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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창일 Feb 14. 2019

어중간한 재능

재능의 발견과 실패. 친구와 대화 중 남겨진 생각들

친구는 이상적인 세상과 현실 속 세상, 사회적 시스템의 부조리함 등 여러 가지 생각을 이야기했다. 그중에서 중고등학교 시절, 정부의 교육 슬로건 이자 그 친구가 믿었다던 '한 가지만 잘해도 되는 세상'이라는 내용이 기억에 남았다.



     "한 가지만 잘해도 되는 세상"  



당시 힙합 음악에 심취했던 그는 가사를 쓰고 노래를 만들어 녹음하여 인터넷 커뮤니티 등에 업로드를 하고 나름의 순위권에도 진입했었다. 하지만 친구들 사이에 들려준 적은 있었어도 이렇다 할 크고 굵은 이미지로 기억에 남는 것은 없었다. 그 당시 그런 걸 했었지 정도로 기억은 하고 있는 정도였다. 


친구들은 몰랐지만 본인 나름대로는 열심을 다해 기획사에 노래를 보내 보기도 하는 등의 노력을 했다 한다. 하지만 큰 수확은 없었던 것 같다.


 그러면서 그는 당시 정부의 교육 정책 슬로건이었던 '한 가지만 잘하면 되는 세상'을 굳게 믿었노라 말했다. 그리고 힙합 음악에 심취했지만 뭔가 이뤄진 것은 없었다 라는 '느낌'의 이야기를 했다. 내가 '느낌'이라고 적은 것은 이야기에서 들었던 핵심을 내 나름대로 이렇게 정리했기 때문이다. 친구 본인은 다르게 말했을 수도 있다는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 이것은 오히려 내 나름대로의 '혼자 정리'이자 '개인적인 해석'이면서 결국 '재해석' 된 것이다. 


친구가 했던 여러 가지 이야기가 며칠간 머리에서 맴돌았는데 위의 내용에 이어서 든 두 가지의 생각을 적어두고자 한다. '친구의 생각'이 아닌 '내 생각'이다. 



하나. 사회 시스템을 바라보는 학창 시절 친구의 관점이 흥미롭다.  


어쩌면 어른들이 말했던 교육 슬로건에 '꽂혔던' 그 친구는 나름의 '상처'를 받은 셈이었다. '하나만 잘해도 되는 세상'을 만들겠다던 어른들의 말을 철석같이 믿었던 나였는데 결국 실패를 맛보았으니까. 그는 당시 교육 정책을 믿었던 자신을 되돌아보며 본인과 같은 상황을 겪을 다음 세대를 위한 재능의 '조력자'가 되고 싶다 말했다. 그것이 창업으로 이어질지는 시간이 보여줄 테지만 일단은 그렇다. 


보통 청소년기(일반적인 학창 시절)에 경험하는 재능의 발견 과정은 여러 가지 흥미를 느끼는 분야에 대한 경험(시도)을 통해 실패와 성공, 또래 집단과의 성과 비교(놀이 등) 등을 통해 이뤄진다. 그 과정에서 나 자신이 가진 재능에 대한 확신 혹은 부족함을 이해하고 받아들이게 된다. 이것은 개인적인 경험에 기반한 정리이지만 꽤 맞는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 친구는 하나를 더하고 있었다. '외부 요인'인 '교육 정책'을 비판하고 있다. 당시의 나는 그저 '저런 정책이 있구나' 하고 흘려들었던 것을 다르게 보는 나름의 신선한 시각이었다. 


학생이라고 교육 정책을 비판하지 말 이유는 없지만, 뭔가 묘한 모양새라는 생각은 지울 수 없었다. 구체적인 정책 세부 사항에 대한 비판이라면 몰라도 재능을 찾는 과정은 지극히 개인적인 것이라고 생각하는 나였기에 뭔가 비판의 관점이 맞는가에 대한 의문이 계속 들었다. 나로서는 친구가 세상을 보는 방식이 조금 성급하다거나 개인적인 것을 외부의 탓으로 돌리는 것이 아닐까 싶은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그것이 나에게는 신선한 관점이었고 세상을 변화시키고 싶어 하는 친구의 원동력 같은 것이기에 흥미로운 부분이었다. 


