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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범준쌤 Dec 18. 2017

서른즈음에

스무살 때 서른은 내게 멀고도 먼 미래였다. 10년 후엔 어떤 모습일지 친구들과 농담삼아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 허무맹랑한 이야기도 많았다. 공통적인 건 지금의 미성숙함이 사라지고, 완성된 무언가를 서른에 지니고 있을 거라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막상 그 나이가 되고나니 아직도 나는 미성숙한 사람이었다. 아직 불안하고, 여전히 미래를 걱정하는 어른아이가 됐을 뿐이다.  


열아홉에서 스물이 되는 것과는 차이가 컸다. 스물아홉에서 서른이 되는 부담과 책임감에 비할 바는 못됐다. "이렇게 살 수도, 죽을 수도 없는 나이"라는 최승자 시인의 표현에 고개가 절로 숙여졌다. 정말 이렇게 살 수도, 죽을 수도 없는 나이였다. 대학을 졸업하고 취업해 일을 하고 있었지만 이게 맞나 싶었다. 정녕 이 길이 내가 걸어가야할 길인지, 이 월급으로 집은 살 수나 있을지 등 현실적인 고민들이 여러겹으로 포개어 내게 펼쳐져 있었다. 때론 자신감이 넘치다가도, 어쩔 땐 모든 게 무너져버릴지도 모른다라는 불안과 공포가 나를 압도했었다. 


그래서 2년 전 지인이 기획한 '서른즈음에' 행사에 처음으로 참석하게 됐다. 과연 내 또래들은 어떤 고민들을 하고 있는지, 나만 이렇게 불안해 하는지 알고 싶었다. 처음 본 사람들과 함께 '일', '사랑', '미래' 등 여러 중요한 키워드들로 이야기를 나누었다. 다양한 사람들이 들려주는 다양한 20대 이야기들이 있었다. 그리고 그곳엔 꿈과 희망, 좌절과 실패, 성공과 기쁨 등이 가득했다. 그들의 이야기 속에서 나의 모습이 포개어져 보였다. 모두 다른 20대를 보냈지만, 지금의 심정은 엇비슷했다. 물음이었다. 스스로에게 하는 깊은 물음.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나는 누구인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이 우리 마음 속에 가득했다. 그래서일까, 처음 본 사람들이었지만 희한하게도 이야기가 잘 통했다. 시간이 훌쩍 지나버려 행사가 마칠 시간이 되었다는 게 너무나도 아쉽게 느껴질 정도로 말이다. 


결국 혼자 감당하고, 감내해야 할 불안감이자 나의 일이지만 함께 이야기를 나누니 묘한 위로와 위안을 받았다. 그리고 우리가 그 자리에서 나누었던 꿈과 목표들을 그 다음해 또 이 자리에서 만나 이야기꽃을 피울 생각을 하니 설레기도 했다. 꿈의 동반자까지는 아니더라도, 응원해줄 수 있는 친구를 여럿 만날 수 있었다. 거창하지 않더라도, 누가 인정해주지 않더라도 스스로 행복해질 수 있는 무언가를 각자가 찾기를 바랬다. 그리고 1년 후, 2년 후, 혹은 그 이상이 걸리더라도 결국은 그렇게 되리라 믿는다. 서른은 서서히 어른이 되어가는 과정이 아닐까. 현실과 타협하여 꿈을 포기하든, 타협하지 않고 꿈을 지키든 우리 모두가 '자기다움'을 찾아가며 자기만의 속도로 어른이 되어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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