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인생연금' 제10화
창문을 활짝 열었다. 수많은 집과 빌라가 보이고, 그 너머로 남산 서울타워가 고개를 내밀고 있다. 텅 빈 사무실 바닥에는 차로 직접 운반한 상자 몇 개만 덩그러니 놓여 있다. 가구라고 해봐야 널찍한 원목 테이블 하나, 접이식 의자 네 개, 그리고 책꽂이가 전부였다. 원목 테이블은 허름하고 좁은 사무실에 어울리지 않게 고급스럽고 큰 것이지만, 오래전부터 상상해 온 내 사무실에는 꼭 있던 것이라, 무리해서 장만했다. 후암동을 고른 것은 이 동네가 서울에서 노후 단독주택이 가장 많은 지역 중 하나여서 일감이 많을 것이라는 판단도 있지만, 아파트나 높은 건물이 없어 하늘이 많이 보인다는 것도 좋았고, 서울의 중심이지만 여기만 시간이 느리게 흘러간 듯한 동네 분위기도 좋았기 때문이다.
회사를 그만둔 것은 한여름이었지만, 곧 가을이 시작되려고 하고 있다. 상자를 열어 책꽂이에 책들을 꽂아 넣기 시작했다. 가지고 온 물건들이 어느 정도 제자리를 찾았지만 사무실은 여전히 아파트 모델하우스처럼 사람 사는 냄새가 나지 않았다.
“안녕하세요. 이 과장님, 아니, 수현 씨. 아직 간판도 없네요?”
문을 열고 들어온 것은 해림 씨였다. 두 손에 텀블러를 하나씩 들고 있었다. 회사를 그만둔 후로 직접 만나는 것은 처음이었다. 며칠 전에 전화가 와서 사무실을 구했다는 이야기를 하자, 놀러 오겠다고 했었다.
“아직 사무실 이름 못 정했어요. 찾기 힘들었죠?”
“찾는 건 쉬운데, 언덕길과 3층까지 걸어 올라오는 게 힘드네요. 커피 사 왔어요.”
“잘 마실 게요. 해림 씨가 만든 커피가 아니라서 아쉽지만. 근데, 웬 텀블러예요?”
“하나는 개업 선물이고 하나는 제 거예요. 인생연금에 관심이 생겨서 가입자로 한 달 살이 해 보기로 했어요.”
아직 아무것도 없는 큰 회의용 테이블에 커피를 놓고 남산타워가 보이는 창문을 향해 둘이서 나란히 앉았다.
“사무실은 어떻게 꾸밀 생각이에요? 텀블러는 퇴사 선물이고, 사실 오늘 보고 필요한 거 개업선물로 사드리려고 온 거예요.”
“시간이 지나면, 설계한 집의 모델, 사진, 자재 견본 등이 하나씩 늘어가겠지만 그 외엔 아무것도 안 놓을 생각이에요. 요즘 사람들은 너무 많은 물건을 가지고 살고 있다고 생각해요. 물건이 많아지면 하나하나에 대한 애착이 떨어지고, 그러면 또 새로운 것을 사는 악순환이 되죠. 전 ‘있으면 좋을 것 같은 물건’은 사지 않는 게 철칙입니다. 그런 물건은 끊임없이 더 예쁘고 멋진 게 나와 계속 갖고 싶어지거든요. 이 사무실에서는 고객과 이야기를 나누는 테이블과 의자 외에는 모두 있으면 좋을 것 같은 물건이죠. 그러니, 개업선물은 마음만 받을게요.”
“맞아요. 그런 물건은 사실 출근길 아이스 아메리카노 같긴 해요. 살 때는 기분이 좋지만, 시간이 좀 지나면 얼음이 녹아 밍밍하고 미지근해지고, 하루 종일 의무감에 홀짝거리다가 결국 다 마시지도 못하고 버리게 되죠. 그럼, 처음 설계 의뢰 들어오면 밥 사드릴게요. 한우로.”
창문에서 시원한 바람이 들어온다. 남산 아래에 있어서인지 바람이 잘 부는 것도 이 사무실의 마음에 드는 점 중 하나다. 다니던 회사의 창문도 열지 못하는 사무실의 답답함이 벌써 먼 옛날 일처럼 느껴진다.
“그런데, 회사 그만둔 이유 물어봐도 돼요? 너무 의외라서요. 예전에 전미 씨가 이 과장님 회사에서 잘 나간다고 그랬거든요.”
“간단하게 말하면… 다니면 다닐수록 뭔가를 잃어버리는 느낌이 든다고 할까? 누가 그러던데, 주식에서 돈을 크게 잃는 것은 잃을 때까지 기다리기 때문이래요. 얼마를 벌지는 정할 수 없지만, 얼마를 잃을지는 정할 수 있잖아요. 이제 제가 정한 때가 왔다고 생각했어요.”
