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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창창한 날들 Sep 26. 2022

십팔 개월 만의 재회

너무 금세 끝나 버린



여름부터 불안했다.

아파트 만기가 십일월인데, 우리 지역 전세 시세가 많이 올랐으므로 집을 내 줄 각오를 하고 있었다.

수업할 학생들이 있으니 평수를 줄이더라도, 월세로라도 이 단지에서 버텨야 한다.


팔월 말, 집주인 쪽에서 먼저 연락을 주었다.

계속 살 거예요?

네, 계속 살고 싶어요.

임대차 보호법에 의해 5% 올려야 한다는데 괜찮겠어요?

네, 감사합니다.

신축 2년이 안 된 이 단지의 시세는 착공식부터 지금까지 고공행진이다.  

그런 연유로 별 핑계를 다 대고 세입자를 쫓아낸다는 말이 공공연하게 들렸다. 

5% 인상은 감지덕지하게 운 좋은 일이었다.

하지만... 문제는 계약자 이름이었다.

X의 이름으로 계약된 아파트라서 2년 만기가 되면 그의 이름을 빼 주기로 약속했다.

집주인에게 솔직하게 말하고 사정을 구하기로 했다.

"저희가 그 사이에 헤어졌습니다. 혹시 계약자를 제 이름으로 바꾸어도 될까요?"

법을 잘 모르는 내가 봐도 말도 안 되는 바람이었지만, 달리 방법이 보이지 않아 우선은 표현했다.

"아이구, 그러셨군요. 제가 부동산에 문의를 해 보고 말씀드릴게요."

단번에 안 된다고 해도 할 말이 없는 처지인데, 말미를 주는 주인의 태도가 눈물나게 고마웠다.

얼마 뒤 부동산에서 전화가 왔다.

"안 됩니다. 엄연한 신규 계약이라서 오른 전세가를 적용할 수밖에 없습니다. 대신 주인과 조율해 최대한 낮춰 보도록 하죠."

집주인도 부동산도, 내가 안 돼 보였는지, 호의적이었다.

결론은 신규 계약을 하되 시세의 반만 올리기로 했고, 그 역시 감지덕지였다.

하지만 내 처지에선 수천 만원을 대출받아야 했다.

지난 이 년 가까운 시간 동안 내가 정착할 수 있도록 친구가 빌려준 돈을 부지런히 갚아 왔다.

아직 그 돈이 남은 상황이지만, 신규 계약을 위해 대출을 더 받아야 했다.

이사를 하지 않아도 되는 게 어디인가.

그래서 무조건 감사했다.




아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니 저도 곧 이사를 앞두고 있는 터라 제 일처럼 반겨주었다.

그런데 며칠 뒤에 아들과 식사를 하느라 만난 자리에서 아들이 계산기를 두드리더니 뜻밖의 말을 했다.

"아버지한테 이 년만 이름을 더 빌려 달라고 해 봐요."

"아니야. 네 아빠를 더 이상 힘들게 하고 싶지 않아."

"자존심 세우지 말아요. 밑져야 본전이니 말을 해 보자고요. 내가 말해 볼까?"

"공연히 불편하게 하지 말자."


이틀 뒤 X로부터 전화가 왔다. 만난 지 십팔 개월 만에 듣는 그의 목소리.

"얘기 들었어. 재계약하지 그래. 신규 계약으로 하면 너무 큰 돈을 줘야 하던데. 집값 다 떨어지는 마당에 그렇게 무리를 할 필요는 없을 것 같은데."

나와 걸친 모든 거래와 관계를 끊으려 했던 걸 아는데...

착한 사람 같으니라고.

"괜찮아. 내가 대출 받으면 돼. 전화 줘서 고마워."

하지만, 결국, 그의 이름을 이 년 더 빌리기로 했고, 재계약하기 일주일 전 그와 만나기로 했다.

시간이 얼마나 더디게 흐르는지, 약속 문자를 확인하고 달력의 날짜를 보고 또 보았다.




선 경험자인 친구가 예쁘게 하고 가지 말라고, 나를 만나고 싶다는 표현을 하지 않는 사람에게 기대심을 드러내기엔 이르다고 조언해 준 대로 평소의 옷차림으로 그를 만나러 나갔다.


길치인 그는 내가 알려준 장소가 아닌 곳에 서 있었다.

