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주노초파남보. 내가 좋아하는 분홍색과 하얀색도 나란히 누워있다. 그 옆엔, 이제 막 강의실에 뛰어들어 온 새내기 하늘색도 커다란 키 뽐내며 자리를 차지한다. 아직 주인을 만나지 못해 텅텅 빈 자리도 보이지만, 오히려 다른 친구들을 더 빛내주는 조연을 자처하고 있는 듯 하다. 원래 그랬다는 듯이. 어색하지 않아 다행이다.
다음 날, 다시 문이 열리고
자리가 서로 많이 바뀌어있다. 또 다른 그림을 위한 스케치처럼 우리들도 나름의 준비를 위한 것 일까.
내가 좋아하는 분홍색이 저 멀리 혼자 떨어져 있다.
오늘은 그 분홍색이 제일 먼저 손을 내민다. 맘이 통했나, 안 그래도 너였는데.
부스스한 눈을 한 번 비비고는 크레파스를 잡는다.
볼펜을 잡고 꾹꾹 글씨를 써내려가듯이,
크레파스는 내 손을 통해 부드럽게 달려간다.
내가 원하는 대로, 채워지고 그려지고,
내가 원하는 대로, 만들어지고 다듬어지고
내가 원하는 대로, 때론 사랑스럽게 앙칼지게
무지개 색깔만큼 이나 다양한 크레파스처럼,
파란만장한 내 삶속에도 내가 원하는 그림이 예쁜 색깔로 채워지길 바라보며, 캔버스 위에 내 이름을 진하게 새기는 중 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