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인생연금' 제2화
오랜만에 한 운전 탓인지, 오랜만에 친 골프 탓인지 아침부터 팔이 무거웠다. 그리고, 이 과장님이 내가 눈치채고 있음을 몰랐다는 것에 마음도 조금 무거웠다. 정말 좋아하는 선배이고, 충분히 교감하며 지내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평소엔 몇 마디 말하지 않아도 웬만한 건 다 꿰뚫어 보는, 스마트하다는 말이 어울리는 사람이라 더 의외였다. 역시 INTJ는 어쩔 수 없나 보다. 업무에서 숨겨진 인사이트를 찾아내는 스마트함과 남의 생각을 파악하는 공감능력은 별개의 것이다.
월요일 오후. 퇴근 2시간 전. 가장 힘든 시간이다.
‘정 대리님, 커피 한 잔 하실래요?’
때마침 팀장님도 자리에 없고 좋은 타이밍에 카톡이 왔다. 대각선 앞자리에 앉아 있는 전미 씨였다. 아직 입사 3년차이지만, 말과 행동에 거침이 없고 자신감이 넘친다. 나뿐만 아니라 한참 나이가 많은 강 팀장님을 대할 때도 마찬가지여서, 회사에서는 강 팀장님의 친척이라는 소문이 있을 정도였다.
‘뒷다방에서?’
‘좋죠.’
핸드폰과 신용카드, 그리고 텀블러를 챙겨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뒷다방은 회사 빌딩 뒤쪽 골목에 있는 작은 카페다. 가게 이름은 뒷다방이 아니지만, 사무실 빌딩 1층 로비 정문 옆에 있는 별다방과 구별하게 위해 우리 팀에서는 그렇게 불렀다. 넓지는 않지만 바닥도 테이블도 나무를 사용했고, 벽은 옅은 올리브색이라 마음이 차분해진다. 2층에도 자리가 있어 조용하게 커피 한 잔 하기 좋은 곳이다.
전미 씨와 같이 카페에 들어갔다.
“어서오세요. 월요일부터 커피 마시러 오고 안 바쁘시나 봐요?
사장님이 웃으면서 농담을 건넨다. 항상 묘하게 핵심을 콕콕 찌르지만 밉지 않다.
“일 잘하는 사람들은 일처리가 빨라 시간이 남는 거죠.”
“네, 그러시겠죠. 뭘로 드릴까요?”
사장님은 혼자 일한다. 항상 앞치마 아래엔 특이한 그림의 티셔츠를 입고 있고, 데님을 즐겨 입으며 신발은 반스의 스케이트보드화다. 조곤조곤 차분한 말투에 어울리지 않게 스케이트보드가 취미인 것일까? 항상 느끼는 것이지만 나이를 가늠하기 힘들다.
“저는 아아요.”
“여기 따뜻한 라떼 하나, 아아 하나 주세요. 제가 라떼요.”
카드를 내밀며 텀블러를 카운터에 올려놓았다.
“오늘도 2층에서 드실 거죠? 가져다 드릴게요.”
올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이 카페의 원목으로 된 계단은 밟을 때마다 감촉이 좋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가볍게 통통거리는 소리가 난다. 기분 좋게 계단을 거의 다 올라갔을 때, 뜻하지 않은 시선과 마주쳤다. 나는 재빨리 마뜩잖은 표정을 숨기고 가볍게 미소 지으며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어, 정 대리, 전미 씨 여기서 만나네. 같이 가자고 하면 내가 살텐데.”
어울리지 않게 너스레를 떠는 강 팀장님 앞에는 이 과장님이 앉아 있었다.
“좀 낯선 조합인데요? 두 분 무슨 말씀을 나누시려고 여기까지 오신 거죠? 팀장님은 회사 앞 카페 단골이시잖아요.”
전미 씨가 거침없이 말한다. 내가 사원이었을 때는 팀장이 묻는 말에 대답하는 것도 여간 신경 쓰이는 것이 아니었는데 말이다.
“오늘은 이 과장하고 좀 비밀스러운 이야기를 하려고. 거긴 다른 팀 사람도 너무 많고.”
