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인생연금' 제9화
“이 과장이 이렇게 밖에서 보자고 한 걸 보면 정 대리가 내 퀴즈를 제대로 푼 모양이네.”
회사 뒤편의 카페 2층. 이제 본격적인 더위가 막 시작되려 하는 6월의 오후. 조용하게 계단을 올라와 테이블 건너편에 앉은 이 과장에게 무거운 마음을 누르고 가벼운 말투로 말을 걸었다.
“저도 정 대리에게 이야기 들었습니다.”
이 과장은 말없이 테이블 위의 내 아이스 아메리카노 잔을 쳐다보며 말했다.
매형에게 그 일을 부탁했을 때만 해도 나 자신을 눈감아 줄 수 있을 줄 알았다. 별거 아니다. 회사에서 이런 일, 수없이 일어난다. 그저 안 해도 그만인 이벤트의 결과에 조금 변화가 있을 뿐이다. 이 과장은 내가 앞으로 잘 챙겨주면 된다. 유능한 이 과장이라면 이 일이 아니라도 어차피 크게 된다. 그렇게 끊임없이 자기 합리화를 했다. 자리에서 모니터를 보며 일할 때만 해도 괜찮았다. 하지만, 회의실에서 팀원들 얼굴을 보며 말을 하면 할수록 견디기 힘들어졌다. 무슨 말을 하든 내 안의 내가 가식적인 나를 비웃었고, 경멸했다.
내가 직접 나서서 신고하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상대해야 하는 것은 탁 전무 혼자가 아니라 조직이다. 아무리 혼자서 진실을 외쳐도 조직적으로 덮으려 하면, 나만 이상한 사람이 되고 끝날 수 있다. 탁 전무를 엮을 수 있는 증거도 없다. 매형에게 누군가의 부탁이고 그걸 안 할 경우 내가 곤란하다고 설득할 때 필요하다며 주 팀장에게 억지로 받아온 평가표가 있지만, 결정적인 것은 아니다. 제대로 처리되려면 제삼자를 통해 다양한 경로를 통해 동시다발적으로 문제가 제기되어야 한다. 회사도 쉽게 덮을 수 없는 상황을 만들어야 하는 것이다. 회사의 섭리를 잘 아는 정 대리라면 그런 방법을 취할 것으로 믿었었다. 일부러 종이를 흘린 것은 선택의 기회를 주고 싶어서였다. 회사는 내부 고발자를 철저하게 보호한다고 하지만, 상대는 탁 전무다. 고발자가 누구인지는 드러날 수밖에 없고, 곤란해질 수 있다. 정대리가 이런 흐름을 살피지 못할 리는 없을 것이고, 만약 본인이 나서기 힘들다고 판단하면 그 종이만 모른 척하면 된다. 정 대리가 어떻게 판단하든 난 움직일 생각이다.
“팀장님… 저 회사 그만둘 생각입니다. 그 말씀드리려 오시라 했습니다.”
예상하지 못한 이 과장의 말에 잘 못 들은 게 아닌가 생각했다.
“아니, 이 과장, 그게 무슨 소리야? 그만 둘 사람은 난데. 이 일은 내가 바로잡을 거야.”
“전 팀장님께서 그러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솔직히 이번 일로 팀장님께 실망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동안 믿고 따르던 분이 그랬다는 게 화도 났고요. 하지만, 지금 그 일을 바로잡는다는 것이 의미 없다는 거 아시잖아요? 과연 탁 전무 혼자 생각일까요? 많은 사람의 이해타산이 엮이고 엉켜 그렇게 흘러간 겁니다. 법인이라는 거인의 뼛속 깊이 박혀 있는 암세포는 피부에 난 종기 몇 개 잘라낸다고 없어지지 않습니다.”
“하지만, 난 나 자신을 되찾고 싶어. 다들 나를 두고 꼰대라느니 정치적이라느니 부하를 배려하지 않는 팀장이라느니 말 많은 거 알아. 부정하진 않겠어. 하지만, 꼰대 같은 참견은 나의 서툰 관심이고, 팀을 위한 정치는 하지만 나를 위한 정치는 하지 않았다고 자부해 왔어. 배려? 부족하지. 하지만, 난 일이 문제없이 흘러가게 만드는 게 팀장이 할 수 있는 최대의 배려라 생각해 왔어. 뭔가를 고집스럽게 지키는 거, 주변에서 잘한다고 하면 뚝심이 되는 거고, 잘못이라 말하면 독선이 되지. 난 뚝심이라고 자부해 왔어. 그런데, 그걸 스스로 무너뜨린 게 용납이 안 돼. 어쩌면 그저 편해지고 싶을 뿐인지도 모르지만.”
