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공동체 자산화: 지역이 스스로 주인 되는 법

by On the Roa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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뜨는 동네의 역설


지역이 뜨기 시작하면 어김없이 외부 자본이 들어옵니다. 처음에는 반깁니다. 낡은 건물이 카페가 되고, 빈 상가에 불이 켜집니다. 골목에 사람이 넘치고 지역 언론에 기사가 납니다. 그런데 3년쯤 지나면 이상한 일이 벌어집니다. 임대료가 오르고, 원래 살던 사람들이 밀려나고, 지역의 색깔이 사라집니다. 어느새 전국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프랜차이즈가 그 자리를 채웁니다.


황리단길이 그랬고, 경리단길이 그랬고, 전국의 수많은 '○○단길'이 같은 경로를 밟았습니다. 뜨는 동네가 결국 텅 비는 동네가 되는 이 역설의 원인은 하나입니다. 수익이 지역 밖으로 빠져나갔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자본 그 자체가 아닙니다. 자본의 방향입니다. 외부에서 들어와 외부로 빠져나가는 자본은 지역을 소비하지만, 지역 안에서 순환하는 자본은 지역을 키웁니다. 공동체 자산화란 바로 이 방향을 바꾸는 일입니다.


공동체 자산화란 무엇인가


공동체 자산화(Community Asset Transfer)는 원래 영국에서 시작된 개념입니다. 2003년 영국 정부는 지방자치단체가 소유한 유휴 공공 자산을 주민 공동체에 장기 저가로 이전할 수 있도록 하는 제도적 틀을 만들었습니다. 낡은 도서관, 문을 닫은 공중목욕탕, 쓰지 않는 공원 관리 건물까지 — 지방정부가 팔거나 방치하는 대신 마을 협동조합이나 사회적 기업에 빌려주고, 그 공간에서 발생한 수익이 지역 주민에게 돌아오게 하는 구조입니다.


영국 버밍엄의 '킹스히스 파크'가 대표적입니다. 예산 부족으로 폐쇄 위기에 놓인 공원 관리 건물을 지자체가 철거하는 대신 마을 협동조합에 99년 장기 임대했습니다. 협동조합은 이 공간을 카페와 커뮤니티 허브로 운영하며 수익을 마을 프로그램에 재투자했습니다. 건물은 그대로였지만 주인이 바뀌자 공간이 살아났습니다.


핵심은 단순합니다. 팔지 않고 빌려주는 것. 매각하면 자산이 지역을 떠나지만, 장기 임대하면 자산은 지역에 남고 운영 주체만 바뀝니다. 그리고 그 주체가 지역 주민일 때 수익은 지역 안에서 순환합니다.


사례: 전남 신안 퍼플섬 — 무인도 위기에서 세계적 브랜드로


2015년까지만 해도 전남 신안군 반월도·박지도는 무인도가 될 위기에 처한 섬이었습니다. 인구는 줄고, 젊은이는 떠나고, 남은 것은 낡은 지붕과 노인들뿐이었습니다.


전환의 시작은 의외로 단순했습니다. 섬 전체를 보라색으로 통일한 것입니다. 지붕, 도로, 다리, 식당 그릇까지. 그런데 이것이 단순한 색깔 마케팅이 아니었습니다. 신안군수는 성공 비결로 '아름다운 자연, 고유한 이야기, 매력 넘치는 브랜딩'을 꼽으며, 극한 상황과 우리만 가진 특수한 환경이 거꾸로 세계적 경쟁력이 됐다고 설명했습니다. 결핍을 브랜드로 바꾼 것입니다. OhmyNews


그런데 퍼플섬이 단순한 관광 성공 사례가 아닌 진짜 이유는 수익 구조 때문입니다. 관광객이 섬에서 쓰는 돈이 외부 사업자가 아니라 섬 주민에게 돌아갑니다. 주민들이 직접 식당을 운영하고, 숙소를 내어주고, 라벤더와 아스타 국화 체험 프로그램을 이끕니다. 브랜드가 커질수록 외부 자본의 수익이 아니라 주민의 소득이 올라가는 구조입니다.


지금 퍼플섬에는 주말마다 3,000명의 관광객이 찾아옵니다. 전 세계 언론이 주목하고, 독일·홍콩·미국 미디어가 앞다퉈 소개했습니다. 무인도가 될 뻔했던 섬이 사라지지 않은 이유는 인구가 늘어서가 아닙니다. 섬이라는 자산의 주인이 주민 자신이었기 때문입니다.


