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차는 BMW

소설 '인생연금' 제1화

by 이창동


이 소설에서 언급되는 각종 통계 수치는, 집필시점(2024년)에 입수 가능한 논문, 신문기사, 서적 등에 게시된 통계들을 참조하여 가능한 실제 데이터와 큰 차이가 없도록 작성하였습니다. 하지만, 이 책에 나온 숫자들은 어디까지나 작가가 창작한 허구의 일부임을 밝힙니다.
소설의 배경인 2036년에는 이런 숫자들이 어떻게 변할지 모르지만, 우리의 노력으로 최소한 지금과 같은 수준이 유지되었으면 하는 바람을 담았습니다.




“좋은 아침입니다! 과장님.”
정 대리는 차문을 열고 나오며 활기차게 인사하더니 내 골프백을 받아 트렁크에 실었다.
“빨리 왔네? 편의점 가서 커피나 사 오려고 일찍 내려왔는데.”
“그러실 줄 알고 집에서 따끈한 커피 만들어 왔어요. 타시죠,”
조수석에 앉아 뒷자리를 보니, 팔걸이에는 고급 캔커피와 생수 한 병이 꽂혀 있었다. 약속 시간 15분 전 도착. 집이 가까운 나를 위해서는 따뜻한 커피를 준비하고, 30분 더 가서 태워야 하는 강 팀장님 것은 고급 캔커피로 준비한 것이 빈틈없는 정 대리답다.

3월이 막 시작된 일요일 아침 5시. 평소 같으면 절대로 따뜻한 이불 밖에 있을 시간이 아니다. 목요일 퇴근 시간이 다 되어서 강 팀장님이 갑자기 골프 얘기를 꺼냈을 때는 무슨 핑계를 대더라도 거절하고 싶었지만, 예약된 골프장이 ‘클럽 세븐브리지’라는 말에 약속을 잡고 말았다. 우리나라 5대 명문클럽으로 언급되는 곳, 웬만한 사람은 부킹 하기도 힘든 곳. 골프를 5년째 치고 있지만 갈 기회도 없었고 갈 생각도 못하던 곳이기 때문이다. 안전띠를 매자, 정 대리가 차를 출발시켰다.


“과장님, 근데 강 팀장님 너무 하지 않아요? 꼭 골프 펑크 났을 때만 저희를 부르잖아요. 평소에도 좀 데리고 다니시지.”
“뭐, 어쩌겠어. 그래도 이런 기회에 좋은 곳 구경하는 거지.”
강 팀장님과는 4년째 같은 팀에서 일하고 있지만, 팀원들과 친목을 도모하기 위해 뭘 하는 사람이 아니다. 회식도 자기 기분 좋을 때, 집에 일찍 가면 안 될 때만 한다.
“정 대리, 근데 이거 레벨 5 완전 자율주행차 아냐? 왜 직접 운전하고 있어?”
“레벨 5 맞아요. 예약하면 집 앞까지 알아서 와 주니 요즘은 운전도 거의 안 하죠. 근데, 강 팀장님이 자율주행 불신론자잖아요. 오늘 자율주행으로 가면 불편해할 거고, 안 그래도 까칠한 분이 설교만 늘겠죠. 1시간 동안 그걸 듣느니, 좀 피곤해도 그냥 제가 하려고요. 오랜만에 운전대 잡는 거라 감이 떨어져 연습하는 거예요.”
“잘 생각했어. 참 팀장님다워. 완전자율주행이 승인된 게 2032년이었나? 벌써 4년이나 지났는데, 아직도 고성능 칩과 첨단 제어장치보다 자기 두뇌와 운동신경이 더 우수하다고 믿고 있으니….”
“그러게요. 과장님은 몇 년 전에 일본 후쿠오카에서 자율운전에 대해 실험했던 거 아세요?”
“뉴스에서 제목은 본 것 같은데?”
사실 나도 잘 알고 있는 실험이다. 그 결과까지도 세세하게 기억하고 있다.
“도시 내 모든 주민의 차량, 택시, 버스, 도시로 유입되는 모든 차량을 레벨 5 자율주행 차량으로 바꾸어 6개월 동안 출퇴근 시간, 물류 소요 시간, 사고 건수, 전기와 휘발유 사용량 등을 관찰했는데, 모든 평가에서 실험 전의 후쿠오카보다 압도적으로 좋았어요.”
“그래? 그럴 것 같긴 해. 암튼 뭐든 근거 없이 변화를 싫어하는 사람들이 꼭 있지. 강 팀장님은 일할 때도 그래. 내가 조금만 뭘 바꾸려 하면 불편해하잖아. 바뀐 방식이 좋다는 것은 아는데, 자신이 경험해 보지 않은 건 그냥 불편한 거야.”
“맞아요. 요즘은 보기도 힘들다는 꼰대의 화석 같은 분이죠.”
정 대리는 사무실에서 가장 신뢰하는 후배이기도 하지만, 사적으로도 죽이 잘 맞았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 보니, 어느새 강 팀장님이 사는 아파트 단지 입구에 도착했다. 1기 신도시 아파트 중에서 가장 먼저 재건축이 성사된 단지 중 하나로, 우리 회사의 재건축 사업 중에서는 성공한 사업으로 평가받고 있다. 이제 이 동네도 30층 이상의 아파트가 흔하다.


