그는 나를 어찌 대해야 할지 곤혹스러웠다고 했다. 명리학을 공부하는 친구의 말로는 우리 둘이 십 년 전에 헤어질 운이었는데 그 시기를 놓쳤다고 다. 내가 우울증을 겪은 때였다.

어찌 보면 헤어짐의 칼자루는 그의 손에 있었던 것 같다. 십 년 전 '헤어질 운'을 거스른 것도 그의 의지였고 십 년 후 헤어짐을 결정한 것도 그였던 거다.

그는 외로워도 슬퍼도 나는 안 울어, 하던 아내를 우울증까지 걸리게 만든 장본인이라며 고백한 적이 있었는데, 고맙게도 부상당한 전우를 놓아버리지 않고 함께 절룩거리며 십 년을 더 걸어준 셈이다. 그걸 나는 너무 늦게 알았고.


어느 날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그가 돌아올지 몰라서, 팬트리에는 아직도 그물건들을 그대로 두었던 나는 답을 들어야만 했다.

십팔 개월 만의 만남에서 그의 답을 듣는 순간 모든 게 이해되었다. 실은 무의식에서 이미 납득해 왔던 것 같다. 다만 그의 입으로 직접 듣고 싶었을 뿐.

이젠, 돌아오지 않을 그에게 나를 외롭게 둔다고 탓하는 짓일랑 그만 두리라.

그만둘 수 있겠다.

헤어지기 전 그의 웃음을 볼 수 있어서 좋았다.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나니라
오늘도 나는 너에게 편지를 쓰나니
그리운 이여 그러면 안녕
설령 이것이 이 세상 마지막 인사가 될지라도
사랑하였으므로 나는 진정 행복하였네라.
<행복> 유치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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