내가 그의 생일에 선물한 서류 가방을 들고 있는 그가 저기 보인다.

가까이 가니 함께 살 때 내가 사 준 셔츠를 입고 있다. 그 사이 배가 좀 더 나왔다.

그와 어색하게 악수를 한 뒤 일 미터쯤 거리를 두고 단지 안에 있는 카페테리아까지 걸었다.

200미터쯤 되는 거리를 걷는 동안 그는 땀을 흘리며 숨을 거칠게 쉬었다.

얼마 전 아들이 들려준 이야기가 떠올랐다.

"아버진 운동도 안 하고 밤낮은 바뀐 채 포기한 사람처럼 지내. 건강이 몹시 나빠져서 자신을 망가뜨리는데도 아무것도 안 해."

아들은 평소 몸을 아무렇게나 다루는 제 아버지를 안타까워하고 있었다. 학원 사람들도 다들 그의 건강을 걱정하고 있지만, 당사자는 귀를 막고 있다는 것.

그는 코로나 확진 회복이 덜 된 상태라며 변명하듯 말했다. 그러고 보니 마스크 바깥으로 부은 얼굴이 보였다.  

"당신 건강 관리 잘 하고 지낸다고 들었어. 사람들도 많이 만난다며."

"응, 건강해. 아픈 데 없어 요즘은. 당신도 아프지 말아야 할 텐데."

그와 사는 동안 내 별명은 종합병원이었다. 머리에서 발끝까지 안 아픈 데가 없었다.

그를 좋아하는데, 그와 있는 게 좋은데, 내 몸은 아팠다.

건강해진 내 모습을 보이는 게 마음 편하지만은 않았다. 자기와 떨어져 지내는 게 옳은 선택이었다는 그의 생각을 굳히고 싶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내가 씩씩하고 당차게 지내고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기도 했다.

나란히 걷는 동안 그와 스킨십 하고 싶어 하는 마음이 들킬까 봐 명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카페에 앉자마자 그는 보험 계약을 하러 온 사람처럼 업무 자세로 들어갔다.

태블릿을 꺼내 자기와 나의 계약서를 작성했으니 사인을 하라고 했다.

하긴 우리 둘 사이에 웃으며 나눌 이야기가 뭐가 있겠나.

시부모는 안녕하신지.(얼마 전 아버님이 쓰러지셨다고 들었다)

고양이는 잘 있는지.(큰고양이 죽고 나서 작은놈은 어떤지, 그가 충분히 애도했는지)

학원은 잘 되는지. 학원 사람들은 어떤지.(학원 일로 부딪친 게 많아서 무슨 화제를 꺼내도 불편했다)

아들 이사와 여자친구 이야기를 조금 나눈 뒤 그쪽 학원에서 독서훈련 수업을 도입하면 어떨지 나의 자문을 구한 정도.

오십 분 만에 그가 엉거주춤 일어섰다. 집에 가서 쉬어야겠다고 했다.

지하주차장에 그의 차를 찾는 데 한참 걸렸고, 예기치 못한 상황에서 늘 그렇듯 그가 허둥거렸다.

그는 차를 찾자 마자 휭하니 달아나 버렸다.

그와 나의 재회는 십팔 개월 만이었다.

오 년 전 돌아가신 엄마를 꿈에서 한번도 못 만났는데, 그는 네댓 번이나 내 꿈에 출연했다.

얼마 전에도 꿈에 나타났던 그를 현실에서 보았는데... 재계약 덕분에 예상치 못하게 이루어진 만남이었는데... 너무 빨리 시간이 가 버렸다.




이런 마음이 미련인지, 집착인지 글을 다 쓰고 난 지금 부끄럽다.

그런데도 어쩔 수 없다. 지금 내게는 이 문제가 가장 큰 난제다.

혹자는 '먹고 살 만하냐? 생업에나 집중하라.'고 할지 모르겠다.

내가 쓴 졸혼과 이혼의 경험 누군가에게 위로가 될지, 공감을 줄지, 기록으로 유의미한지...

브런치에이혼이 콘셉트로 글을 써 작가 이름을 받았으면서 내 글이 신세한탄으로 전락하지 않을지 답답하고 자신없는 시간을 보내는 중이다.

그리하여 내 안의 목소리에 집중하려고 한다.

계속 써. 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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