“보안까지 신경 썼다고 하시니까 더 궁금해지는데요? 저도 알면 안 되나요?”
전미 씨 말에 팀장님이 살짝 미소 지었다. 때마침 사장님이 커피를 들고 올라와 텀블러는 내 앞에, 아이스 아메리카노가 담긴 플라스틱 잔은 전미 씨 앞에 내려놓았다.
“아, 연금 가입자라서 텀블러를 가지고 다니는구나. 저번에 내가 커피 샀을 때는 매장 컵에 마시지 않았어?”
요즘은 이런 화제를 꺼내는 것이 비매너라는 것을 모르는 것인지, 알지만 부하에게 이 정도 이야기를 하는 것은 상사의 권리라고 생각하는 것인지, 아니면 마음에 안 드는 인생연금에 대해 뭐라도 꼬투리를 잡고 싶은 것인지….
“연금 가입 정보가 신용카드와도 연동되기 때문에 자기가 결제를 할 때는 텀블러를 내야 구매 가능하구요, 다른 사람이 결제할 때는 상관없습니다.”
강 팀장은 허점을 발견한 게 기뻤는지 큰 소리로 말했다.
“이것 봐. 시스템 자체가 깔끔하지 않다니까. 연금 미가입자인 친구에게 카드 하나 빌려서 계속 그 카드로 각종 규제를 피해 가며 즐겨도 되는 거잖아. 안 그래?”
이런 얘기는 이미 2년 전에, 전 국민이 양분되어 치열하게 제도 시행에 대해 갑론을박하던 때에 지겹도록 했던 논의들이다. 팀장님은 이것저것 따져볼 생각도 없는 모태 반대자였기에 여러 논의에 대해서도 무관심했을 것이다.
“하지만, 요즘같이 개인주의 성향이 강한 시대에 카드를 선뜻 빌려줄 사람도 많지 않을 것 같은데요? 저라도 웬만해서는 안 빌려줄 것 같아요.”
다행히, 전미 씨가 대화를 끊으며 끼어들었다.
“이 과장님, 팀장님하고 무슨 비밀스러운 이야기를 하시던 거예요? 저희가 자리 비켜드릴까요?”
“아니야. 비밀은 무슨. 신사업 공모전 아이디어에 대해 팀장님께서 어떤 방향인지 듣고 싶다고 하셔서 설명드리는 중이었어.”
얼마 전, 회사에서 전 직원을 대상으로 신사업 아이디어 공모전을 공고했다. 참가자는 담당업무와 무관하게 자유로운 기획안을 낼 수 있다. 심사는 사업성 심사가 50%, 임원 투표가 25%, 직원 투표가 25%로 구성된다. 특이한 점은 공정성과 투명성 확보를 위해 사업성 심사는 외부 회계법인이 담당한다는 것이다. 사장님께서 의욕적으로 추진하는 것이라 1등 아이디어는 실제 사업으로 실현될 것이 확실하다고 한다. 1등에게는 오백 만원의 상금과 사업을 담당하게 될 팀에 갈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 나도 매일같이 아이디어를 고민하고 있지만, 아직 실마리도 찾지 못하고 있다.
“이 과장님, 좋은 아이디어 있으세요? 저도 결혼자금 마련할 겸 참가할까 생각 중인데, 아무리 생각해도 좋은 아이디어가 없더라구요. 어떤 아이디어인지 살짝만 알려주세요”
전미 씨가 장난스럽게 이야기하지만, 속마음은 다를 것이다. 요즘 사내에서 아무도 이 이야기를 안 하지만, 모두가 관심을 가지고 있다. 이 과장님이 웃으며 말을 꺼냈다.
“나도 아직 아이디어를 찾는 중이야. 다만, 친환경과 연관된 것에 초점을 맞추어 볼까 생각하고 있어. 방금 팀장님께도 말씀드렸었는데, 플라스틱 생산량의 40에서 50퍼센트는 각종 포장재이고, 그 다음으로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게 건설 자재인데, 25퍼센트 정도 된데. 건설업계에 몸담고 있는 사람으로서 뭔가 행동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
역시, 이 과장님. 좋은 착안점이다. 사실, 나도 친환경으로 방향을 잡고 여러 데이터를 살펴보았기에 저 통계도 알고 있다.