정 대리가 지하 3층 주차장의 엘리베이터 홀 앞에 차를 세웠다. 아직 해가 뜨기 전의 이른 시간이지만, 여느 아파트처럼 지하 주차장은 한산했다. 얼마 뒤에 강 팀장님이 나타났고, 골프백을 트렁크에 싣고 골프장을 향해 출발했다. 강 팀장님은 준비된 커피를 마시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차 안을 두리번거리고는 말을 꺼냈다.
“정 대리 덕분에 오늘은 편하게 간다. 근데, 저번에 대전 현장 갈 때 탔던 차와 다른 것 같은데, 차 바꿨어?”
“차가 바뀐 건 맞는데, 전 원래 차가 없습니다.”
“아, 그랬어? 랜트한 거야? 그럼 전에 몰고 온 차는 뭐야?”
"제가 자주 이용하는 공유자동차 업체 차였어요.”
“말을 하지. 난 지난번에도 정 대리가 선뜻 차를 가지고 간다고 하길래, 차가 있는 줄 알고 픽업을 부탁한 건데. 요즘은 입사하자마자 차 사는 친구들도 많은데, 왜 아직 안 샀어?”
“음… 제가 차에 관심이 없기도 하고 인생연금, 아니 인류 생존연금 가입자라서요. 필요할 때마다 공유자동차를 이용하는 게 더 편하더라구요.”
순간 뒷자리가 조용해졌다. 몇 초의 정적이 흐른 뒤에 뒷좌석 팔걸이를 탁… 탁… 탁… 두드리는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천천히 손톱 끝에 모든 체중을 실어 누르듯. 나는 저 소리가 뭔지 잘 안다. 평소에도 서류에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이 있으면 손에 들고 있던 연필로 마음에 안 드는 곳을 저렇게 두드린다. 서류를 들고 갔을 때 침묵 속에서 저 소리를 듣는 것이 너무 싫었다. 뭐가 마음에 안 든다고 콕 집어 말하지 않는 것은 더 싫지만.
강 팀장님이 평소 인류생존연금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잘 알기에 내심 정 대리가 그럴듯하게 돌려 말하길 바랬지만, 역시 거짓말을 못 하는, 아니 안 하는 정 대리는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아… 생존여언그으음.”
강 팀장님은 고개를 주억거리며 느릿하게 말하더니 또다시 조용해졌다. 백미러로 살짝 쳐다보니 생각보다 많은 고추냉이가 들어간 초밥을 먹은 듯한 일그러진 표정으로 창밖을 보고 있었다. 갑자기 팔걸이를 두드리던 소리가 멈췄다.
“정 대리, 근데 말이야. 한참 사회생활 할 나이에 차가 없으면 불편하지 않아?”
“처음엔 저도 걱정 많이 했는데, 지나고 보니 딱히 불편한 것도 없더라구요. 20년대엔 차가 없으면 그 BMW, 그러니까 버스, 메트로, 워킹 아니면 렌터카 밖에 이용하지 못했지만 요즘은 공유 무인 자동차가 너무 편하게 잘 되어 있어요. 앱으로 부르면 금방 집 앞에 오고, 목적지에 도착하면 주차할 곳 찾을 필요 없이 1층 입구에서 내리면 되니 너무 편합니다. 이용자가 워낙 많아져서 요금도 많이 저렴해졌구요. 귀찮게 세차나 정비소 갈 일도 없고, 그날그날 용도나 기분에 맞춰서 차도 고를 수 있어 좋고요. 오늘도 골프라서 트렁크가 넉넉한 모델로 예약했습니다.”
“그래도 자기 차가 아니면 불편하지. 매번 남이 신던 신발 신고 외출하는 것 같지 않아? 깨끗한지 아닌지 몰라 찜찜할 거고, 차에 짐을 실어 놓을 수도 없고. 제대로 된 놈이 정비했는지, 누가 뭘 건드렸는지 모르잖아. 그치 않아? 이 과장은 어떻게 생각해?”
얼른 다른 주제로 넘어가길 바라며 조용히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었는데, 피해 가긴 힘들 것 같다. 가능한 두리뭉실하게 대답해야 한다.
“말씀하신 것처럼 분명 불편한 거, 걱정되는 게 있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결국은 각자가 무엇을 중요시하느냐, 가치관으로 선택하는 거 아니겠습니까?”
“이 과장, 거 말 잘했네. 맞아, 가치관. 그놈의 가치관.”
이게 아닌데… 팀장님의 까칠함에 브레이크를 밟고 싶었는데, 액셀을 밟아 버린 것 같다.
“난 말이야, 자유와 권리를 희생하고 돈 몇 푼 더 받겠다는 인생연금 가입자들의 가치관이 이해가 안 가. 아무리 환경이 중요해도 차조차 소유하지 못하게 하는 건 너무한 거지. 여기가 무슨 공산주의 국가야? 솔직히 사리분별 확실한 정 대리가 가입자라는 것도 좀 의외네.”