“저도 인정합니다. 그런 면은 존경해 왔고요. 저는 팀장님께서 한 번의 실수로 그 노력들을 내던지지 않았으면 하는 겁니다. 전투에서 장렬하게 전사하는 것보다, 비겁하게 도망쳐서 전쟁에 이길 수 있도록 기여하는 게 더 의미가 있을 수 있습니다. 공모전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혹시 저에게 미안한 마음을 가지셨다면, 그건 고려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뭐라고 할 말이 없었다. 지금까지 내 행동을 설명한 적은 없었지만 이 과장은 나의 진심을 이해하고 있었다. 그런 후배의 믿음을 구겨버린 것이 더욱 가슴을 답답하게 만들었다.
“그럼, 이 과장은 왜 그만두겠다는 거야?”
“예전에 제 메일 아이디 ‘smeier’가 무슨 뜻인지 물으셨죠? 스마일도 아니고 이상하다고 하셨잖아요. 그땐 아무 뜻도 없다고 말했지만, 사실 ‘Superior to Meier’를 줄인 거예요. 그러니까 ‘마이어보다 뛰어난 건축가’가 되겠다는 제 꿈을 담아서 만든 거였습니다. 리처드 마이어는 제가 대학생 때 제일 좋아하던 건축가거든요. 전 어릴 때부터 꿈이 건축가였어요. 레고로 말도 안 되는 건물을 만드는 게 최고의 놀이였죠. 대학 때 설계 담당 교수님에게 하신 말씀 중에 아직도 기억에 남는 것이 있습니다. ‘네가 그리는 모든 선에는 이유가 있어야 한다.’는 말요. 이유가 있다는 것은 선 하나에 저의 생각을 투영한다는 것이고, 생각을 투영한다는 것은 제가 주도하고 결정할 자유가 있다는 것이죠. 그게 정말 좋았습니다. 수없이 많은 고민을 하고, 고민들에 대한 답을 나만의 선으로 그리는 것. 그 선들이 모여 하나의 건물이 되는 게 정말 좋았어요. 하지만, 지금 회사에서 하는 일은 많이 다릅니다. 그 안에도 분명 수많은 고민과 자유가 있지만, 선을 그을 때만큼의 희열은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이 과장, 세상에 희열을 느낄 수 있는 일 시키면서 돈까지 주는 회사가 어디 있어. 이 과장 정도 짬이면 그런 고민할 때는 지났지 않았나?”
퇴사하겠다는 이 과장이 안타까워, 마음에도 없는 말을 뱉어냈다.
“어릴 때 일기 쓸 때 기억나세요? 여행을 가거나, 놀이공원에 가거나, 누구와 싸우거나, 누구에게 고백한 날은 일기가 술술 써지고 길어졌던 기억 없으세요? 전 그랬습니다. 그런데, 요즘 회사를 다니면서는 마음속 일기장에 쓸 내용이 별로 없더라구요. 일기가 점점 짧아지는 느낌이 들어요. 벌써 몇 년 전부터요. 가끔은 가슴 뛰는 일도 있고, 기쁨도 맛보고, 성취감도 맛보고 하지만, 갈수록 그런 날이 줄어드는 것 같습니다. 더 늦기 전에 그런 날들을 되찾고 싶은 거… 그게 이유입니다.”
이 과장이 느끼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는 건 아니었다. 내 마음속 일기장도 오래전부터 더 이상 페이지를 넘기지 못하고 있다.
“너무 낭만적인 거 아니야? 우리는 적성이나 재미를 찾기 이전에 생계를 책임지고 자신의 사회적 지위를 만들어 가야 하는 거야.”
“물론, 저도 재미나 적성을 찾아 방황할 정도로 어리거나 용감하지는 않습니다. 제가 제 생각을 잘 설명하지 못한 것 같은데…”
이 과장은 잠깐 창밖을 보며 생각하더니, 뭔가를 찾은 듯 다시 말을 이어갔다.
“제가 백곰이 된 것 같다고 할까요?”
“백곰? 북극곰 말하는 거야? 그게 무슨 소리야?”
“백곰은 사실 하얀색이 아닙니다. 피부색은 검은색에 가깝고, 털은 투명하고 빨대처럼 가운데가 비어 있는데, 그 투명한 털에 비친 빛이 산란되어 흰색으로 보이는 것이죠. 백곰은 사실 흑곰입니다. 회사를 오래 다니면서 인정을 받을수록, 그러니까 유능한 백곰이라 불릴수록… 백곰인 저에게 만족해 버리는 게 싫었습니다.”
