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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창일 Nov 25. 2019

‘부럽다’ 대신 ‘대단하다’로 고쳐 쓴 메시지

 신학대학교 입학을 준비해오던 친구로부터 메시지를 받았다. 그 친구는 경험 삼아 입학시험을 본 상태였고, 아무래도 종교적인 도전이다 보니 옛 친구 중에는 나에게만 내용을 미리 알렸던 터였다. 벌써 몇 주 전 이야기다. 당시 나는 그의 기도 부탁을 받았고, 그렇게 열심히는 아니었지만 가끔 기도를 하며 그의 이름과 내용을 되뇌었다. 시험 당일에는 ‘파이팅’을 포함한 응원의 메시지를 보내기도 했다. 그리고 친구의 메시지를 보는 순간 결과가 나왔구나 싶었다.


 메시지에 따르면, 시험 결과를 기다리던 도중에서야 놓치고 있던 다른 절차를 알게 됐다고 한다. 이미 접수가 마감됐기 때문에 다음에 다시 도전하게 됐다는 내용이 이어졌다. 어찌 됐든 이번 경험을 토대로 다음 시험을 준비하게 되었다고 하면서 응원해줘서 고맙노라 했다.


 메시지를 받고 답장을 쓰기 시작했다. 사실, 그 친구를 떠올리면 늘 새로운 사업이라든가 유학 같은, 여러 아이디어와 목표를 쏟아내는 장면이 떠오른다. 친구들 중에서도 워낙 식지 않는 열정 같은 것도 많았고, 말 자체도 많은 편이라서 특유의 에너지가 있었다. 거기에 결혼도 일찍 해서 두 명의 아이를 키우느라 바빴으며, 부부는 맞벌이 중이었다. 심지어 매일 새벽 시간을 쪼개 책을 읽고 조깅을 한다고 해서 나는 놀랐던 적이 있다.


 참 부지런한 사람이다. 그런 친구를 떠올리며 답장을 하려니, 문득 그가 결혼과 육아 틈틈이 꿈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모습이 떠올랐다. 그래서 나는 그런 네 모습이 부럽다고 쓰게 되었다. 약간 틀에 박힌 문장이지만 쓸 수밖에 없는 ‘수고에 대한 격려’. 아쉬운 결과에 대한 납득할 만한 ‘이유와 응원’을 담은 내용이 이어졌다. 메시지를 적고 다시 읽어보는데, 나는 내가 적은 메시지를 전송하기 직전에 부랴부랴 ‘부럽다’는 단어를 지우고, ‘대단하다’로 고쳐 보냈다.


 문득 ‘부럽다’고 적으면 내 입장에서 ‘보내는 메시지’가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히려 그 친구의 입장에서 ‘읽히는 메시지’로써, ‘대단하다’라는 단어가 스스로를 대견하게 만들고, 더 큰 위로로 느껴질 거라 생각했다. 그리고 ‘부럽다’라는 단어에 감추어 쓴 ‘비교적 나태하게 느껴지는 나 자신의 초라함’도 마음에 걸렸다.


 잠시 후 친구로부터 답장이 왔다. 시간을 쪼개가며 공부했을 그 시간이 힘들었는지 어쨌는지 구구절절 자세히 적지는 않았지만 내가 보낸 메시지를 읽고 잠시 울컥했다고 했다. (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울컥했다는 친구의 말에 유튜브 링크로 나훈아의 ‘울긴 왜 울어’를 보냈고, 곧 ‘ㅋㅋㅋㅋ’ 하는 답장이 왔다. )



 메시지를 고쳐 보내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글로 정리하니 그럴듯해 보이지만, 사실은 깊이 생각하고 보냈다기보다는 뭔가 즉흥적으로 한 행동이었다. 어떻게 보냈더라도 상관없었을지 모른다. 그런데 친구가 울컥했다는 답장을 받고 나니, 문자를 고쳐 써 보낸 작은 행동이 묘하게 느껴졌다. 평소 우유부단하고 실행력 떨어진다는 평을 받던 내가, 이런 순간에 빠르게 생각할 수 있다는 사실이 스스로 신기했다. 뭔가 거창하게 말하고 있지만 별일 아닌 경험이다. 그저 개인적으로 조금 특별했기에 적어두려고 한다.


 그리고, 때로는 틀에 박힌 말이라 느껴질 수 있는 구절들도, 누군가를 울컥하게 만드는 위로가 될 수 있구나 깨달았다. 어쩌면 그런 말조차 보내지 않는 시대에 살기 때문일까? 그 친구에게는 몇 번 만나서 얘기한 적이 있었다. 네가 뭘 하든지 나를 포함한 친구들은 너의 일을 응원할 거라고. (그러면서 친구의 계획에 딴지를 걸기도 했지만) 매번 이런저런 사업 계획과 꿈을 어필하던 그 친구도 조금씩 나이를 먹어가는 모양이다. 그 친구는 도전하면서 힘을 얻고 있었고, 나는 조용히 지내면서 충전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신학이든 사업이든 뭐가 됐든 그의 행위보다 더 강한 유대감이 있는 상태의 관계라는 것을 확인한 느낌이다.


 그 친구는 언젠가 나에게 자신이 다니고 있는 회사에서 후배나 거래처 직원들이 자신을 독사로 부른다는 얘길 한 적이 있다. 나에게는 상상할 수 없는 모습인데, 내가 느낀 그의 특이하고 열정적인 모습들이 다른 사람들에겐 다르게 느껴질 수도 있겠구나 싶어서 수긍이 가긴 했다. 누구나 오랜 인연이 아니면 말할 수 없는 이야기들이 있다. 한 사람이 누군가에겐 독사처럼, 누군가에겐 작은 위로에 울컥하는 어른 아이로 보여질 수 있다는 사실이 새삼스럽다. 친구는 친구대로 나는 나대로 여전히 성장하고 있다. 사회에서 만난 사람들과 어렸을 때부터 알고 지내온 친구가 다른 점은 여전히 그런 시시콜콜하지만 깊은 것들을 나누고 공감할 수 있다는 게 아닐까. (문자를 고쳐 쓴 이야기는 친구에게 하지 않았지만)



BGM♪ M83 ‘The Wiza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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