‘의외’라고 말했지만, ‘실망’이라고 들어야 한다는 것은 누가 봐도 분명하다.
팀장님은 어떻게 봐도 꼰대일 수밖에 없는 사람이지만, 자기 딴에는 꼰대로 불리지 않기 위해 표현에 신경을 많이 쓴다. 아무리 표현을 바꾸어도 내용이 그대로면 의미가 없다는 것을 모르는 것일까?
“난 솔직히 이름부터 마음에 안 들어. 인류는 멀쩡하게 잘 살고 있는데 인류 생존연금이 뭐냐. 지구 환경을 살리기 위한 거면 지구 생존연금이라고 하던가.”
지구는 공룡이 멸종해도 아무렇지도 않았고, 인류가 멸종해도 신경도 안 쓸 것이다. 생존이 절실한 쪽은 사람이다. 듣고 있을수록 쌓이는 피로감에 말문이 막혔다. 비에 흠뻑 젖은 채로 만원 지하철에 탔을 때의 옷처럼 팀장님의 말들이 온몸에 달라붙었다.
“팀장님, 가입자들 너무 미워하지 마세요. 저도 가입하기 전엔 몇 달을 고민했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자유롭게 생활하는 대가로 제 자식들이 각종 기후 재난으로 힘든 삶을 살아가야 한다면, 마음 편히 지금을 살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나도 정 대리 말에 동감한다. 누군가가 나에게 자유를 희생하고 얻는 미래의 안전이 의미가 있느냐고 묻는다면, 미래가 없는 현재의 자유가 의미 있는 것인지 되묻고 싶다.
“이 사람, 졸지에 날 후세도 걱정하지 않는 이기적인 사람으로 만드네? 나도 애 있어! 나도 우리 애가 좋은 환경에서 살기를 누구보다 원하고. 근데, 그놈의 인생연금은 너무 극단적이라는 거지. 어떤 시스템이든 추어탕 속 미꾸라지처럼 들어 있는지 없는지 모르지만 깊은 맛을 내는 게 좋은 거야. 근데 인생연금은 미꾸라지가 통째로 얹혀 있어 먹기 힘들어”
더 이상 이 얘기를 계속하다간 정 대리에게도 나에게도 좋을 것이 없다.
“정 대리같이 국민연금도 얼마 못 받는 세대는 이렇게라도 노후 대비 해야죠. 근데 팀장님, 요즘 거의 세미프로급으로 잘 맞으신다는 소문이 7층에 파다하던데요?”
“아니, 그렇게 소문이 났다고? 그게 아니라, 전에 상무님하고…”