“두 사람 오기 전에 한 얘기지만, 이번 공모전의 핵심은 확실한 수익사업을 찾는 거야. 사장님은 취임 3주년 시점에서 확실한 공적을 남기고 싶어 하시거든. 이젠 20년대처럼 막연하게 ESG 내세우고, 미디어에 한 번 노출되는 것에 만족하는 그런 시대 아니야. 알지?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난 좀 방향을 트는 게 좋다는 생각이 들어. 물론 이번 공모전은 철저하게 개인전이니 내가 뭐라 할 건 아니지만…”
“역시 팀장님! 저도 팀장님 말씀이 맞는 것 같아요. 요즘은 친환경이나 에코 같은 단어 자체가 한동안 무분별하게 쓰이던 ‘4차 산업’이니 ‘DX’ 같은 느낌이 들거든요. 근데, 아까 말씀하신 통계에서 플라스틱 포장에 쓰이는 비율이 엄청 높네요. 거의 반이잖아요? 그래서 인생연금에 플라스틱 포장에 대한 제약이 그렇게 많았군요.”
전미 씨가 말했다. 전미 씨는 우리 팀에서는 팀장 측근으로 분류된다. 예전에 인사과 동기가 귀띔해 준 적이 있었다. 팀장 다면평가에서 우리 팀의 누군가가, 한 사람만이 팀장을 스티브 잡스의 창의력과 히딩크의 동기부여 능력을 가진 사람으로 평가했다고 말이다. 물론 시스템 상 그게 누구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 이야기를 듣는 순간 전미 씨라고 확신했다.
“자동차 소유 제한도 사실 플라스틱 소비를 줄인다는 취지도 있지. 건설산업 다음으로 플라스틱을 많이 소비하는 게 자동차 산업인데, 거의 10%에 육박하거든.”
이 과장님이 전미 씨를 위해 친절하게 부연설명을 해 주셨다.
“근데 말이야. 플라스틱 좀 덜 쓴다고, 아님 좀 더 쓴다고 영향이 그렇게 커? 이렇게 일회용 컵 줄이는 게 마음의 위안 정도 효과인 거 아니야? 태평양 한가운데 있다는 거대 플라스틱 쓰레기 섬인가? 그거 한국의 16배 크기라는 거 10년도 더 전에 뉴스에서 본 것 같은데, 얼마 전 뉴스에서도 한국의 16배 크기라고 본 것 같아. 그렇게 온 세상이 플라스틱 가지고 난리를 쳐도 별 변화가 없잖아”
할 말이 없다. 사람은 같은 이야기를 들어도 자신이 믿는 거에 따라 전혀 다르게 해석해 버린다. 전 세계가 난리를 치니 그나마 비슷한 크기를 유지하는 거 아닌가? 노력이 없었으면 지금쯤 한국의 16배가 아니라 한반도의 16배가 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골프장에 갔다 온 뒤로, 팀장님이 환경에 관한 이야기를 의도적으로 자꾸 꺼내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내가 인생연금 가입자인 게 그렇게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인가? 인생연금에 가입하기 전에 오랜 기간 고민했다. 팀장님이 지금 툭툭 던지는 것과 같은 반대파의 주장에 대해서도 각종 매체나 연구 자료 등을 통해 나름 철저히 연구하고 검증한 후에 결심했기에 나의 판단을 믿는다.
“팀장님 혹시 굴 좋아하세요?”
“그럼, 할아버지께서 통영 분이셔서 많이 먹었고 좋아하지. 왜 갑자기?”
“영국의 어느 연구팀에서 6년 동안 수산물의 미세플라스틱 오염 정도를 조사했었는데, 굴, 가리비, 홍합 등에서 가장 많은 양이 검출되었데요. 그리고, 사람의 시신에서 채취한 조직 샘플을 분석했더니 인체의 모든 기관과 조직이 미세플라스틱에 오염되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고 하더라구요.”
