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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창일 Jul 25. 2019

가족에게 무례한 남자, 무뎌진 가족

마트 엘리베이터에서 나를 돌아보기

 마트 옥상에 주차를 하고 엘리베이터에 탔다.


‘식빵이랑 우유, 라면도 좀 사고 파스타 소스랑 닭가슴살도 사야겠다. 물은 좀 남아있었나….’


 나는 핸드폰 앱에 사야 할 것들을 표시하고 있었다.


 지하로 향하던 중에 3층에서 엘리베이터가 멈추더니 가벼운 옷차림의 가족 네 명이 들어왔다. 어린 남자아이 한 명과 부모, 그리고 누가 봐도 여자의 어머니인 똑 닮은 얼굴의 어르신이었다.


“어휴, 누굴 닮아서 이렇게 바보 같아!”


 난데없이 남편으로 보이는 남자가 아내에게 면박을 주었다. 어린 아들이 마트에서 무슨 잘못이라도 한 걸까? 짜증 섞인 말에도 아내와 장모님으로 보이는 두 사람은 딱히 반응이 없다.


 나에게 안 좋은 버릇이 하나 있다. 이런 작은 상황을 마주할 때마다 조금 무례한 상상을 하게 된다. 남의 의사나 실제 속사정은 어떤지 중요하지 않고 그냥 내 멋대로 상상하곤 하는 것이다. 최근에는 이런 사실을 스스로 알게 되어서, 마음속으로 ‘나는 아무 생각이 없다.’라고 외치며 머리를 비우려고 연습하고 있다.


 나는 가끔 토크쇼에 출연하는 상상도 한다. 진행자가 나에게 현재 일어나고 있는 상황에 대해 묻는 장면을 떠올리곤 하는데, 지금이라면 어떨까?


‘평범한 가정으로 보이는데, 사위가 장모님 앞에서 넌지시 아내를 깔보는 말을 하고 있네요.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저는 아무 생각이 없습니다.’


 막상 이렇게 대답하니 이상하다. 남자는 가족을 향해 ‘누굴 닮아서 바보인가’라고 말했다. 본인을 제외한 현장의 나머지 사람을 향한 비난과 무시이다. 아들은 이미 바보로 낙인찍혔다. 누굴 닮았느냐는 말에는 당사자인 아들이 제외되고, 아내와 장모가 남는다. 그것은 결국 가족 전체를 비난하는 말이 된다. 내 얼굴에 침 뱉는 상처 주는 말이다. 아내와 단 둘이 있어도 심한 말일인데, 그녀의 어머니와 함께 있는 상황에서 그러다니…. 남자의 말에 무뎌진 듯한 두 여성의 반응도 흥미로웠다. 아마 평소에도 그런 가시 돋친 말을 빈번하게 뱉어내는 남자인 게 아닐까? 만성적으로 일상이 되었기 때문인 걸까? 공공장소에서도 저 정도인데, 아들은 저런 말을 서슴없이 뱉는 아버지와 대답 없이 회피하는 가족의 틈에서 어떻게 자라날까. 때로는 아침 드라마처럼 밥상을 뒤엎는 폭발의 순간이 오지 않을까? 쌓아두었던 서운한 감정을 속사포처럼 내뱉는 장모의 모습을 상상해본다. 어쩌면 그냥 저렇게 남자를 유야무야 존재감 없는 사람처럼 대하며 평생 큰 사고 없이 덮어두고 함께 사는 것이 유일한 방법인 걸까? 아니면 서로 상처와 폭발을 이미 겪을 대로 겪어서 이 정도는 일상의 아무런 자극이 되지 않는 것일까? 남자에겐 아내와 장모를 하대하는 습관이, 가족들에겐 그러려니 넘어가는 습관이 들었는지도 모른다. 가족으로 살아가고 있지만 남모를 책잡힌 일이 있기라도 한가?


