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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창일 Feb 14. 2019

'겸손하다'의 정의

인생을 이해하는 내 나름의 방법

    사전적 정의가 내려진 무수한 단어들이 있지만, 가끔 내 나름대로 정의를 내린 단어들이 있다. ‘겸손하다’는 것의 정의는 무엇일까? 사전에는 ‘남을 존중하고 자기를 내세우지 않는 태도’라고 되어있다. ‘겸손’ 혹은 ‘겸손하다’라는 단어가 주는 의미가 나에게는 비슷한 듯 다른 여러 가지로 느껴지기에 잠시 적어보고자 한다.

 

    아주 예전에 누구였는지 기억도 잘 나지 않는 사람으로부터 겸손이란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을 드러내지 않는 것', 혹은 '자랑하지 않는 것'이라고 들었다. 맞는 듯하지만, 나 스스로 부족함을 느끼는 정의였다. 처음부터 자랑하다가 나중에 망신당하는 것보다는 조용하게 지내다가 나중에 빛을 발하는 편이 훨씬 좋다고 할 수 있겠지만, 그것은 겸손보다는 대인관계에서의 예의 같은 조금은 다른 문제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튼, 그 사람이 내린 겸손에 대한 정의는 '할 줄 아는 것을 당당하게 표현하는 요즘'과는 조금 맞지 않았다. 적어도 요즘의 나에겐 말이다. 겸손 그 자체가 때로는 가식처럼 느껴진다고 할까? 겸손을 풀이할 때, '자랑'이라는 자극적인 단어 대신 '자신감'으로 뜻을 풀이하면 뜻이 달라져 버린다. 어떤 상황에서 나를 감추고 남을 돋보이게 함으로써 나타나는 긍정적인 효과가 딱히 생각나지 않는 느낌이다. 나는 그 정의가 왠지 나의 삶 속에서 겸손의 의미를 정확하게 설명해주지 못한다는 생각을 줄곧 해왔다. 여러 가지 쓸데없는 불편함을 느끼는 중이었다. 이제 와 돌이켜보니 나 스스로 만족하지 못한 이 정의가, 나를 얽매이게 만들었다.


    겸손한 사람이 되어라. 이런 말이 추상적으로 느껴졌다. 사전적 정의 말고 현재 시점의 나에게 정확한 설명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니고 굳이 정의를 내려야 할 필요도 없다. 하지만, 뭔가 아닌 것 같으면서 다른 정의를 딱히 내릴 수 없어서 나를 찜찜하게 만들어온 이 정의를, 이제는 다른 방향으로 내려 보기로 했다. 내가 내린 ‘겸손하다’의 새로운 정의는 다음과 같다. 



    겸손이란, ‘거저 주어지는 것에 대한 감사가 깔린 행동’이다. 지금 시점의 나는 그렇게 결론지었다. 극단적인 예를 들자면 누구나 숨을 쉬어야 한다. 그러나 그 누구도 자기가 쉴 산소를 매일 만들고, 챙기지 않는다. 이런 자연으로부터의 거저 받음에 대한 감사가 하나이다.


    둘째는, '일과 관련된 성공을 내 노력의 쟁취라고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그것은 많은 어려움과 운이 교차하는 과정이며 무수한 사람들의 노력과 소비가 필요했던 일이기 때문이다. 아주 희박한 운이 제때 따라주지 않으면 성공이란 거머쥐기 힘들다. 내가 쟁취한 것 같아도, 그것을 인정하고 소비해주는 사람이 있어야 성공이 누적될 수 있다. 물론 그 기회를 쟁취하기 위한 노력이 수반되어야 하겠지만, 거저 주어지는 것의 의미가 확장되면 ‘운’도 포함된다.


    셋째는, '모든 재화와 서비스가 당연히 주어지는 게 아니라는 생각'이다. 택시를 타고 목적지에 다다를 때 '감사합니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기사님은 뭐가 감사하냐, 돈을 버는 내가 더 감사하지 않느냐 되물었다. 나는 내가 돈이 있어도 택시 서비스가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질 않으냐고 또 물었다. 기사님은 끄덕이고 나는 택시에서 내렸다. 덧붙이자면, 내가 말하고 싶은 ‘거저 주어진다’는 것은, 무전취식, 불로소득 같은 것을 의미하는 게 아니다. 나의 밖에 있는 존재로부터 대가 없이 받은 것이라고 해두고 싶다. ‘겸손’ 혹은 ‘겸손하다’라는 말의 뜻은, 내가 앞서 말한 의미들을 바탕에 둔 행동이라고 정의하고 싶다.


    단어라는 것은 일종의 약속이기 때문에, 사전적 정의가 가장 우선이라 하겠다. 하지만 이렇게 개인적으로 내린 단어의 정의 하나로 인해서, 그동안 정확하게 설명할 수 없었던 나와 내 주변의 일들이 해석되는 계기가 되었다. 지극히 개인적인 생각일 뿐이니 심각하게 받아들일 필요는 없다.


    누군가에겐 비생산적인 사고일 수 있고, 논리적으로 맞지 않는 결론일 수 있다. 단어라는 것은 꽤 그럴듯한 장치이면서도, 의미 전달에는 분명 한계가 있다. 단어로 표현하기 힘든 내 어떤 부분을 새로운 정의로 내려 보고 싶었나 보다.


    나이를 먹어가면서 인생의 알 수 없는 일들이 새롭게 해석되고 맞아떨어질 때가 있다. 그 수수께끼를 푸는 방법 중에 단어의 재정의라는 방법이 하나 있음을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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