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주 날씨 어때요 3

미숫가루, 소꿉놀이 장난감, 화분들

by 지진진

나는 1988년 첫달에 태어났다.

거의 2년 뒤 1989년 겨울 남동생이 태어났다.

아빠는 딸과 아들이 모두 있으니 엄마와 상의도 하지 않고 바로 정관 수술을 받았다.

그런데 남동생이 돌이 지나자마자 1991년 여동생이 태어났다.

둘만 낳아 잘 기르자고 셋째부터는 건강보험도 안 해주던 시대였다.

하필 백말띠라 역대 최악의 남녀 성비 100:116.5를 기록했던 무렵이었다.


아빠는 눈 한 번만 딱 감고 죄를 짓자고 했으나 엄마는 울며 절대 안 된다고 버텼다고 한다.

내가 동생이라는 것이 정확히 무엇인지 모를 때부터 곁에는 이미 동생이 있었다. 그것도 둘이나. 이것이 나에게는 큰 무게였다. 짐이라고 생각한 것은 청소년기가 되어서였고, 성인이 되어서는 선물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하지만 내 딸에게 동생을 낳아주고 싶지 않다. 대학을 졸업하고 가정을 꾸리기까지 나를 구성하는 정체성 중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이 연년생 남동생과 여동생이 있는 삼 남매의 장녀라는 이름이었다. 콤플렉스까지는 아니어도, 난 항상 이 정체성을 특이하다고 생각해 내가 특별하다는 착각을 자주 했다.


세 돌만에 동생이 둘이나 생겼으니 엄마 품은 더 이상 차지할 수 없게 되었다. 본래 타고난 성격 상 엄마에게 그렇게 집착하지는 않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엄마 말씀에 따르면 오른쪽 팔은 여동생이, 왼쪽 팔은 남동생이 차지하고 나는 엄마 다리를 잡고 잤다고 한다.


우리 셋은 1995년, 1996년, 1997년에 각각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엄마는 그야말로 연년생을 셋이나 길러내야만 했다. 불행히도 우리 엄마 아빠는 가부장적인 동시에 베이비붐 시대에 태어난 사람이었다. 아빠는 가장으로서 돈을 벌어 자기만 바라보는 네 식구를 먹여 살리는 것 '하나'에 온 마음과 정성을 다했다. 엄마는 딸이 여섯인 집의 셋째 딸로 친정의 도움을 거의 받지 못하고 그냥 혼자서 어린아이 셋을 키워내야만 했다.


다행히 막내 여동생이 태어날 무렵부터 아빠가 다니던 회사가 더욱 번창하였다. 특근과 잔업이라는 것이 생겼고 아빠는 수당을 더 받기 위해서 샛별을 보며 출근해 밤늦게 퇴근했다. 하지만 단 한 번도 기저귀를 갈아주거나 식당에서 우리가 밥 먹는 것을 도와주거나 한 적은 없었다.


엄마는 20대에 서울에서 직장 생활을 하다가 결혼할 나이가 되어 선을 보고 여덟 번 만나본 남자와 결혼을 했다. 막상 결혼을 하고 나서야 아빠가 모아둔 돈이 한 푼도 없고 집안에 빚만 많고 신혼 월세방을 구할 보증금도 없는 남자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엄마는 직장 생활하며 모았던 돈으로 단칸방을 얻었고, 그곳은 엄마의 막내 고모가 사는 내덕동이었다.


괴산 할머니가 소수면으로 시집을 와서 처음 시어른들께 인사를 드리는데 시어머니 무르팍에 무슨 꾸러미 같은 것이 있다고 하셨다. 그 꾸러미는 다름 아닌 세 살 먹은 막내 시누이였다. 괴산 할머니는 스물한 살에 시집와 세 살 시누이 기저귀를 빨며 키웠다. 막내 고모할머니는 우리 큰 이모와 함께 초등학교를 손 붙잡고 다녔다. 형제가 너무 많은 집의 관심받지 못하는 셋째 딸이었던 엄마는 자연스레 어릴 때부터 같이 큰 착한 막내 고모를 의지했을 것이다.