당시 나는 어땠나? 학창 시절의 나는 교육 정책을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사실 별 생각이 없긴 했다. 이제와 돌아보면, 그때 정책(슬로건)에는 분명 문제가 있었다. 이상적인 문구로 그럴듯하게 포장했지만 결국 그런 세상은 오지 않았다. 다르게 얘기하면, 하나만 잘해서 성공한 사람은 늘 있어왔다. 그러나 모두가 그렇지는 못해왔기 때문이다. 예전부터 한결같이 굴러온 세상에 새로운 것처럼 포장해 놓은 것이 '그럴듯한 슬로건' 아닐까.(요즘은 여러 가지를 잘해야 하는 시대라고들 말하는데, 여러 가지를 잘해서 성공한 사람은 과거에도 있었다. 이것은 조금 다른 얘기라 더 적지는 않는다.) 


'슬로건'이라는 것은 정책을 펼쳐갈 이상적인 방향을 제시하고 그렇게 되고자 '노력'하겠다.라고 말하는 것뿐이지 구체적인 목표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세상은 단 한 마디로 정의될 수 없는 작은 톱니바퀴들로 구성되어 있다. 당시 교육 정책을 디자인했던 사람들도 슬로건을 구체화시키기 위한 정책들을 나름대로 고민하고 만들었을 것이다. 그것의 실현 여부나 순수성은 차치하고 서라도 말이다. 


시간이 지나야 만 이해할 수 있는 것들이 있는데, 결국 그 당시에는 어떤 키워드 하나에 꽂혀서 보지 못했던 것을 이제야 친구를 통해서 보게 되었다. 내 친구는 순수했다. 순수했기에 노래에 열정을 다 했을 것이다. 그 열정의 크기가 어느 정도였는지는 남이 판단할 일이 아니다. 그 시간은 그가 성숙하기 위한 과정이었을 것이다. 의미 없는 시간은 아니었을 것이다. 가치관을 형성하는 여러 가지 관점이 형성되던 시기였을 것이다. 덧붙여 나에게는 새로운 관점을 가진 친구의 시각이 꽤나 흥미로웠다. 




둘. 나이를 먹으면서 여러 가지 생각의 변화 지점을 맞게 되는데, 그중 하나인 '재능의 인정 과정'이 30대인 지금도 계속 진행 중이라는 점이다.


나는 어렸을 때, 아버지로부터 영향을 받아온 미술적인 재능(관심) 덕분에 주변 친구와 선생님들로부터 칭찬을 많이 받았다. 하지만 나이를 먹을수록 그것이 내 발목을 잡는 '어중간한 재능'이라는 불편한 사실을 받아들여야만 했다. 


인터넷 커뮤니티에 돌아다니는 '어중간한 재능'에 대한 에피소드를 읽은 적이 있다. 너무 뛰어나지도, 못하지도 않은 이런 재능은 결국 피라미드의 꼭대기를 차지한 몇 사람을 돋보이게 만들어주는 들러리가 될 뿐이며, 그 사실을 직시하지 못했던 세월 때문에 인생을 심각하게 낭비하고 만다는 것이다. 그런 사람들의 성장 루트는 결국 적성과 맞지 않는 경제 활동을 하며 취미 정도로 재능에 대한 욕구를 삭힌다는 정도이다.  


이제야 알고 있지만 내게 주어진 재능은 오히려 나에게 주어진 어중간한 여러 가지 재능들을 잘 조합하는 것이다. 그것이 영상 제작에는 큰 도움이 되고 있다. 글을 쓰는 것부터 촬영, 편집, 그래픽 적인 요소의 제작 까지. 어중간하지만 혼자 해결할 수는 있을 정도여서 오합지졸이긴 해도 꽤 유용하게 사용하고 있다. 내 인생에 화려한 꼭대기가 없을지라도 만족할 수 있는 하나의 구심점이 되기도 한다. 