왜 지금 이 이야기를 해야 하는가


한국의 로컬 브랜딩 현장에서 가장 많이 목격하는 실패 패턴이 있습니다. 지자체가 수억 원을 들여 공간을 조성하고, 외부 기획사에 운영을 맡깁니다. 초반 1~2년은 화제가 됩니다. 그런데 계약이 끝나면 기획사는 떠나고, 남은 것은 텅 빈 공간과 관리비 청구서뿐입니다. 지역 주민은 그 공간의 관객이었을 뿐, 한 번도 주인이 된 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반대의 경우도 있습니다. 초라해 보이지만 10년 넘게 살아남는 공간들. 이런 곳들의 공통점은 언제나 지역 사람이 주인이라는 것입니다. 운영이 다소 거칠어도, 마케팅이 세련되지 않아도, 주인이 있는 곳은 쉽게 사라지지 않습니다.


공동체 자산화의 3단계 설계


현장에서 공동체 자산화를 실현하려면 세 가지 단계가 필요합니다.


1단계: 자산 목록 만들기


지역 안에 있는 유휴 공간, 오래된 건물, 사라져가는 기술과 레시피, 지역 고유의 품종과 이야기 — 이 모든 것이 자산입니다. 먼저 목록을 만들어야 무엇을 지킬지 알 수 있습니다. 많은 지자체가 이 첫 단계를 건너뛰고 개발부터 시작하다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합니다. 철거하기 전에 목록을 만드십시오. 목록이 곧 지도이고, 지도가 곧 전략입니다.


2단계: 소유 구조 설계하기


자산을 누가 소유하느냐가 핵심입니다. 지자체 소유로 두면 행정의 논리에 따라 언제든 용도가 바뀔 수 있습니다. 영국의 사례처럼 주민 협동조합이나 사회적 기업이 장기 임차하는 구조를 만들어야 그 자산이 지역 안에 머뭅니다. 소유는 애착을 만들고, 애착은 지속을 만듭니다. 팔지 말고 빌려주십시오.


3단계: 수익 순환 구조 만들기


자산에서 발생한 수익이 다시 지역으로 돌아오는 구조를 설계해야 합니다. 수익의 일부는 운영비로, 일부는 지역 구성원의 배당으로, 일부는 다음 자산 발굴을 위한 씨앗 자금으로. 퍼플섬처럼 브랜드가 성장할수록 주민 소득이 함께 올라가는 구조. 이 순환이 작동할 때 공동체 자산화는 구호가 아니라 현실이 됩니다.


지자체가 당장 할 수 있는 세 가지


거창한 제도 개혁을 기다릴 필요가 없습니다.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것들이 있습니다.


첫째, 유휴 공공 건물을 마을 조직에 장기 저가로 임대하십시오. 매각보다 임대가 지역 자산을 지키는 더 나은 방법입니다. 팔면 끝이지만, 빌려주면 관계가 남습니다. 영국이 20년 전에 시작한 이 단순한 원칙이 수백 개 마을을 살렸습니다.


둘째, 공공기관 구매를 로컬 브랜드로 먼저 채우십시오. 공공기관이 첫 번째 고객이 되어주는 것만으로 브랜드의 생존율이 달라집니다. 가장 빠르고 가장 확실한 초기 시장 형성 방법입니다.


셋째, 지역 내 소비 순환율을 측정하십시오. 지역에서 번 돈이 지역 안에서 얼마나 다시 소비되는지를 수치로 만드십시오. 측정하지 않으면 개선할 수 없습니다. 이 숫자가 올라가는 방향으로 정책을 설계하는 것, 그것이 공동체 자산화의 가장 실용적인 출발점입니다.


맺으며: 주인이 있는 지역은 사라지지 않는다


지역 소멸의 본질은 인구 감소가 아닙니다. 주인 의식의 소멸입니다. 내가 사는 곳이 내 것이 아니라는 느낌, 아무리 노력해도 수익은 외부로 빠져나간다는 무력감 — 이것이 사람들을 떠나게 만드는 진짜 이유입니다.


공동체 자산화는 이 무력감을 뒤집는 일입니다. 무인도가 될 뻔했던 신안의 섬이 세계적 브랜드가 된 것도, 영국의 낡은 공원 건물이 마을의 심장이 된 것도, 결국 같은 원리에서 출발했습니다. 지역의 자산이 지역 사람의 손에 남았을 때, 그 지역은 스스로 살아남을 이유를 갖게 됩니다.


브랜드 소멸을 막는 가장 강력한 무기는 화려한 마케팅이 아닙니다. 주인이 있는 것입니다.


공동체가 자산의 주인이 되었다면, 이제 그 자산을 운영할 사람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현실은 냉혹합니다. 지역에는 일자리가 없다고들 합니다. 정말 그럴까요? 다음 글에서는 청년이 돌아오는 지역은 무엇이 달랐는지 살펴봅니다. 일자리가 아니라 일감, 그 한 글자의 차이가 지역의 미래를 바꿉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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