엄마는 남동생이 태어난 뒤부터 더욱 본격적으로 천방지축 날뛰는 (몰래 집 밖에 나가 동네를 돌아다니고 온갖 개구멍을 탐색하고, 비가 내리면 진흙 웅덩이에 가서 주저앉는) 큰 녀석을 말리느라 피가 마를 지경이었다고 한다. 그때 엄마를 도와주는 유일한 분은 막내 고모할머니였다. 엄마가 바로 여동생을 가져 그악스러운 입덧으로 피골이 상접할 때 국을 끓여주고 반찬을 가져다준 분도 막내 고모할머니였다. 그래서 나는 종종 막내 고모할머니 댁에 맡겨졌다.


고모할아버지는 고모할머니만큼이나 착하고 좋은 분이었다. 처조카 손주를 늘 웃는 낯으로 사랑으로 대해주셨다. 나는 우리 아빠보다 고모할아버지가 더 편안했다. 그곳에 가면 오빠들이 늘 나를 귀여워해 줬다. 나랑 겨우 일곱 살 차이인 막내 인수 삼춘만 뾰로통했다. 정확히는 엄마와 4촌이니 5촌 당숙이지만 나는 이날 이제껏 진수 삼춘, 동수 삼춘이라고 부른다.


고모할머니는 당시에 그래도 제법 풍족하셨다. 내가 가면 그때 돈으로 하루에 천 원씩 든다고 하셨다. 나는 집에서는 입에도 안 대던 우유를 거기에 가면 천 미리씩 마셨다고 했다. 고모할머니는 도로가에 2층짜리 작은 주택을 지으셨다. 1층은 세를 주는 상가가 있었고 상가 뒤로 가파른 계단을 돌아 2층으로 오르면 고모할머니가 나를 맞아주셨다. 고모할머니 댁에는 늘 시원한 미숫가루가 있었다. 고모할머니는 내가 오면 은색 주전자에 미숫가루를 타고 얼음을 넣어 시원하게 따라주셨다. 아주 꾸덕하게 진하고 달큰한 여름의 맛이었다.


하루는 내가 고모할머니 등에 업혀서 마실을 갔다가 돌아오는데 느닷없이 떼를 썼다. 장난감 사주기로 약속하지 않았냐고 울고불고했다. 엄마는 나중에 그 말을 전해 듣고 신기해했다. 내가 단 한 번도 장난감을 사달라거나 먹을 것을 사달라고 떼를 쓴 적이 없다고 했다. 엄마는 나중에 손녀딸을 돌봐주다가 아이가 떼를 쓰면 종종 너희 엄마는 안 그랬다고 타일렀다. 나는 속으로 딸아이가 엄마와 할머니에게 떼를 쓸 수 있어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날 고모할머니는 나를 업고 문구점에 가 소꿉놀이 장난감을 사주셨다. 나는 그것을 신줏단지 모시듯이 소중히 품고 가지고 놀았다. 때로는 찻잔에 호박죽을 끓였다며 고모할아버지께 드리기도 했다. 더운 날 공업사에서 일하다 점심을 드시러 오시곤 하던 고모할아버지는 맛있게 먹겠다고 내 찻잔을 받으셨다. 안방 벽에 기대어 벨트를 풀고 러닝셔츠 차림으로 선풍기 바람을 쏘이시다가 나를 보고 웃던 고모할아버지. 그 소꿉놀이 장난감은 중학생이 될 때까지 소중하게 내 곁에 있어주었다.


고모할머니와 고모할아버지는 여태껏 그곳에 사신다. 운전을 해서 내덕동을 지나갈 때 주유소 옆 고모할머니 댁이 보인다. 그럼 나는 매번 남편에게 얘기한다. 여기 우리 고모할머니가 사신다고. 옥상 위 수많은 화분들을 헤치고 잘 안 열리는 뻐거운 쇠문을 열면 아직도 식탁 위에 차가운 미숫가루가 있을 것만 같다.


배경 사진 photo by @진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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