나도 나이를 먹으면서 내 부족한 부분을 인정하며 성장해왔는데, 같은 나이인 친구의 말을 듣다 보니 역시 그도 여전히 자신의 '강점' 혹은 '장점'을 찾아가는 것처럼 보였다. 


자신을 직시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나 역시도 친구들과 모여 이야기하면서 나 자신의 들보는 보지 못하고 아쉬운 소리만 했으니까 말이다. 친구는 여전히 힙합에 대한 재능을 잠시 미뤄둔 것일 뿐 포기했다고는 말하지 않았다. 욕심이 많은 것인지는 몰라도 그래도 뭔가는 해보았으니 재능이 없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것이 나중에 어떻게 표출될지 모르는 일이기는 하나, 남들을 제쳐두고 혼자 빛나서 발견될 엄청난 재능은 아니었음이다. 발견되지 못한 천재성이었을까에 희망을 가질 수 있겠지만, 슬프게도 현실이며 받아들여야 하는 어중간한 재능이고, 나쁘게 말하면 '단순히 좋아했던 것'일 수도 있다. 


예전에도 '나의 부족함을 인정하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에 대해 쓴 적이 있다. 사회 시스템의 변화를 통해 일정 도움은 받을 수 있을지 몰라도, 결국은 내면의 힘이 없으면 극복해 나갈 수 없다. 


시골에서 작은 트럭에 온갖 물건을 싣고 장사하는 분이 계셨다. 취재차 만났던 그 사장님은 장사 수완이 좋아서 가게가 잘 될라 치면, 건물 주인들의 극성으로 쫓겨나기를 여러 번이었다고 한다. 결국 큰 빚을 들여 마트를 운영했지만 망하고 말았다. 지역 일대를 유통으로 주름잡겠다는 젊은 시절의 꿈은 '이 트럭이 내 그릇이지 뭐. 이게 내 가게야'라는 한 마디의 깨달음으로 성장해 있었다. 


60대 이신 그 사장님의 이야기가 문득 생각났다. 자신의 그릇을 빨리 깨달았다면 지금의 소탈한 자유로움에 더해 몸과 마음의 빚도 없지 않았을까. 늘 드는 생각이지만 어째서 인간은 시간이 지나도 이렇게 한결같은 굴레를 벗어나지 못할까. 나이를 먹어가며 드는 생각을 다음 세대에 물려준다고 해도 결국 제 힘으로 번거롭게 체득해야만 앞으로 나아가고 또 반복된다.


친구가 긴 시간을 들여 말했던 교육 정책과 개인적인 성취의 좌절, 그 후 계속된 사회 경제, 교육체계와 원리에 대한 호기심과 독서 등을 통한 탐구... 그런 경험들이 모여 퇴사와 창업을 준비하는 지금 친구의 모습을 만들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그의 이야기를 들으며 결국 나 자신의 모습을 돌아본다. 다른 친구는 어땠을까. 지금 나와 비슷한 세대들이 겪고 있는 고민들이 이런 것들 이겠지만, 그래도 조금씩 다들 비슷한 고민을 하면서 성장하고 있구나 생각하니 조금은 '아쉬운 안도감'이 든다.



말을 많이 하지 말자고 늘 다짐했으면서 연초부터 안 해도 될 말들을 쏟아냈다. 말이라는 것은 의도를 정확히 전달하지 못함과 동시에 약간의 오해 혹은 아쉬움을 남기며 끝나버린다. 오늘도 내 눈의 들보를 망각한 채 무식한 조언을 늘어놓은 꼴이었다. 하지만, 한 가지 기억에 남는 대화가 있기에 그것을 적어본다. (글이라고 다를 게 무엇이겠냐 마는 혼자의 생각을 정리해보는 개념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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