 생각이 없다면서 이미 상상의 불씨를 댕기고 말았다. 생각은 막을 수가 없다. ‘저는 아무 생각이 없습니다.’라고 꼭지를 잠가도 옆에서 줄줄 샌다. 착한 생각은 꼬리를 물 줄 모르는데, 무례한 상상은 줄줄이 엮인 불꽃놀이처럼 연속해서 터져 나온다. 붙잡을 수 없어 미안한 일이다. 그나마 겉으론 조용한 게 다행이라면 다행이다.



 타인은 모두 내가 상상할 수 없는 개인적인 이유를 가슴에 담고 산다. 사람을 만나다 보니 그렇다. 내 짧은 경험과 지식으로 가늠할 수 없는 속사정을 모른 채, 순간만 보고 멋대로 상상해버렸다.


 언젠가 친구가 이런 이야기를 해준 적이 있었다. 버스에 어떤 남자가 아들을 데리고 탔는데 어린 아들이 계속 떠들며 돌아다녔다고 한다. 그러나 아버지는 아이를 제지하려는 생각조차 없었고, 버스에 탄 사람들은 하나 둘 신경 쓰이기 시작했다. 한 승객이 아이 아빠에게 아이가 너무 시끄럽고 위험하니 자제시켜 달라고 말했다. 그제야 정신 차린 남자는 죄송하다며, 아내가 며칠 전에 죽어서 정신이 없었노라 사과했다. 그 얘기를 듣게 된 승객들은 아이가 아무리 무례하게 행동해도 이해해주었다고 한다. 철없는 어린것이 무얼 알겠느냐며.


 실제 이야기였는지 허구였는지 모르겠지만 충분히 있을법한 상황과 반응이다. 친구는 이 이야기를 건네면서 상황은 하나도 달라진 게 없는데 사람들 반응이 정 반대로 바뀐 것에 대해 신기하다 말했다. 그런데 나는 조금 다르게 생각했다. 아이가 산만한 상황은 그대로지만, 사람들이 가지게 된 아이와 아빠에 대한 정보는 달라졌다. 시끄러운 버스는 그대로지만 그걸 받아들이는 마음의 눈은 달라진 셈이다. 시끄러운 상황의 강력함 보다 더 크고 강력한 정보 하나가, 사람들의 감정과 시각의 변화를 만들었다.


 그래서 요즘의 나는 가끔 나 자신을 이런 방식으로 관찰해 보기도 한다. 내가 이런 말이나 행동을 왜 했을까. 거울 속 내 모습을 타인처럼 생각해본다. 나에게 있었던 어떤 사건이 지금의 나에게 영향을 미친 것일까. 어렸을 때는 잘 몰랐던 일들에 대해 조금씩 원인을 알아가면서 퍼즐을 맞춰가는 인생을 사는 것 같다. 때로는 아주 엉뚱한 것에 대한 감정이 연관 없는 상황에 달라붙어서 표출되기도 한다. 아직 모르는 부분에 대해서는 친구가 해준 이야기를 떠올리며 내가 모르는 것에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해보기도 한다. 욱하던 감정도 조금이나마 조절할 수 있게 되었다. 우연히 관심 갖게 된 정신분석 책에서 방어기제에 대한 목록을 쭉 읽어보다가 유독 꽂히는 부분들이 있었다. 상황은 달라지지 않았지만, 그걸 받아들이는 내 생각이 변했다고 할까. 남들을 보는 시선도 조금 달라졌다. 그래 내가 가늠할 수 없는 이유가 있겠지.


 나는 조용히 내 쇼핑 목록을 들여다보며 생각한다. ‘나나 잘하자.’ 남자의 무례한 말은 그치고 꺼져버린 핸드폰 화면에 내 두 눈이 비친다. 잠시 후 엘리베이터가 지하 1층에 도착했다. 나는 식품 매장으로 향한다.



BGM♪ FKJ ‘Leave My Ho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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