오후 3시. 달리는 차 안에는 정 대리와 나만 남았다. 이번엔 자율운전을 켜고, 둘 다 시트를 최대한 뒤로 젖히고 편안하게 누워서 가고 있다. 라운딩이 끝나고 마신 술과 간만에 한 운동의 피로감에 몸이 시트에 빨려 들어가는 것 같다. 다행히 오늘의 라운딩은 성공적이었다. 강 팀장님은 세미프로급의 실력을 보이며 소문이 소문이 아니게 된 것에 만족하며 시종일관 기분이 좋았고, 최고급 클럽의 수려한 경관은 뒤땅치기보다 더 답답한 강 팀장님의 설교를 잊게 해 줄 만큼 아름다웠다.
“정 대리, 수고 많았어. 코스가 정말 예술이다. 왜 최고급 클럽이라고 하는지 알겠더라.”
“과장님도 고생하셨어요. 오길 잘한 것 같아요. 여기가 아니더라도 다음에 팀원들 모아서 한 번 가시죠. 팀장님은 빼고요”
“그래, 그러자. 근데, 아까 골프장 갈 때 팀장님에게 인생연금 가입했다는 거 왜 말했어. 그 사람이 ‘친환경’이니 ‘에코’ 같은 말들을 얼마나 싫어하는지 잘 알잖아.”
“알죠. 저도 순간 망설였는데, 모든 게 처음 한 번은 쉽지만 계속하려면 피곤하잖아요. 그래서 그냥 커밍아웃했어요.”
고개를 돌리고 나를 빤히 쳐다보는 정 대리의 시선이 느껴졌다. 잠시 망설이는 듯하다가 정 대리는 입을 열었다.
“근데… 과장님은 계속 비밀로 하실 생각이세요?”
순간 뜨끔했다. 어떻게 알았지? 가입한 지 1년이 지났지만, 누구에게 이야기한 적도 없었고, 인생연금 얘기가 나오면 화제를 돌리거나 무관심한 듯 침묵했었다. 지금은 누가 물어보면 거짓말을 할 생각은 없다. 예전과 달리 가입하든 안 하든 크게 비난받지 않는 사회적 분위기가 정착되었으니까. 지금이 2034년이었다면 철저히 비밀로 했겠지만.


많은 사람들이 2027년에 새로 취임한 대통령이 오랜 기간 계속된 국민이 아닌 정치인을 위한 정치를 바꿔줄 것으로 기대했지만, 바뀐 것은 거의 없었다. 사람들은 정치에 뭔가를 기대하는 것이 얼마나 의미 없는지를 깨닫고, 어디에 투표해야 할지 갈피를 못 잡은 채 2032년의 대선을 맞이했다. 하지만, 이 선거에 전혀 예상하지 못하던 인물이 나타났다.
그는 그때까지의 정치인과 많이 달랐다. 경쟁자에 대한 비판은 하지만 비난은 하지 않았고, 경제를 살리겠다고 시장 바닥에서 외치지 않고, 경제가 살 수 있는 조건을 어떻게 만드는지 조용히 설명했다.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배려를 하겠다고 생색내지 않고, 약자를 위한 정책으로 소외감을 느낄 강자들도 배려하겠다고 안심시켰다. 협치를 하겠다고 하지 않았고, 타협 없이 옳은 일을 하겠다고 했다.

그래서 그는 색깔이 없었고, 좌인지 우인지도 알 수가 없었다. 그에 대한 가장 큰 비난은 정치 경험이 없다는 것이었지만, 경험 없는 그의 말에 제대로 반박할 수 있는 경험 많은 정치인이 없었다. 마지막엔 경쟁자들이 미국에서 태어나서 대학교까지 나온 금수저가 어떻게 한국의 정서와 서민층의 고충을 헤아릴 수 있겠냐는 비판을 들고 나왔지만, 국방의 의무를 다하기 위해 미국 국적을 포기했다는 것이 알려지면서 더 이상의 비판 거리를 찾지 못했다. 어느덧 사람들은 그에게 열광했고, 나도 그 중 한 사람이었다.