사실, 내가 얻은 숫자에 맞추어 대학과 전공을 선택하고, 나에게 줄 숫자로 회사를 고른 나로서는 이 과장이 무겁게 고민하는 것을 공감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의 결정이 가벼운 것이 아님은 느낄 수 있었다.
“전에 다큐 영화에서 봤는데, 온난화로 빙하가 녹아 좁아지면 바다표범을 사냥할 수 있는 터전도 줄어 굶는 날이 일 년에 140일 정도로 늘어났다고 합니다. 환경이 더 악화되면 굶는 날이 더 많아져 결국은 멸종할 것이라고 하더라구요. 아무것도 없는 북극에서 백곰한테는 사냥이 몇 안 되는 가슴 뛰는 일 아닐까요? 그걸 보다가, 아… 나도 이렇게 가슴 뛰는 날이 적어지면 백곰처럼 배고파 죽지는 않겠지만 살아있다는 느낌이 들까?라는 생각도 들었고요.”
“그건 다 마찬가지야. 하루하루 정말 가슴 뛰는 일로 채울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이 세상에 얼마나 있겠어? 지금 하고 있는 일이 문제라면 다른 부서로 보내 줄게. 좀 시간을 두고 생각해 보는 건 어떨까?”
이런 문제가 아니란 것은 알고 있다. 나의 잘못이 방아쇠가 된 것은 확실하고, 이 과장이 그만둔다면 또 하나의 마음의 짐이 될 것이다. 나도 모르게 이기적인 설득이 이어졌다.
“팀장님, 말씀은 감사합니다만, 어느 부서에서 무슨 일을 하든 마찬가지일 것 같습니다. 예전부터 회사에 대해 위화감을 느낄 때가 많았어요. 대학에서는 일을 왜 하는지가 출발점이고 이루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가 도착점이라면, 그 사이의 선택이 전략이라고 배웠습니다. 그런데 실제 회사는 반대라는 생각이 듭니다. 매년 매출 몇 퍼센트 성장, 경상이익 몇 퍼센트 개선 같은 것이 경영 목표가 되지만 이루고 싶은 것이 ‘10퍼센트’는 아니잖아요? 물론 자본주의 세상에서는 회사가 성장해야 고용을 유지할 수 있고, 매출과 수익이 늘어나야 그것을 자본으로 해서 더 큰 일, 의미 있는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은 압니다. 하지만, 목표가 10퍼센트 성장이다 보니, 전략은 더 만들어 더 많이 파는 거고, 그러다 보니 왜 일을 하는가 하는 출발점을 다들 잊어버리죠. ‘매출’ 이니, ‘시장 점유율’ 향상을 위해 끊임없이 새로운 제품을 만들고, 광고로 그것을 끊임없이 소비해야 자신의 행복과 성공이 증명되는 것처럼 착각하게 만드는 것이 회사라는 생각도 들어요. 핸드폰만 해도 매년 카메라 성능이 얼마 향상되고, 처리 속도가 얼마 빨라졌다는 신제품들이 솟아져 나오지만, 그걸 소비한다고 행복이 얼마나 향상될까요? 쓰레기만 더 빨리 늘어날 뿐이죠. 이런 목적 없는 확장, 아니 확장이라는 목표를 위한 확장이 지구를 죽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자본주의가 돌아가는 근본적인 시스템 자체에 회의적이라면, 어떤 말로도 설득하기 힘들 것이다. 더 이상 해 볼 수 있는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회사를 그만두면 오랜 꿈이었던 설계사무소를 차릴 생각입니다. 어떻게 해서 더 많은 집을 파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더 많은 행복을 담을 수 있는 집을 만들지에 집중하며 일하고 싶어요. “
지금까지 이 과장을 잘 안다고 생각했었다. ‘회사’라는 시스템에 최적화된 사람. 그 안에서 능력을 유감없이 발휘하는 사람. 눈에 차안대를 차고 회사가 설정한 골을 향해 앞만 보고 질주하는 경주마. 하지만, 그는 백곰이었다. 자신의 피부색을 되찾고 싶은 백곰. 하루하루 녹아 없어지는 빙하를 안타깝게 바라보는 백곰. 바다 건너 진짜 흙이 있는 땅을 밟고 싶었던 백곰.
이 과장은 자신이 해야 할 말은 모두 뱉어낸 듯 말없이 테이블 위의 커피를 바라보고 있다.