“알 것 같아요. 저도 회사 그만둘 때 비숫한 생각 했어요. 제 감정이 자꾸 깎여 나가는 데, 멈추지 않으면 남는 것이 없을 것 같은, 그런 느낌이었거든요.”
이제 서서히 하늘은 붉은색으로 물들고 있었다. 창밖을 바라보던 해림 씨가 말을 꺼냈다.
“반전미 씨 그만둔 건 아세요?”
“의만이에게 들었어요. 참 이상하죠? 결국 잘못한 사람들은 회사에 남고, 바로잡으려던 사람만 떠나고….”
회사를 그만둔 뒤, 정 대리에게 들은 이야기는 대부분 예상한 대로였다. 여러 경로를 통해 감사팀에 사건이 접수되었고, 직원만 가입할 수 있는 익명 SNS에 사건에 대한 수많은 글이 올라왔다. 결국, 강 팀장님과 주 팀장은 감봉 처분과 함께 지방 현장으로 발령이 났다. 예상은 했지만, 그럼에도 일말의 기대를 했지만, 그 소동은 탁 전무에게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못했다. 예상하지 못한 것은 최초의 고발자가 정 대리가 아니라 전미 씨라는 것이다. 정 대리는 많은 고민 끝에 올바른 길이 아니라 아무도 다치지 않는 길을 선택했고 움직이지 않았다. 아마, 강 팀장님의 매형까지 다칠 수 있다는 것도 고려했을 것이다.
“전미 씨, 회사에 애착이 참 많았어요. 얘기 들어보면 팀원들, 팀장님도 정말 좋아하고, 회사에서 이루고 싶은 게 많더라구요. 반전미 부장 되는 거 꼭 보고 싶었는데, 안타까워요”
“애착이 많았으니 더 용납할 수 없었을 거예요. 전미 씨는 어디 가나 잘할 겁니다. 전 걱정하지 않아요.”
“이제 건축사로서 시작이네요. 당신은 나의 제1의 연인이 건축이라는 것을 이해해 주므로 나와 결혼할 자격이 있다. 어느 건축가가 청혼할 때 한 말이라는데, 수현 씨도 이 사람만큼 건축을 사랑하나요?”
“에로 사리넨이 한 말이죠. 전 그 정도는 못 되는 것 같아요. 제가 보고 싶은 것은 멋진 건축물이 아니라 그 안에서 행복해하는 사람들의 얼굴이거든요.”
건축가의 말이라면 가우디의 ‘어떤 일을 잘하기 위해서는 첫 번째로 사랑, 두 번째로 기술이 필요하다.’는 말을 더 좋아한다. 그는 건축에 대해 말한 것이겠지만, 이 말은 모든 것에 공통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지구 온난화를 막는 것도 인생연금 같은 제도나 기술이 아니라, 사람들을 계속 지키고 싶다는 마음, 사랑이다.
“해림 씨, 근데, 왜 갑자기 연생연금 한 달 살이 시작한 거예요?
“제가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는데, 인생연금 가입자더라고요.”
이게… 혹시 나를? 뭐라고 하지? 농담으로 자연스럽게 받아야 하는데… 빨리 대답하지 않으면 어색한데…
“수현 씨, 지금 고백당한 건가? 하고 당황했죠?”
“아니요, 그게 아니라… 정말 좋아하는 사람 생긴 거예요?”
“농담이에요. 전에 원두 값이 계속 오른다고 한탄한 적 있잖아요? 그런데, 어느 날 나는 원두값 오르는 것을 원망할 자격이 있나?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눈송이는 눈사태가 자기 때문이라 생각하지 않죠. 제가 그런 무신경한 눈송이가 되진 말아야 하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제 이름, 아버지께서 지어 주셨는데 조화로울 해, 수풀 림 자를 써요.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사람이 되라는 뜻이래요. 이제 좀 이름에 걸맞게 살아보려고요.”
“’해’ 자가 여이가 아니라 아이라서 뭔가 특별한 의미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런 뜻이 있군요. 제 이름은 나무 수, 햇빛 현 자를 써요. 아버지께서 햇빛처럼 세상을 비추고 나무처럼 다른 사람에게 그늘이 되어 줄 수 있는 사람이 되라는 뜻으로 지으셨다고 하더라구요. 제 이름은 자연이고, 해림 씨 이름은 자연과 조화되는 사람이 되는 거고… 뭔가 운명 같지 않아요?”
순간, 해림 씨의 움직임이 멈추더니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해림 씨, 지금 고백당한 건가? 하고 당황했죠?”
“어떻게 아셨어요? 이젠 단골도 아니니 맘 편하게 거절할 수 있어 다행이네요.”
텅 빈 공간에는 두 사람의 웃음소리만 남았다. 이 사무실에는 이것만 있으면 충분하다. 창문 밖은 남산타워가 회색의 윤곽만 보일만큼 어두워졌다. 이제 곧 타워에 조명이 켜질 것이다.
-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