결국 색깔 없는 그가 대통령이 되었다. 그는 그때까지의 과학적, 경제학적 근거가 없는, 그러나 표심의 근거는 될만한 정책들을 제자리로 돌려놓고 나자, 누구나가 놀란 의외의 비전을 제시했다. 그것이 ‘세계 최고 수준의 환경목표 달성을 통한 초일류 국가로의 도약’이었다. 그리고, 구체적 실행전략 중 하나로 ‘인류 생존연금’을 발표했을 때는 사회 전체가 반으로 갈라졌다. 양쪽 지지자는 각종 매체를 통해 서로를 비방했으며, 주말마다 대규모 시위가 끊이지 않았다. 심지어 양쪽 시위대 간의 폭력 사태와 법안 지지 국회의원에 대한 테러가 발생하는 등 한동안 거의 모든 뉴스가 인류 생존연금과 관련된 것으로 채워졌었다.

인류 생존연금의 제도적 허점을 찾아 퍼트리는 사람, 특정 업계와 대통령의 유착이 낳은 국가 규모의 사기라고 주장하는 사람, 재원 마련이 불가능하다는 사람, 재정파탄으로 결국엔 연금을 받지 못할 것이라는 사람, 돈에 눈먼 사람들이 공산주의 국가를 만들려고 한다는 사람 등이 끊임없이 제도를 비난했다. 반대편 사람들은 연금 제도가 새로운 산업을 키울 것이며,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먼저 환경 관련 목표를 달성함으로써 진정한 선진국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을 것이며, 이 제도가 국민연금으로 불이익을 받고 있는 젊은 세대에게 희망을 줄 수 있음을 들며, 비전 없이 반대만 하는 자들을 비난했다. 이런 상황에서 자동차 업체 등 당장 경영실적에 큰 타격을 받을 것이 확실한 기업들이 인류 생존연금 가입자의 입사 지원을 금지할 방침임을 발표하며 사회적 대립에 기름을 부었다.


오랜 진통을 겪고 난 후, 2034년에 제도가 시행되었다. 1년 동안의 갈등의 기억이 너무 강해서인지, 가입했지만 안 했다고 하는 사람, 가입하지 않았지만 가입했다고 말하고 다니는 사람, 묻는 상대에 따라 다르게 대답하는 사람 등 각자 자신에게 맞는 방식으로 처신했다. 모두가 슬기롭게 대처하려고 노력했고, 어느 정도 분위기가 안정된 이후에는, 사회적으로 가입여부를 서로 묻지 않는 것이 매너처럼 굳어졌다. 정부에서도 제삼자가 가입여부를 쉽게 파악할 수 없도록 세심하게 시스템을 구축했다. 나는 제도가 시행된 지 1년이 지나서 가입했고,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어... 어떻게 알았어?”
“과장님하고 저, 이제 3년째 같은 팀입니다. 가끔 연금 얘기가 나올 때 과장님 반응이나 표정을 계속 보다 보니 알겠더라구요. 오히려 서운한데요. 제가 알고 있었다는 걸 과장님이 몰랐다는 게.”
가끔은 이렇게 상대의 머릿속까지 투시하는 듯한 정 대리가 부담스럽지만, 자신이 아는 것을 항상 좋은 일에만 쓰는 정 대리가 믿음직스러운 것도 사실이다.
“아니, 그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은 여러 번 했었지.”
“신경 쓰지 마세요, 과장님. 한참 동안 다들 너무 힘들고 조심스러웠잖아요. 이해합니다.”
“그래. 뭐… 근데, 정 대리는 왜 벌써 가입했어? 젊을 때는 마음껏 즐기다가 좀 나이 들면 가입하겠다는 사람도 많은데.”
“솔직히 빨리 가입해서 조금이라도 연금을 더 많이 받고 싶다는 이유가 크긴 하지만, 미래의 자식에게 떳떳했으면 하는 게 더 큰 것 같아요. 그게 제일 마음 편할 것 같기도 하구요.”
역시 정 대리답다. 일할 때도 내가 복잡하게 얽힌 문제로 고민하고 있으면 나에게 말한다. 단순하게 생각하고 옳은 것을 선택하면 제일 편하다고 말이다. 어느덧 차는 서울 시내로 들어서고 있었다.




[인류 생존연금 가입 희망자를 위한 안내]

2034년 7월 1일

대통령실


인류 생존연금은 환경보호 및 지구 온난화 완화를 위해 기여한 국민에게 연금 급여를 지급함으로써, 국민의 생활 안정과 지구 환경 개선에 이바지하는 것을 목적으로 합니다.

