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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범준쌤 Aug 05. 2018

불완전한 사람들의 가면, 가면의 불완전함

 우리는 치장을 한다. 가면을 쓴다. 타인에 대한 유혹 이전에 자신에 대한 위로이다. 이렇게라도해서 초라하고 볼품없이 느껴질 때의 일상속 나를 특별하게 만든다. 치장을 쓰고 가면을 쓰는 것이 나쁜 것은 아니다. 상황에 어울리는 치장과 가면은 오히려 빛을 발할 때가 있다. 하지만 치장과 가면이 허한 속을 채울 수는 없다. 인스타그램과 페이스북 등에 여러 하이라이트 장면을 올리고, 빛나는 순간을 기록할지라도, 그 장면과 순간은 지나가게 되어있다. 일상은 인스타와 페이스북 사진과 다르다. 적절한 필터와 각도와 조명으로, 이야기로 연출된 사진과 영상은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그들의 일상 역시도 그럴 거라고. 나와는 다르게 특별하고, 의미있고, 재미있는 일상을 살아갈거라고 생각이 든다. 근데 놀라운 건, 또 다른 누군가는 나의 SNS를 보고 나를 그렇게 생각할 수 있다는 것이다. 지루하고, 무기력하고, 불안한 순간을 제거하고 편집해, 재미나고 신나는 순간으로 포장된 글과 사진, 영상은 나를 다른 사람으로 만들곤 한다. 진짜 나와 대면하는 시간은 줄어들고, 온라인 속의 가짜 나에 대한 반응과 댓글들 속에서 나를 발견하려 한다. 


  나의 페이스북 타임라인을 쭈욱 내려가다보면 스스로 자아도취되거나 멋지게 보이려는 과거의 글들이 보이곤 한다. 요즘 그런 글들을 지양하는 편이지만 아직도 조금 남아 있다. 예전에는 '내가 이렇게 잘났어', '요즘 바쁘게 잘 살고 있어'라는 식의 메시지였다면 요즘은 그 반대의 글로써 나를 또 포장하는 것 같다. 아마 '솔직함'으로 포장된 또 다른 치장이 아닐까. '내가 이 정도로 솔직하게 이야기 할 수 있어', '치장하는 것따위는 하지 않아' 등과 같은 말과 글들로 말이다. 아직까지도 중심을 나에게 온전히 두지 않고 타인에게 두고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솔직하게 말하면 사람들이 나를 더 잘 이해하고, 잘 대해주겠지. 인정해주겠지'라는 생각이 마음 속 깊은 곳에 있다. 기쁨의 가면을 벗었더니, 슬픔의 가면이 있었고, 그 가면을 벗었더니, 솔직함의 가면이 있었다. 근데 이제 가면이라기보다는 그때의 감정에 도취되거나, 몰입할 때 나오는 말과 행동 그 자체다. 그 말과 행동의 근원은 '타인'에게 갈구하는 인정과 사랑이었다. 


 근원의 시작은 우리 가족들이다. 어렸을 적 평범한 집안의 평범한 아이로 태어났다. 그렇게 화목한 집안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불행한 집안도 아니었다. 하지만 아직도 기억나는 건, 가족들에게 칭찬을 많이 받고 자라지 못했다. 특히 아버지에게는 더더욱 그렇다. 무엇을 잘 했을 때 '잘했다. 수고했다'는 말보다 '그건 중요하지 않다. 별거 아니다' 라는 말을 많이 들어왔다. 오히려 머리스타일은 왜 그러냐, 옷 입는 건 왜 그러냐며 지적당하기 일 수였다. 직업군인이셨던 아버지의 눈에는 나의 강점보다는 단점이 더 많이 들어왔었던 것 같다. 그때 충족되지 못한 인정 욕구가 아직 남아 있는게 아닐까 싶다. 

  또한 유머러스함이 가득하지만 솔직하게 자기의 힘듬과 속내를 한번도 이야기 하지 않았던 아버지의 모습을 보고 자라면서, 그 모습을 조금씩 닮아가고 있었던 것 같다. '범준이 너를 잘 모르겠다'. '선배는 보이지 않는 벽이 있는 거 같아요' 등의 말을 몇몇 사람들에게 들었던 건 어린시절부터 나의 힘듬과 어려움을 쉽게 표현하지 못했던 성향때문이었으리라. 근데 흥미로운건, 이런 센서티브하고 미묘한 감정을 느끼는 사람들 자기 자신에게도 그런 면이 있다는 것이었다. 상처를 입어본 사람만이, 상처 입은 사람들을 잘 발견하듯이 말이다. 

  그 말을 처음 들었을 땐 충격이었다. 10년 지기 친구에게 '너를 잘 모르겠다'고 들었으니 복잡미묘한 생각이 들었다. 그때부터 조금씩 표현해왔다. 나를 드러냈다. '솔직함'의 가면을 쓰든, 쓰지 않든 중요한 건 스스로에게 좀 더 솔직해지고, 타인들에게 취약함을 드러냈을 때 오히려 더 개운하고, 그때의 내 모습이 더 마음에 든다는 것이다. 어느 순간부터 '타인'에 두었던 무게중심을 '나'에게로 조금씩 옮겨 오고 있었다. 가면 따위는 이제 잘 생각안하게 됐다. 여러 가면을 쓰고 있는 나조차도 나니까 말이다. '이렇게 말하면 남들이 나를 이렇게 볼거야'라는 불안감과 두려움은 아직도 있지만, 그래서 뭐 어쩌라고 정신도 단단히 생겼다. 모든 사람들에게 인정받을 수도 없고, 사랑받을 수 없으니 내가 스스로를 인정하고, 사랑할 수 밖에 없다. 


 겉과 속이 다른 사람들, 가면을 쓰고 괜찮은 척 하는 사람들, 불안함과 두려움에 압도당해 금방이라도 지쳐 쓰러질 거 같지만 가족들에게조차 그 말을 못하는 사람들. 그 사람들이 나이고 당신이고, 우리이다. 긴 인생을 살진 않았지만, 여러 인간 군상들을 보면서 느낀건 완전하고 완벽한 사람은 없다는 걸 깨달았다. 오히려 완전하고 완벽한 사람이 되려는, 자기가 설정한 이상적인 모습이 되려는 사람들이 절망하고 좌절하고, 무기력해지는 경우를 더 많이 보았다. '나는 아직 ~하기에 충분하지 않아', '행복하려면, ~이 되거나 이루어야되' 라는 생각은 뫼비우스의 띠처럼 계속 반복된다. 있는 그대로의 나를 인정하고, 밑바닥에 있는 말을 스스로에게 내뱉을 수 있을 때야말로 '성장'과 '변화'의 제대로된 시작점이다. 뫼비우스의 띠 안을 아무리 빠르게 뛰어가도 그 끝은 나오지 않는다. 너무 뻔하고 진부한 말이 되어버린 존재 그 자체의 존귀함, 그것을 일상에서 실현해나갈 때 뫼비우스의 띠를 벗어나 나의 길로 들어서지 않을까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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