“이 과장 거취에 상관없이 나는 결자해지를 할 생각이야. 어떤 결과가 있든 말이야. 이 과장은 내가 잃어버린 것을 아직 간직하고 있는 것 같아 부럽네.”
“모든 사람이 뭔가를 잃어버리지만, 삶의 목적이 뚜렷한 사람만이 잃어버린 것이 있다는 것을 알죠. 회사에는 자신이 뭘 잃어버렸는지 모르는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잃어버린 것을 깨닫지 못하고 변하고자 하는 사람이 없다면, 결국 회사는 일하기 힘든 곳이 될 겁니다. 아니, 존립하기 힘들 겁니다. 지구와 비슷해요. 사람들은 지구가 변하고 있다는 것을 모르는 척하고, 온도가 1도 높아졌다는 걸 사람들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어느 도시의 기온이 1도 올라가는 것과 지구 전체가 1도 뜨거워지는 것은 차원이 다릅니다. 영국의 한 신문에서 지금은 매초 3~6개의 원자폭탄이 터지는 것과 맞먹는 에너지가 지구에 쌓이고 있다고 했죠. 지구는 2100년까지 온도가 4도 이상 오른다는 현실을 향해 질주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때가 되면 아프리카, 호주를 비롯해 전 세계의 많은 지역이 높은 열기, 사막화, 홍수로 사람이 못 사는 곳이 될 거라고 하죠. 그리고, 2003년 유럽에서 3만 명이 넘는 사상자를 초래한 폭염이 세계 곳곳에서 일상적인 여름날씨로 자리 잡을 수도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변하지 않아도 지금처럼 잘 살 수 있을 거라 낙관하죠. 현실은 눈만 감으면 보이지 않지만, 눈을 감는다고 현실도피의 결과에서 도망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회사도 지구도요”
“이 과장이 뭘 말하고 싶은지는 알겠어. 회사를 올바르게 변화시키기 위해 내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는 게, 어쩌면 내 잘못을 더 올바르게 바로잡는 길일 수도 있다는 생각도 들고. 물론 내 잘못에 대한 징계를 받은 후에 말이야.”
“지구든 회사든 변화는 필요합니다. 한 사람이라도 많은 사람이 문제를 문제로 바라봐야 변화가 생기는 것이고요. 팀장님처럼요. 모든 문제는 인정하고 나서야 비로소 극복 가능한 것이니까요. 어떤 책의 저자는 우리가 가 본 모든 해수욕장, 몰디브, 방글라데시 대부분의 지역, 마이애미와 플로리다 남부, 베니스의 산마르코 대성당, 백악관까지 물속으로 잠길 것이라고 했지만, 사람들은 자기 발등이 물에 잠겨야 문제로 생각할 겁니다.”
“누가 인생연금 가입자 아니랄까 봐 설득도 환경문제를 가지고 하는 군. 그래. 나도 좀 생각을 정리해 봐야겠어. 이 과장, 내가 무슨 말을 해도 생각은 변하지 않겠지?”
“네. 이 일이 있기 전부터 생각했던 거라서요. 그런데, 제가 연금 가입했다고 말씀드린 적이 있었나요?”
“내가 직원들을 잘 챙기진 않지만, 관심까지 없는 건 아니야. 이 과장 MBTI가 INTJ인 것도 알고, INTJ가 요령 있게 자기 생각을 숨기지 못한다는 것도 알지.”
이 과장은 내 말을 듣더니 크게 웃었다.
“결국, 저만 비밀이 아닌 걸 몰랐네요.”
“나도 이번 기회에 인생연금에 대해서도 한 번 더 고민해 봐야겠어. 아니 한 번도 고민해 본 것이 없으니 처음으로 심각하게 고민하는 거지.”
“뭐든 궁금하신 거 있으면 저에게 말씀해 주세요. 제가 정말 깊게 연구했었거든요.”
그때, 계단이 통통 울리는 소리가 들렸다. 카페 사장은 평소처럼 웃으면서 다가왔다.
“두 분 무슨 얘기를 이렇게 오래 하시는 거예요? 무슨 좋은 일 있나요?”
이 과장이 웃으면서 말했다.
“해림 씨, 이제 여기 자주 못 올지도 모르겠어요.”
“네? 그게 무슨 말이죠? 어디 전근이라도 가세요?”
카페 사장이 걱정스러운 듯 놀라며 물었다. 이제는 이 과장에게 할 말은 다 했고, 내가 할 수 있는 일도 없었다. 이제 내가 해야 할 일을 하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