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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창일 Feb 16. 2019

할아버지를 추모하는 방법

며칠 전 외할아버지의 5주기 날이었다. 오랜만에 외할머니댁에 모인 가족들이 기독교식 추모 예배를 드리고 식사를 하게 되었다. 할머니께서 준비하신 여러 음식을 먹으며 문득 매년 똑같이 흘러가는 추모의 시간이 덧없게 느껴졌다. 모여서 형식적인 예배를 드린 후, 밥을 먹고 헤어지는 것이... 


그래서 나는 한 마디 하게 됐다. 


“이따가 커피 마시면서 각자 할아버지와 있었던 추억 같은 걸 얘기해보면 어떨까요?” 


처음엔 다들 안 해봤던 이야기 주제인지라 으잉? 하는 반응이었지만 이내 분위기는 ‘그렇게 한 번 해보지 뭐’로 바뀌며 뜻이 모아졌다. 



커피가 준비되고 나는 임시 사회자가 되어 할머니께 첫 번째 발언 기회를 드렸다. 할머니께 할아버지와의 추억 하나를 얘기해주십사 했는데, 할머니는 각자 돌아가면서 기도를 하자는 이야기인 줄 착각하셨고 간단한 기도를 해주셨다. 


나는 그것도 좋았다고 말씀드리면서 두 번째 발언 기회를 이모에게 주었다. 할 이야기가 별로 없다고 운을 뗀 이모는 잠시 생각하더니 할아버지에게 혼난 기억들을 이야기했다. 다음 발언자인 어머니도 뭘 말할지 모른다는 표정을 짓다가 이모 때문에 생각이 났는지 할아버지의 틴케이스 저금통에서 동전을 몇 개 빼다가 혼쭐이 났던 이야기를 했다. 그것이 유일하게 할아버지에게 혼났던 기억이며, 평소에는 첫째 딸이었기에 엄청 예쁨 받았었다고 했다. 할아버지와의 이런저런 추억을 서로 이야기하며 뭘 말할지 모르겠다던 분위기는 금세 무르익었다. 나중에는 어머니로부터 외할머니와의 일화까지 꼬리를 물고 나왔다. 어머니는 어렸을 적, 당시 귀했던 설탕을 꺼내 먹었다고 아주 크게 혼났던 것이 지금까지 생각난다고 말했다. 나는 할머니께 사과하시라고 농담을 건넸고, 할머니는 그동안 새까맣게 잊었는데 아무튼 어머니에게 미안 하노라 하셨다. 


나머지 가족들도 할아버지와의 크고 작은 일화를 떠올리며 나름의 의미 있는 추모 시간이 되었다. 


얼마 후, 나는 오늘 이런 시간을 가졌으면 했던 이유를 말하며 마무리했다. 여러 영화 속 장례식 장면에서 고인에 대한 추억을 서로 나누는 모습을 보곤 했는데, 그게 참 좋은 추모 방법이라는 생각과 함께 가벼운 마음으로 해보고 싶었노라고. 


예상하지 못했던 나름의 긍정적 효과(?)도 있었다. 사실 외할머니와 어머니의 관계는 표면적으로 나쁠 것이 없어 보이지만, 그 속에는 해결되지 못한 어린 시절의 서운함과 갈등 같은 것이 있다. 말다툼이 벌어질 때면 외할머니는 ‘나는 미안한 것이 전혀 없다.’며 선을 긋곤 하셨다. 선하고 자식밖에 모르는 외할머니였지만 나로서는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었다. 그런데 할머니의 ‘미안하다’ 한 마디가 어떤 목적이었든 간에 어머니에겐 작은 위로의 씨앗이 된 눈치다. 할머니는 단지 기억이 나질 않아서 미안하지 못했던 것일 뿐이었다. 


결국, 추모 시간의 중심이 된 것은 돌아가신 할아버지가 아니라 살아있는 가족들이었다. 할머니께서도 할아버지에 대한 가족들의 생각과 시간, 여러 가지에 고맙구나 하셨다. 


글로 적어서 그렇지 가족들의 발언 시간은 서로 말을 자르며 신이 나서 언성이 높아지는 등 대체로 정신없는 편이었다. ‘지방 방송 끄세요!’라며 정리를 하긴 했지만, 아마도 가족 간에 이런 시간을 가져본 적이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앞으로도 가족들이 모이면 공통된 추억을 끄집어낼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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