“그런 뉴스는 오래전부터 계속 나왔던 거 아냐? 그런데도 이렇게 다들 멀쩡하게 잘 살고 있는 거 보면, 의외로 별 영향이 없을 수도 있잖아.”
강 팀장은 특유의 강압적 합리화. 결정타가 필요하다. 아니, 빨리 이런 주제에서 벗어나야 한다. 애당초 환경이 바뀌고 있다는 것을 믿지 않는 사람, 지금까지도 잘 살고 있는데 별일 있겠냐는 사람, 뭘 하든 그게 큰 영향을 주겠냐는 사람과의 토론은 의미가 없다. 필요하다고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은 어떻게든 행동하지 않기 위한 자기 합리화를 할 뿐이다.
“세계자연기금에서 진행한 연구를 봤었는데, 한 사람이 1주일간 미세플라스틱 5 그렘을 먹는다고 하더라구요. 5 그렘이면 신용카드 한 장 무게래요. 생각보다 우리 몸에 많은 영향을 주고 있다고 하니, 가능하면 조심하는 게 좋지 않을까요?”
“와… 그렇게 많아요? 오이스터바에 가서 맘껏 해산물 먹으면 카드로 큰돈 결제하고, 배 속에 카드 한 장 넣고 오는 거네요?”
전미 씨는 자기가 한 농담이 마음에 들었는지 큰소리로 웃으며 말했다. 누가 있든 자기 느낌을 가감없이 말해야 직성이 풀리는 전미 씨 특유의 농담. 강 팀장님에 대한 배려 같은 것은 고려 대상도 아니다. 이 과장님도 전미 씨의 말에 애써 웃음을 참고 있는 것이 보인다.
“뭐, 뭐든 많이 먹으면 몸에 좋지 않은 거 아니겠어? 암튼, 이 과장, 아무리 공모전은 개인전이라고 하지만 우리 팀에서 1등 나오면 좋은 거니까 잘해봐. 독창성 하면 또 전미 씨 아니야? 전미 씨도 잘해 보고. 아님, 아예 두 사람이 같이 해 보든지. 뭐 필요한 거 있으면 언제든 말해. 응? 난 미팅이 있어 먼저 나가 볼게.”
강 팀장님은 마시다 만 커피를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야 편하게 얘기할 수 있을 것 같다.
“이 과장님, 저희 오기 전에 정말 무슨 얘기하고 계셨던 거예요? 팀장님이 아무 의도 없이 커피 살 분이 아닌데…”
“진짜로 공모전 얘기하고 있었어. 컨셉 잡았냐고, 어떤 방향이냐고 묻더라고. 그래서 몇 가지 생각했던 아이디어 말씀드렸는데….”
“그런데요?”
“처음에는 팀장으로서 뭔가 도와주려는 것처럼 말을 꺼냈는데, 나중에는 될만한 사업인지 확인하려는 듯이 꼬치꼬치 묻더라고. 다행히 그때쯤 두 사람이 들어온 거야.”
강 팀장님은 부하의 개인적 도전을 도와주거나 응원해 주는 자상한 스타일은 아니다. 자기 팀 인력이 빠져나갈 것이 걱정되어서 그런 것일까? 팀의 브레인이며 타 부서에서도 탐내는 이 과장님이라면 더욱 그런 걱정을 할 수밖에 없을지도 모른다.
셋이서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가 회사로 돌아가려고 테이블을 정리하고 있을 때, 사장님이 올라왔다.
“이 과장님, 가시게요? 말씀 나누시느라 커피 거의 못 드셨네요. 사무실에서 드시게 제가 따끈한 걸로 리필해 드릴 게요. 주세요.”
“아니… 괜찮은데.”
이 과장님이 멋쩍은 듯, 하지만 얼굴에 옅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사장님은 텀블러를 빼앗듯이 손에 쥐고는 재빠르게 계단을 내려갔다. 계간을 내려가는 사장님의 발소리에서 왠지 유쾌한 리듬이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