국내에 거주하는 19세 이상 65세 미만인 국민으로, 소득신고 대상인 분은 누구나 가입이 가능합니다. (단, 인류 생존연금에 가입하지 않은 부모, 친족, 지인과 동일한 주소지에서 동거할 경우 가입이 제한됩니다. 이는 동거하는 연금 미가입자를 통해 인류 생존연금 가입자가 준수해야 하는 각종 규제를 우회하여 경제적 이득을 취하는 것을 예방하기 위해서입니다.)


가입 기간은 연금가입 희망자가 가입을 신청한 후 관할부서의 승인을 받은 날에 개시되며, 관련 법률에서 제시하는 준수사항을 위반하지 않고 가입 조건을 유지하는 기간을 가입 기간으로 간주합니다.

연금 가입자는 가입기간에 비례하여 법률에서 정하는 바에 따라 연금을 수령할 수 있습니다. 단, 외국에 거주하는 기간은 연금 가입기간에서 공제됩니다.

연금 가입자는 납세 정보, 금융기관 거래, 신용카드 거래 등의 모든 정보를 인류 생존연금 공단에서 조회 및 활용하는 것에 동의해야 합니다. 또한, 휴대폰에 인류 생존연금 관리 애플리케이션을 설치하는 것에 동의해야 합니다. 이를 통해 연금 가입자가 관련 법규에서 규정하는 조건들을 준수하고 있는지 실시간으로 확인하게 됩니다.

연금 가입자는 아래와 같은 규정을 준수해야 합니다. 아래는 중요 사항만 발췌한 것으로, 반드시 가입 전에 공식 홈페이지에서 전체 규정을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규정을 10회 이상 위반 시 연금 수령 자격이 박탈됩니다. 단, 차량 소유 제한에 관한 규정은 위반 시 즉시 연금 수령 자격이 박탈됩니다.)


1. 차량 소유 제한

연금 가입자는 본인 명의로 차량을 구입 또는 소유할 수 없습니다. 가입 전에 이미 차량을 소유하고 있을 경우, 가입 신청 전에 매각 또는 소유권을 이전해야 합니다. 또한, 자기 소유 차량을 보험 대상물로 하는 보험에 가입할 수 없으며, 10일 이상의 장기 랜탈 계약도 체결할 수 없습니다. 타인 소유 차량을 장기간에 걸쳐 운전하다가 적발될 경우, 연금가입 자격을 상실하며, 본 연금에 재가입도 불가능합니다.


2. 육류 소비제한

연금 가입자는 아래의 제약을 준수해야 하며, 아래에 규정되지 않는 사항이라도 소고기를 비롯한 육류 소비를 최소화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 연금 가입자는 1주일에 7회를 초과하여 육류가 포함된 메뉴를 음식점에서 구매하거나 각종 유통업체 매장에서 판매하는 육류를 구입할 수 없습니다.


3. 항공기 이용제한

연금 가입자는 1년에 2회를 초과하여 항공기 이용을 할 수 없습니다. 단, 근무 중인 직장에서의 출장, 의료 상의 긴급 상황, 정부 관련 행사 참석, 직계 가족의 경조사, 기타 관할 기관이 예외적으로 승인한 활동 등으로 인한 항공기 이용은 이용 횟수 제한에서 제외됩니다.


4. 금융 상품 관련 제한

연금 가입자는 RE100 미달성 기업의 주식을 거래 및 소유할 수 없습니다. 또한, RE100 미달성 기업이 포트폴리오에 포함된 어떠한 금융상품도 거래할 수 없습니다.


5. 합성수지 소비 제한

연금 가입자는 아래의 제약을 준수해야 하며, 아래에 규정되지 않은 사항이라도 합성수지(플라스틱) 소비를 최소화할 수 있도록 노력을 경주해야 합니다.
- 카페, 패스트푸드 등에서 음료를 구입 시, 연금 가입자가 지참한 용기를 사용해야 합니다.
- 연금 가입자는 1주일에 2회를 초과하여 어떠한 상품이라도 배달되는 형식으로 물품을 구입 또는 임대할 수 없습니다.


(중략)

정부에서는 연금 가입자를 위한 각종 혜택을 제공하고 있으며, 지속적으로 혜택을 확대해 나가고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공식 홈페이지 또는 인류 생존연금 관리 애플리케이션에서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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